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14:5,6). (302.2)
 자신의 확신에 따라 행동하고 식사와 날들의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견해도(롬 14:3,10,13-16,19-21) 함께 존중하는 그런 원칙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원칙과 명백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바울은 칭의의 문제에 있어서는 입장이 확고하여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였다. 그러나 날과 식사 문제에 있어서는 개인의 양심을 궁극적인 권위로 인정하고 있다. 이런 명백한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해답은 구원에 긴요한 것과 긴요치 않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바울의 이해에 달려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구원의 근거라는 사실은 바울에게 있어서 의심할 나위 없는 근본적인 원칙이었다(롬 3:22, 26-28, 31; 4:3, 13, 22-25; 5:1 참조). 그러나 그 믿음은 각 개인에 의하여 다르게 경험되고 다르게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행사되는 방식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바울은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고 말하였다. 날들과 식사규칙들의 적법성을 결정하기 위하여 사도가 거듭 제시한 기본적인 원칙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려는 진실된 갈망에 의해 유발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주를 위하여 지킨다—쿠리오 프로네이, 14:6,7,18; 고전 16:31 참조). (302.3)
 그렇다면 바울은 이같은 원칙을 토대로 하여 안식일 준수의 폐지를 옹호했는가? 안식일에 회당에서 “규례대로”(행 17:2)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만났던 그가 안식일을 주님을 경외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했었다고는 거의 믿을 수 없다. 로르도르프(W. Rordorf)같은 사람들은 바울이 이중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주장한다. 즉 사도 바울은 “연약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안식일을 포함한 여러 율법을 준수하는 자유를 주었고 반면에 “강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율법, 특히 안식일을 지키는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절대적인 자유를 부여했다는 것이다.58 로마서 14장에서 이와같은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 (303.1)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식사와 날들을 둘러싼 “연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 사이의 투쟁이 모세의 율법과 관련되고 있는 부분은 매우 미미하다는 것이다. “채소만 먹고”(롬 14:2),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며(롬 14:21) “한 날을 다른 날보다 더 중히”(확실한 금식을 위하여) 여기는 “연약한” 사람들은 그같은 확신을 뒷받침할 근거를 구약에서 찾아낼 수 없다. 모세의 율법의 어디에서도 포도주를 철저히 금하는 엄격한 채식주의와 금식일을 선호하는 규정을 찾아볼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강한 사람들”도 모세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종파적인 유대주의에서 유래된 금욕주의적 신념들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59 토론의 전체적인 주제는 율법을 준수할 자유이냐 아니면 율법 준수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토론의 주제는 하나님의 계명 대신에 인간의 관습과 미신에 근거하여 강요되고 있는 비본질적인 의무규정들과 그로 말미암은 양심의 가책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서로 다른 확신들과 관습들은 구원의 복음을 해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이 문제에 있어서 상호관용과 존경의 정신을 나타내도록 권고하고 있다. (303.2)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여기에서는 바울이 믿음이 “연약한”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을 꾸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할례를 받고(갈 5:2, 6:12)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기 시작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심하게 꾸짖고 있다(4:10). 그는 일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이같은 관습을 채택함으로써 인류의 운명을 지배하는 것으로 믿어지는 “천한 초등학문”(또는 우주의 원리, 스토이케이아, 4:8-9)의 종살이로 다시 돌아갔다고 규정하였다. 여러 면에 있어서 갈라디아서 4장 8-11절골로새서 2장 8-23절은 서로 매우 유사하다. 두 곳에서 모두 신성한 때들을 미신적으로 준수하는 것이 “초등학문”(또는 우주적 원리들)에 대한 노예화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거짓 교사”들에 대한 바울의 탄핵이 한층 더 격렬하다. 그들은 “다른 복음”을 전파하였기 때문에 “저주받은 자들”로(1:8,9) 간주되었다. 날들과 절기들의 준수가 구원과 칭의에 필요하다는 그들의 가르침은 바로 복음의 핵심을 왜곡시켰던 것이다(5:4). (304.1)
 갈라디아서(4:10,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에서 안식일이 암시되고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날들—헤이메라이(4:10, 한글 성경에는 ‘날’로 번역되어져 있다—역자 주)”에 대한 해석에 달려 있다. 어떤 비평가들은 명확히 “안식일”이 언급되어 있는 병행 구절인 골로새서 2장 16절에 기초해서 “그 날들”“안식일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60 우리는 이런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으나 골로새서에 사용된 복수형 “안식일들”이 안식일뿐만 아니라 주일의 일곱 날들 전체를 위한 일반적인 명칭이었다는 것을 이미 밝힌 바 있다. 이와 같이 갈라디아서에서 “날들”이 복수로 표현된 사실은 골로새서의 “안식일”들이 “週中의 날들(week—days)”을 뜻하는 것임을 잘 지적하는 것이며 결코 그 반대의 방향 즉 골로새서의 “안식일”에 제7일 안식일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로마서의 “날들”이 배타적으로 제7일 안식일만을 뜻한다는 식의 주장이어서는 안 된다. (305.1)
 그리고 갈라디아인들이 준수하는 “날들”에 안식일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61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들로 하여금 안식일과 절기의 준수를 유발케 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또, 바울은 안식일과 절기들의 준수를 명하고 있는 성경의 법령을 반대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런 종교적인 관습의 왜곡된 사용을 비판하고 있는 것인가? (305.2)
