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 제 4 부 예수님과 함께 지성소에서 (죄의 존재로부터의 자유) 19. 감추어진 만나 (나의 모든 양식은 그리스도의 것임)
 예수의 상징인 만나
 만나는 아랍인들이 진주라고 부른 배델리엄(bdellium)과 비슷하였다(민 11:7, 모팟<Moffat>; 게세니우스<Gesenius>의 Hebrew Lexicon을 보라; 칠십 인역(LXX)은 수정으로 번역하였다). 하늘의 대단히 귀중한 진주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만나가 말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깊이 생각하여 보라. 진주 표면에는 수천개의 세밀한 수정들이 태양 빛을 멋진 무수한 무지개로 분사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의 이 상징(창 9:11~17)은 진주의 광채나는 표면 위에 희미하게 비추면서 우리에게 구세주의 불변하는 사랑을 전하여 준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의 빛이 인간의 피로한 눈에 너무나 부시기에 하늘의 영감받은 프리즘인 성경이 구세주의 영광을 취하여서 여러 색깔로 반사되는 각양 은혜로 나누어(벧전 4:10, “각양”의 문자적인 의미는 다색(多色)이다; 벧전 1:6에는 “여러 가지 시험” 이라고 번역됨), 우리로 하여금 구세주의 사랑을 분별하도록 능력 주신다. (241.2)
 만나는 매일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라고 북돋았다. 만나로 하나 가득든 입마다 하나님의 틀림없는 약속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선언하시었다(요 6:63). 우리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글자들을 사용하여 단어들과 더 나아가 문장들을 만든다. 성경은 예수께서 하늘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알파벳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직접 “나는 알랩과 타우, 알파와 오메가요”라고 말씀하시었다(계 21:6; 22:13; 1:8; 주: “동방 사본에는 알렌과 타우로 나와있다.” Lamssa, New Testament; 알렙과 타우는 구약성경 대부분이 사용한 히브리어의 처음과 마지막 문자이고, 알파와 오메가는 신약성경이 사용한 희랍어의 처음과 마지막 문자이다.). 이 단어들은 히브리어와 희랍어에서 포괄적이고 신성한 알파벳으로서, 이 두 제한점 사이를 완벽한 의사 소통을 이루는 하나님의 언어로 둘렀다(히 1:1, 2). 하나님은 그분에 의하여 살아 있는 말씀을 묘사할 영감받은 어휘들을 꼴지웠다. 영원하신 분께서 인류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고자 할 때 그분은 베들레헴의 그 아기, 즉 성육하신 말씀을 사용하시었다(요 1:1, 14). 예수는 선지자들을 통하여서도 영감받은 말씀을 주셨다(벧전 1:10~12).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아버지의 개인적이고, 유지하여 주는 말씀으로 여기는가?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이 사실을 설명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여 주었다. 여호와께서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신 8:3, 16). 이제 그분께서는 우리가 “맛보고 알”도록 청하시고, 우리로 먹고 자라라고 강권하신다(시 34:8). (241.3)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서 각 사람은 매일 필요한 양만큼의 만나를 거두었다 (출 16:16~21). (241.4)
 비록 연약한 자는 조금 거둘 수밖에 없었고, 또 강한 자는 많이 거두고자 하는 유혹을 받았지만, 각 사람의 양식이 성소의 저울에 달아 졌을 때 하늘의 하사품은 모든 가정들에게 딱맞아 떨어지게 충분하였다. 이것은 기적적으로 보이는데, 바울에게 조차도 기적적으로 보였다. 그는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음을 인하여 놀랐다(고후 8:15). 이 신비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하늘의 측정에 의하면 허기짐은 하나님의 하사품의 유일한 한계이다. 모든 사람은 “각기 식량”에 매일 만족하였다(출 16:18).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용량만큼 우리에게 주신다. 굶주린 영혼들이여, 하나님의 생명의 떡의 창고는 넘친다. 그 창고가 차고 넘침을 인하여 잔치를 벌려라! 영원하신 성령이시여, 우리의 식욕을 다스리소서. (242.1)
 하나님의 백성의 진영에만 떨어진 만나
 만나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진영 내에만 떨어졌다(출 16:13, 14; 민 11:9). 방황하는 지파는 헛되이 만나를 먼 곳에서 채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섞인 무리” 조차도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굶주리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우물가의 여인에게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고 선언하였다. 유대인 예수는 불변하는 생명의 떡이다(요 6:41, 48).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변함없이 인간을 위하여 봉사하는 통로를 제자들에게 설명하시었다. 그는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강조하면서(요 15:26)계속하여 “그가 와서 ∙∙∙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말씀하시었다(요 16:7~11). 성령에 충만된 신자들을 통하여 구세주의 사역이 퍼질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계속적으로 복종하는 통로인가? (242.2)
 만나는 이스라엘 각 가정 주위에 떨어졌다. 가장 약한 자들도 오직 천막을 올리고 발 앞에 있는 양식을 줍기만 하면 되었다. 다윗은 자기 백성들에게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시 34:18)라고 노래하였는데, 그의 관찰은 오늘날에도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자기가 이 세상에 계셨을 때 가까이 하였던 자기 제자들 보다 우리와 더 가까이 계신다. 만나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굶어 죽어 가고 있는 자들은 손을 내밀면 생명의 떡이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죽기를 선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242.3)
