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3부—안식일 신학 제15장—기독교의 현대 안식일 신학
 이 논문에서는 네 개의 특정 신학그룹들 즉, 급진적-비평적 그룹, 신 정통파 그룹, 복음주의 그룹, 기타 군소 종파 그룹 별로 그들이 주장하는 현대 안식일 신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261.1)
 급진적 비평적 그룹의 안식일 개념
 급진적-비판적 학파의 현대 안식일 개념은 안식일의 기원이 신비에 가리워져 있기 때문에 어떠한 과학적인 검증으로도 그 기원을 밝힐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안식일의 기원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여러가지 서로 상충하는 가설들이 제안되었다. 그동안 제기되었던 여러 주장들 중에는 안식일의 기원이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의 우울한 금기일이라는 학설, 금속 세공업에 종사하는 종족이었던 겐족속(Kenstes)의 휴일이라는 학설, 또는 만월 축제일이었다는 학설, 고대의 장날(Market day)이었다는 학설 등이 있다. 그러나 이렇듯 안식일의 기원을 성경의 자료 밖에서 찾아내려는 여러 주장들은 보수적인 학자들의 동의와 지지를 얻지 못했다. 특히 J.H. 미스터즈(Meesters)는 위의 주장들을 세밀히 검토한 끝에 안식일의 기원을 성경적인 제도와 관습 밖에서 설명하려고 했던 모든 시도들이 실패로 끝났으며 따라서 남아있는 유일한 결론이 있다면 그것은 칠일 주간의 경우처럼 안식일도 이스라엘 고유의 제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1 다른 여러 학자들도 이와 똑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 중에는 에드워드 로제(Edward L사ise)도 포함되는데 그는 말하기를 구약성경 안식일의 의미와 내용은 “독립적으로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에 의해 지배되어 온 것이다”라고 하였다.2 (261.2)
 비평 학파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제칠일 안식일의 연대가 모세의 시대로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출애굽기 20장이나 신명기 5장의 십계명에 나오는 넷째 계명은 후기 편집자들의 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안식일의 출발이 야훼 신앙과 연결되고 있음은 인정하고 있으나 출애굽기 20:11이 주장하는 것처럼 안식일 기념의 동기를 창조의 모티브에 두게 된 것은 B.C 500년 경의 편집자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때에 편집자가 창세기 1-2장의 창조 이야기를 읽으면서 영감을 받아 안식일을 기념하는 동기를 창조의 사건에 연결시켰다는 것이다. 신명기 5장에 나오고 있는 안식일 계명에는 안식일을 기념하는 동기로 출애굽의 사건이 제시되고 있는데 이것도 B.C 650년 경에 신명기를 편집한 편집자가 추가했다는 것이다. (261.3)
 많은 학자들이 이른바 최초의 안식일 계명을 재구성해 보려고 시도했다. 그들의 공통된 결론은 본래의 안식일 계명은 “제칠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간단한 부정적인 명령의 형태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1930년 이후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을 여행할때 모세에 의해 안식일 계명의 최초의 형태가 기원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하나의 강력한 추세를 형성했다.3 그러나 안식일을 언급하는 창조 이야기인 창세기 2:2, 3은 신명기의 십계명이 제정된 이후인 바벨론 유수기간에 제사장들에 의하여 기록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일반적인 추측이다. 즉 다른 편집자가 창세기 2:2, 3에 기초하여 출애굽기 20:8-11의 안식일 계명 즉 창조의 사건에 기초한 안식일 계명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262.1)
 신약학의 분야에서는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과 그의 추종자들이 안식일에 대하여 다소 급진적인 비평을 내놓고 있으며 일부 보수적인 복음주의 계열의 학자들까지도 이 주장을 수용하고 있다. 불트만은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예수님을 인도하면서 밀 이삭을 자른 일을 가지고 바리새인들이 그들을 정죄했을 때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대답하신 마가복음 2:23-28(참조. 마 12:1-8)을 원시 기독교의 주장으로 이해하였다. 즉 마가복음의 이 부분은 초대 교회가 자신들의 안식일 습관이 예수에 기인한다고 주장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라”“인자”(사람의 아들)란 표현이 후에 아람어로 부터 번역된 것이며 이 구절의 취지는 모든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이 안식일 계명을 무시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 하였다.4 (262.2)
 에른스트 케제만(Emst Kasemann)도 기본적으로는 불트만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원시 기독교가 안식일에 대해 너무 자유롭게 처신하기를 주저했으며 그렇게 때문에 그들이 마가복음 2:28에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인자”(그리스도)라는 표현을 만들어 냈다. 에드워드 로제(Edward Rose)의 입장도 케제만의 주장과 대동소이하다.5 (262.3)