 갈라디아인들의 유대 절기 준수는 별들의 영향력을 믿는 미신적인 신념들에 의해 유발된 것이라는 주장은 폭넓은 동의를 얻고 있다. 이 주장은 갈라디아인들이 이같은 관습을 채택함으로써 초등적인 정령들과 귀신들(4:8,9)에게 복종했던 전날의 이교적인 예속으로 되돌아갔다고 한 바울의 비난에 의해 시사되고 있다. 확실히 로르도르프가 적절히 진술한 바와 같이 갈라디아인들은 그들의 이교적인 배경 때문에 특정한 날들과 절기들에 대해 쏟는 유대인들의 특별한 관심과 별들과 천체의 권세들을 종교적으로 숭배하는 미신적인 관심의 차이를 구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62 이미 앞에서 언급했거니와 이교 세계에서는 안식일을 준수하는 유대인의 관습이 흔히는 혹성인 토성의 악한 세력을 두려워하는 종교적 관습으로 잘못 이해되었는데 이같은 사실이 갈라디아인들의 왜곡된 안식일 개념의 발전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볼 때 갈라디아인들의 모든 안식일 준수 행위는 성경적인 제도에 대한 미신적인 오해로 말미암아 야기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305.3)
 그러나 바울의 관심은 구약의 성일들의 준수들에 밀착된 미신적인 개념들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의 거짓 선생들이 고안해 낸 구원의 전체적 체계에 대해 도전하는 것이었다. 갈라디아의 이단들은 사람이 의로워지는 일과 하나님께 가납되는 일이 할례를 받고 날과 절기들을 지키는 일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구원을 인간의 성취에 의존된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을 배반하는 일이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였다”(5:4). (306.1)
 날들과 절기들의 준수에 대한 바울의 배척은 이런 문맥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바울은 만약 날들과 절기들을 지키는 동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움을 얻는 칭의의 중요한 원칙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비록 그러한 관습의 어떤 신앙적 개념들이 구약의 가르침과 다르다 하여도-그런 관습적인 행위에 대하여 로마서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관용과 존중의 태도를 권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의 실정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 관습들을 지키는 이단적인 신자들의 동기가 자신들의 교의적인 신념에 기초하여 있었고 또 그러한 신념이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기반을 해치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는 그들을 배척하는 일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골로새서에서와 같이 갈라디아서에서도 바울이 반대하는 것은 안식일 준수의 원칙이 아니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는 대신에 인간의 성취에 의해 구원을 촉진시키려고 계획된 예식적인 준수의 왜곡된 사용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307.1)
 결론
 우리는 위에서 바울이 안식일을 구약의 의식적인 그림자로 간주하고 배척했다는 증거로서 흔히 인용되는 바울의 세 성경 구절들을 분석했다. 그 결과 그같은 주장은 여러 면에서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첫째로, 세 성경절의 원문에서 바울은 안식일 계명이 아직도 그리스도인 시대에 구속력을 갖고 있는지의 여부를 토의한 것이 아니라(특히 골로새와 갈라디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한 칭의의 중요한 원칙을 저해하는 복잡한 금욕주의적, 제의적 관습들을 반대하고 있다. (308.1)
 둘째로, 안식일 준수의 미신적인 형태가 바울로부터 규탄받은 이단적인 가르침의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해서 안식일 준수 계명의 구속력이 무효화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정죄한 것은 안식일 계명 자체가 아니라 안식일 계명의 왜곡된 준수였기 때문이다. 계명의 오용에 대한 견책을 그 계명 자체의 폐지를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308.2)
 셋째로, 바울이 인간의 관습에서 유래된 식사 범절과 날들에 관한 입장(롬 14:3-6)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관점의 차이점들에 대해서는 상호관용과 존중의 정신을 권하고 있다는 사실은 “날들”의 문제에 있어서 이렇듯 너그러웠던 그에게는 안식일 계명을 철폐시키고 그 대신에 일요일 준수제도를 다시 채택한다는 일 자체가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 준다. 만약 그렇게 했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집요한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을 것이며 안식일 옹호자들과의 끊임 없는 논쟁에 빠졌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서신들에서 이런 논쟁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같은 사실 자체가 안식일에 대한 바울의 존경심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내 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309.1)
 마지막으로, 바울의 안식일관은 안식일 준수를 포함했음직한 미신적이며 이단적인 성일들의 준수에 대한 그의 규탄을 기초로 하여 판단될 일이 아니라 율법에 관한 그의 전체적인 태도의 기초 위에서 결정되어져야 한다. 그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롬 7:12; 3:31; 7:17,22)고 생각하는 교훈의 한 몸체로서의 율법에 대한 바울의 개념과 그가 맹렬히 반대하는 바 그리스도와 분리된 구원의 한 방식으로서의 율법에 대한 바울의 개념을 구분하지 못하는 까닭은 안식일에 대한 바울의 태도를 크게 오해하는 데서 기인하고 있다. 바울 사도가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치가 있는 구약의 제도들을 존중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 실례로서 그는 안식일에 “유대인과 헬라인”과 함께 예배했고(행 18:4; 17:1,10,17) 빌립보에서는(행 20:16) 무교절을 보냈으며 가능하면 오순절에 맞추어(행 20:16)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서둘렀다. 그는 겐그리아에서 자진하여 나실인의 서원을 했고(행 18:18), 성전에서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을 보이려고 자신을 성결케 했으며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다(행 16:3). 그러나 이것들 중의 어떤 것 혹은 유사한 관습들이 구원의 토대로서 조장될 때에는 언제나 그들의 왜곡된 기능을 명확한 용어로 규탄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안식일을 배척했을 뿐이며 그리스도에 속한 실체를 가리키는 그림자와 상징으로서 안식일을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있다. (309.2)
 참고
 1. J. B. Lightfoot (St. Paul's Epistle to the Colossians and to Philemon, 1879, pp73-113), 178; E. de W. Burton,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Epistles to the Ephesians and to the Colossians, ICC 35, 1897, 247.