 만나는 “꿀 섞은 과자같아”(출 16:31) 영양분을 줄 뿐만 아니라 무척이나 맛있었다. 이 점은 우리 아버지의 푸짐하신 인정을 가리킨다. 하늘의 떡은 죽어가는 죄인들을 유지시켜 준다. 또 현인과 성도들의 마음을 평생에 걸친 연구를 통하여 계속하여 황홀하게 하여 준다. 주목하라!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성령에 의하여 탕자에게 집으로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집에 돌아온 그 젊은이에게는 하늘에서 가장 맛있는 만나가 차려 있는 연회 뿐만 아니라 의의 옷과 완전히 회복된 관계를 그에게 확신시켜 주는 권위의 반지가 주어진다(눅 15:17~24).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 혹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우리에게 주신다(엡 3:20, 21). (242.4)
 만나는 이스라엘의 주식(主食)이었다. “40년간 저들은 이 기적적 식량 공급으로 하나님의 끊임없는 돌보심과 부드러운 사랑을 날마다 생각하게 되었다”(부조와 선지자, 297). (242.5)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루에 한 번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원칙은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라고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신 33:25).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신뢰하여야만 하고, 매일 구하여야만 하고, 만족하여야 할 것이다. 이 사실에 근거하여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마 6:11). (243.1)
 그러나 만나는 단조(短調)로 작곡된 애도가(哀悼歌)도 부른다. 만나를 저장하면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몇몇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경고를 믿지 않고, 하루 식량 보다 훨씬 많이 거두었다. 오늘 하루하루의 양식 분량 “이상의 것”을 그들은 믿음 없게도 내일의 필요를 위하여 놔두었지만, 결국 하늘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을 뿐이다(출 16:20). 하나님의 선물은 오늘 사용되어야 한다. 내일의 배고픔을 위하여서는 내일의 신선한 떡을 받을 것이다. (243.2)
 비록 이 만나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완전한 식량 공급이었지만 인간은 자신들의 식탁에 올릴 만나를 준비하여야만 하였다(출 16:23; 민 11:8). 가정마다 만나를 모아서 갈고, 원하는 대로 요리하였다. 우리들의 오늘날 만나는 영감의 말씀이다. 제자마다 그 말씀을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서 받아들여만 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그 메시지를 명상하고, 오늘 각자의 삶에 주시는 의미를 곰곰히 생각해야만 한다. 제자들은 근면하여 성경을 성경과 비교하여 보고, 성령의 감동하심에 쫓아 성경 말씀이 시사하는 바를 기꺼이 따라가야 한다. 아무리 깊은 연구를 해도 영감의 말씀이 믿음에 의하여 그 사람의 마음에 동화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 삶은 풍성해지지 않는다. (243.3)
 거두지 않은 만나는 오전에 사라져 버림
 만나는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녹아 버리고,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출 16:21). 우리도 하늘의 음식을 거두는 것을 우리의 첫번째 일이 되게 하여야만 한다. 동틀 무렵이 가장 적합하다. 왜냐하면 한 낮이 되면 기회를 잃기 때문이다. 하루의 바쁜 활동들이 이 하늘 떡에 의하여 영양 공급을 받지 않은 삶을 압도하여 버릴 것이다. (243.4)
 지성소에 위치한 법궤 안에는 한 사람의 하루치 식량이 금 항아리 안에 저장되어 있었다(출 16:32~34; 히 9:4). 성소에 들어간 모든 사람들은 “진설병”을 볼 수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감추었던” 만나라고 칭하셨다(계 2:17). 최내부에 테피스트리(휘장)뒤에 영광에 의하여 감추어진 만나는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믿음으로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라고 강권하였다(고전 10:3; 비교 느 9:20). (243.5)
 성령의 한 상징인 만나
 예수께서는 청중들에게 그들의 조상에게 이 하늘 떡을 준 사람이 모세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켰다(요 6:31~35). “만나를 주신 분께서는 그들 가운데 서 계셨다. 히브리인들을 광야 가운데서 인도하시고 하늘에서 내리는 떡으로 날마다 그들을 먹이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그 양식은 하늘에서 오신 참 떡의 한 표상이었다.” (243.6)
 “참된 만나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충만함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을 주는 성령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6:33; 시대의 소망, 386, 이탤릭체는 필자의 것임). 주님,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먹으면서 살아갈 때에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의 삶의 방식을 꼴 지워 주시옵소서. (244.1)
 이 진술은 신비한 만나가 성령의 중요한 한 상징이다는 성경의 진리를 일깨워 준다. 느헤미야는 통찰력 있게 “주의 선한 신(神)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로 저희 입에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의 목마름을 인하여 물을 주시”옵소서 라고 노래하였다(느 9:20). 또 이스라엘의 명가수는 여호와께서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 반석을 가르신즉 물이 흘러 나서 마른땅에 강같이 흘렀으니”라고 덧붙여 노래한다(시 105:40, 41). 영감을 받은 이 시인들은 신(神)과 만나, 물과 양식이란 단어를 교차적으로 구성된 히브리어 운문에서 사용하였다. 감추었던 만나는 보이지 않는, 영양을 공급하여 주는, 갈증을 풀어주는 성령의 표로서 이해하여야만 한다. 부활한 아들의 대표자인 이 다른 그리스도(Other Christ)는 하나님의 보좌에서부터 비상(飛上)하여, 그리스도의 간절한 부탁으로 우리에게 오시나 우리가 요청할 때만 우리 마음에 계신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는 위대한 교사의 교훈들로 우리를 감동시키고, 또 우리의 대제사장의 사역의 의미를 우리가 이해하도록 도움을 줄 채비를 항상 차리시고 계신다. (2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