 윌리 로드도르프(Willy Rordorf)는 역사적인 연구의 성격이 더많은 그의「일요일:기독교회 첫 세기에 이루어진 안식과 예배의 날의 역사」(Sunday:The History of the Day of Rest and Worship in the Earliest Centuries of the Chirstian Church) 에 서 주장하기를 “예수가 안식일 계명 자체는 공격하지 않고 다만 바리새인들의 궤변적인 안식일 규칙만을 공격했다는 주장은 잘못된 인식”이라고 하였다. 그는 심지어 안식일의 “신(神)적인 목적은 실패했으며 따라서 그것에 대한 반역이나 그것을 무시하는 행위는 죄가 안된다”고 까지 주장했다. 그는 또 안식일 계명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계명이 인간을 노예화했다”고 까지 극언하였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예수)는 구약 성경의 제사 전통에 들어있는 이 계명에 대하여 두려움 없이 문제를 제기했다”고 하였다. 로르도르프는 이같은 전제하에서 결론하여 말하기를 예수께서 안식일에 행하신 모든 치유행위는 “그에게 안식일 계명이 아무런 구속력이 없음”을 나타내려 했던 도발 행위들이었다고 했다.6 (262.4)
 그래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막 2:27)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유대민족이 “바벨론에 의해 사로잡힌 이후의 유대교에 의해 수립된 전체 안식일 신학을 배 밖으로 내던지는” 선언이었다는 것이다. 로르도르프의 이해에 따르면 예수의 메시야적 자각은 어떠한 제약도 인정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끊임없는 활동 앞에서는 심지어 구약 성경의 안식일 계명까지도 “간단히 폐지되었다”는 것이다.7 로르도르프는 마태복음 24:20에서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하신 예수님의 말씀까지도 다음과 같은 간단한 단평 한마디로 간단히 무시하였다. 즉 마태복음의 이 부분은 “안식일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고있지 않은 마가복음 13:18을 확대시킨 이차적인 구절이며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있던 유태계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추가시킨 것이 라는 것이다.”8 (263.1)
 안식일에 대한 급진적 비판적인 개념들을 요약한다면 이것들은 성경 기록의 역사적 신빙성에 대한 신뢰조차 나타내고 있지 않으며 성경의 본문에 대한 합당한 존중도 나타내고 있지 않다고 하겠다. (263.2)
 신 정통학파의 안식일 신학
 의심할 나위없이 지금까지 발표된 안식일 신학들 가운데 가장 심오한 것은 신정통파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가 그의「교의 학」(Church Dogmatics)에서 기술한 안식일 신학이다.9 바르트의 안식일 신학은 존 칼빈의 안식일 신학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칼빈은 안식일이 구약 성경에서 최고로 중요시되었다고 강조하였다. 칼빈에 따르면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은혜의 계약의 독특한 표징이며 영적인 안식과 하늘의 안식의 전조(前北)이다. 때문에 안식일 계명은 다른 모든 계명들보다도 특별히 존중되었다. 바르트의 기독론 신학은 칼빈의 안식일 개념을 발전시켰다. 칼빈에 의하면 안식일은 창조때 제정되었으며 창조주는 창조 주간의 제칠일에 자신이 직접 안식하시는 모범을 보이심으로써 사람들에게 더욱 큰 경건으로 안식일을 지키도록 열의를 불러일으켰다.10 (263.3)
 바르트는 창세기 1장에 기술된 창조의 일을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의 “외부적인 토대”로 생각하여 창세기 2:2에서 하나님이 제칠일에 쉬신 행위를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계약의 “비밀스런” 출발로 해석했다.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이 사람과 이 세상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창세기 2:2에서 창조주간의 제칠일에 안식하심으로써 제칠일 안식일이란 이 특별한 창조의 제도에 전체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복된 선물이라는 의의를 부여하였다. 사람을 우두머리로 하는 이 창조계는 오직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만 자신의 완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되어있다. 즉 “하나님의 최초의 안식일 준수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계에게 당신을 본받아 안식일을 지키도록하신 이 초청에 나타난 구체적인 뜻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의미와 의도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11 (263.4)
 바르트는 안식일의 교제에 나타난 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이 언약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은혜와 구속의 언약으로 이해하였다. 이와같이 창조의 안식일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예언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따라서 창조의 안식일은 창세기 2장에서부터 기독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약속된 은혜의 안식을 상징하는 안식일은 사람이 자기의 일을하는 한 주간의 끝에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주간의 출발에 오고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제 6일에 창조되었고 제6일에 창조된 사람은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기 때문에 안식일에 오직 하나님의 일과 공로만을 기념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264.1)