 2. Gerhard Delling, "στοιχείον," TDNT Ⅶ, 684.

 3. R. K.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1951, Ⅰ, 173; H. Schlier, Principalities and Powers in the New Testament, 1961; D. E. H. Whitely, The Theology of St. Paul, 1964, 25.

 4. E. Lohse (A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Colossian and to Philemon, 1971), 115, 116.

 5. A. B. Caird, Paul's Letters from Prison, 1976, 198.

 6. E. F. Scott, The Epistles of Paul to the Colossians, to Philemon and to the Ephesians, 1948, 51.

 7. Herold Weiss ("The Law in the Epistle to the Colossians," The Catholic Biblical Quarterly 34(1972), 294, 295.

 8. E. Lohse, 116; Weiss (fn. 14), 307.

 9. Cf. Moulton-Milligan, The Vocabulary of the Greek Testament, 1929, 687.

 10. F. Prat, The Theology of St. Paul, 1927, Ⅱ, 228-229.

 11. Charles Masson (L'Epitre de St. Paul aux Colossians, 1950), 130-134.

 12. Charles Masson, 128.

 13. Charles Masson, 128.

 14. E. Lohse, 108.

 15. Tanhuma Midrash 140b; cf. SB Ⅲ, 628.

 16. A. J. Banstra (The Law and Element of the World, published 1964), 159-160.

 17. Herold Weiss, 302.

 18. Cf. 4 Macc. 10:2; Josephus, Antiquities 15, 136; Contra Apionem 1, 42.

 19. 이사야 43:25에서도 비슷한 약속이 소개되고 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20. “중간”의 법정 위치를 막 3:3, 9:36; 행 4:7 같은 신약 성경의 구절들에 나타나고 있다.

