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사무엘 상∙하 제 Ⅴ 부 다윗: 상처난 왕의 몰락 (삼하 13-24) 제 11 장 강간과 복수, 반란과 귀환-제2편 (삼하 18-20)
 압살롬의 비명과 그의 자식 없음에 대한 언급은 전쟁 기록 끝에 온 고독한 소리이다(18절). 14:27에 의하면, 압살롬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성경은 그들의 운명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압살롬의 운명, 나무에 달려 죽은 역적은 성경을 아는 사람이면 생각에 잠기게 한다. 신명기 21:23“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하였다. 이 말을 폴친은 “달리는 것” 그 자체가 “죽음보다 더 나쁜 운명”이라고 설명한다(David, 186). 역적과 그를 지지했던 왕국에게 그런 저주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301.2)
 훗날 다윗의 다른 아들이 나무에 달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저주를 복으로 바꿀 것이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그의 죽음을 하나님의 구속의 길이라고 담대히 전하였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오사,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신 바 되사” 나무에 달리셨다고 세상에 알렸다(갈 3:13). (301.3)
 그러나 압살롬의 죽음에는 그러한 구속적인 가치가 없다. 얼마 동안, 왕곡에 있는 그의 비문에 의하여, 에브라임 수풀의 돌무더기에 의하여 기억될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기념비가 현재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사무엘하 18장의 말씀에 나오는, 몸에 세 개의 창이 박혀 나무에 달려있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 표본의 하나인 압살롬을 그린 암울한 그림뿐이다. (301.4)
 누가 왕께 고하겠는가?(18:19-19:8)
 압살롬이 죽은 후—다윗의 소원과 반하여, 그것도 왕의 군대 사령관의 손에 의해—요압, 바로 그 사령관인 요압은 다윗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지 난관에 봉착했다. 아히마아스가 자원하였다. 요압은 안 된다고 하였다. 아마도, 이 “좋은” 사람이 왕의 아들이 죽었다는 “악한” 소식을 전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18:20). “좋은” 사람은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소식은 왕에게는 좋은 소식이 못되었다. (302.1)
 그래서 요압은 구스 사람, 외국인이고, 중립적인 사람을 택하여 공식적인 주자가 되게 하였다. 그가 왕에게 전하러 떠났다(21절). 그러나 아히마아스가 고집을 피웠다. 요압이 마침내 가기를 허락했다. 그는 구스인을 제치고 다윗 앞에 먼저 나타났다. (302.2)
 낭송자(narrator)는 공식적인 전달까지 시간을 질질 끈다. 파수꾼이 적어도 세 번 다윗에게 보고한다: 한 번은 아히마아스가 처음 보였을 때이고, 구스인이 지평선 위에 나타났을 때이며, 아히마아스가 가까이 이르러 알아볼 수 있을 때이다(24-27절). 파수꾼의 외침을 들을 때마다 다윗은 이것이 좋은 소식이라고 해석했다. 홀로 뛰는 주자는 좋은 소식을 뜻한다고 다윗이 파수꾼에게 말했다. 두 사람이 따로 뛰어오기 때문에 각 사람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히마아스가 가까이 와서 알아볼 수 있게 되자, 다윗은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사자라고 말했다(27절). (302.3)
 왕이 들릴만한 거리에서 아히마아스는 승리를 전하였다. 그러나 다윗의 첫 질문은 압살롬에 관한 것이었다. 이 질문을 아히마아스는 요압이 생각했던 그대로 어떻게 대답할 줄 몰랐다. 그는 나쁜 소식을 전한다고 벌을 받을 것을 두려워했는가? 요압은 그에게 분명히 왕의 아들이 죽었다고 말하였다(20절). 그러나 설명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아히마아스는 왕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302.4)
 구스인이 왔을 때, 다윗은 같은 질문을 하였고, 이번에는 대답을 얻었다: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32절). (303.1)
 왕은 놀라서 성문 위의 방으로 들어가 울었다. 저자는 그가 울면서 무슨 소리를 했는지 우리에게 전한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33절). “내 아들”을 세어 보라. 다섯 번이나 된다. (303.2)
 모든 사람들이 다윗의 애통을 들을 수 있었다. 저자는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같이” 가만히 성으로 들어가니라고 말한다(19:3). 그리고 다시 한 번 다윗에게 초점을 맞춘다: “왕이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4절). “내 아들아”를 세어보면 세 번 더 부른 것을 알 수 있다. 도합 여덟 번이다. (303.3)
 바로 그때에 요압이 성난 태풍처럼 들어와 엄청난 열변을 토했다. 날카로운 말들을 주목해 보자. 기억할 것은, 요압이 지금 더도 덜도 아니고 왕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303.4)
 “왕은 모든 신복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5절). (303.5)
 “왕께서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를 미워하시고 오늘 장관들과 신복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6절). (303.6)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6절). (303.7)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왕의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7절). (303.8)
 요압은 못할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할 말을 다 했다. (303.9)
 그러나 그것은 주효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혹이 모든 백성에게 고하되, ‘왕이 문에 앉아 계시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앞으로 나아오니라”(8절). (303.10)
 왕의 몸뚱이는 거기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왕의 감정에 대하여는 한 마디 언급도 없다. 아마도 다윗은 이제 눈물을 닦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감사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찾았는가? (304.1)
 이 처절한 대사 속에서 저자가 의도한 효과의 감소도 무릅쓰고, 우리는 저자에게 다윗의 슬픔과 요압의 분노라는 이 팽팽한 드라마를 포함시킨 저의가 무엇이냐고 묻고 넘어가야 하겠다. 그것은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여전히 자식을 사랑하는 아비였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인가? 동시에 아비와 왕 노릇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려는 것인가? 아니면 다윗의 감정적 충격은 그로 왕이 되기에 불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했는가? (3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