 바르트는 선언하기를 넷째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안식으로 들어 올 것이며 하나님 앞에 자랑할 자신의 공로나 공의는 조금도 신뢰하지 말라고 명령한다고 하였다.12 그래서 이스라엘은 매 주간마다 제칠일에 창조주가 그들의 구속주이며 그들을 의롭게 하는 자이며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자라는 사실을 상기하여야 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바르트는 주장하기를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의 근간이며 모든 계명을 포괄하는 계명이라 하였다. 하나님의 구속적 은혜의 총합이라고 하였다. 안식일 계명에서만 율법과 복음이 완전히 하나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 라는 것이다. (264.2)
 뿐만 아니라 그는 안식일에서 기독론적 구속의 의의만 강조하지 않고 안식일 계명의 종말론적인 심판의 의의도 함께 강조하였다. 바르트는 이사야 58장 13, 14절예레미야 17장 24-27절에 기초하여 안식일과 심판의 날로서의 “여호와의 날” 사이에 있는 숨은 관련성을 주목하였다. 그러나 그 날은 회복된 축복의 날이 될 것이었다. 최초의 안식일에 주어졌던 약속이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날이 될 것이었다. 바르트는 “안식일 계명의 근본적인 중요성과 그 엄청난 관련 범위을 일종의 두려움”을 가지고 확신하고 있다. (264.3)
 바르트의 안식일 신학에서 우리는 하나의 감당하기 어려운 긴장을 느끼게 된다. 그 긴장은 그가 한쪽으로는 안식일을 하나님의 창조의 때에 제정된 계명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의 상징으로 강조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그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의 역사와 함께 그 언약의 상징인 안식일이 끝났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바르트는 기독교에 의하여 제칠일 안식일이 일요일로 바뀌어진 역사적 현상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그는 놀랍게도 주간의 첫 날에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 절정에 다다른 그리스도의 초림이 “언약과 구원의 역사의 종결”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13 따라서 이제 주간의 첫째 날이 새 시대의 안식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성경의 구체적인 뒷 받침없이 오직 자신의 그 같은 논리만으로는 교회가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꾸어야 했던 필요성이 분명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이 보인다. 그래서 그는 그의 일요일 신학을 위해, 즉 “창조의 때에 제정된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명백한 반란 행위” 같이 보이는 일요일 휴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개의 성서적 논거를 제시했다.14 (264.4)
 그가 첫 번째 성서적 논거로 제시한 성경절은 그동안 많이 논란된 세 개의 신약 성경절이다. 그는 고린도전서 16:2; 사도행전 20:7;요한계시록 1:10을 아무런 주해 없이 일요일 예배의 성서적 근거로 제시하였다. 그는 이 성경절들을 토대로 하여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순종의 부채의 날인 제칠일 대신에 주간의 첫째 날을 지키기 시작하였다”고만 말했다.15 루터나 칼빈도 위의 성경절에서 그러한 명령을 찾지 못했는데 바르트는 성경의 어디에서 그 같은 명령을 읽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264.5)
 그러나 바르트는 그 다음에 “직접적인 증거”도 제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 증거는 창조의 때에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마련하신 최초의 질서에서 하나님의 제칠일 안식일이 사람들이 자기의 일을 해야하는 여섯 날들의 앞에 즉 첫째 날의 자리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기독교의 발견속에 있다고 하였다. 즉 “주의 날”은 진실로 인간의 첫째 날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은 언제나 인간의 마지막 날인 일곱째 날이 아니라 첫째 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바르트는 기독교가 “첫째 날”을 자신의 안식일로 채택한 것은 사실상 “하나의 혁신적인 변화가 아니라 창세기 1장의 계산 속에 이미 숨겨져 있던 것의 새로운 발견”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일요일로의 변경에 따르는 신앙적인 딜레마를 해결하고자 하였다.16 (265.1)
 바르트는 그의 “일요일 안식일”을지지하는 “직접적인 증거”라는 것이 단지 추론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의 증거는 창세기 창조 이야기의 날짜 계산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질문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 만약 주님의 날로서의 제칠일 안식일이 진실로 제6일에 태어난 아담에게는 최초의 날이었으며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주도적이고 붙들어주시는 은혜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사실을 상징하고 있다면 왜 구태여 기독교회가 “창조 때에 이루어진 이 하나님의 질서” 곧 제칠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창조의 전통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무엇인가? (2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