 21. Herold Weiss, 311.

 22. Augustus, Sermons on New Testament Lessons 86, 3, NPNF 1st, VI, 515, 516.

 23. Cf. Leonhard Goppelt, TDNT Ⅵ, 145-148.

 24. R. C. H.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Paul's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to Timothy, to Titus and to Philemon, 1946, 123.

 25. 나실인의 서원 속에는 포도로 생산한 모든 것을 입에 대지 아니하는 것이 포함되고 있다(민 6:2-4). 그러나 이 서원은 항구적인 것이 아닌 어느 한 때의 금지이며 또 본인의 자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무엘(삼상 1:11)이나 침례 요한(눅 1:15) 같은 사람들은 평생을 나실인으로 산 사람들이지만 그 밖에 어떤 사람이 자원해서 평생 동안 나실인으로 살겠다고 자원하여 맹세한 기록은 없다. 평생 서원은 아이들의 부모가 아이들을 대신 해서 행하고 있다. 레갑 족속들은 평생을 천막에서 살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았다(렘 35:1-19).

 26. G. Bornkamm "λἀχανον," TDNT Ⅳ, 67.

 27. Vita Apollonii 1, 8; cf. Apuleius, Metamorph. 11, 28: "abstain from all animal meat."

 28. Eusebius, HE 2, 23, 5, NPNF 2nd, I, 125.

 29. Cf. J. Behm, "νͺήστις," TDNT Ⅳ, 297.

 30. References can be found in G. Bornkamm (fn. 39), 66.

 31. Stanislas Lyonnet, "Paul's Adversaries in Colossae," in Conflict at Colossae, ed, Fred O. Fransis Wayne A. Meeks, SBL Sources for Biblical Study 4, 1973, 147-162.

 32. E. Lohse, 116.

 33. 각주 6, 7을 참고하시오.

 34. R. C. H. Lenski, 122; A. S. Peake, The Epistle to the Colossians (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 1942), 530.

 35. Charles R. Erdman, The Epistle of Paul to the Colossians and to Philemon, 1929, 73.

 36. A. Lukyn Williams, The Epistles of Paul the Apostle to the Colossians and to Philemon, (1928), 102.

 37. Ralph P. Martin, Colossians and Philemon, (New Century Bible, 1974), 90.

 38. Augustine, Sermons on New Testament Lessons 86, 3, NPNF, 1st, 6:515-6.

 39. Scott, 52.

 40. Cf. RSV; Lenski, 125.

 41. A. B. Caird, 198.

 42. Norbert Hugede, Commentaire de L'EPître aux Colossians,(초판) 145.

 43. 플라톤에서 연유된 “그림자와 몸”의 대조가 골로새 철학자들에 의해 “충만”(플레로마)에 이르는 삶의 교훈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골로새 철학자들은 금욕적인 양생법이나 제의를 통해 권세나 “그림자” 같은 천사나 별 같은 우주의 정사들을 섬김으로써 신성의 “충만”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바울의 주장대로 그리스도 중심의 구속론은 허물어지게 되는 것이다.

 44. 사도 바울이 로마서 14장 6절에서 음식물에 대한 자제 자체를 정죄한 것이 아니라 먹든지 안 먹든지 모두 “주를 위하여” 권고한 사실을 주목할 때 바울은 음식물을 구별하는 신앙 태도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그 적극적인 기능을 인정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45. J. B. Lightfoot, Saint Paul's Epistles to the Colossians and to Philemon, (1879), 195.

 46. William Barclay, The Letters to the Philippians, Colossians and Thessalonians, (1959), 175.

 47. Cf. Septuagint, Ⅱ Chron. 2:4; 31:3; Neh. 10:33; Ez. 45:17; Hosea 2:11.

 48.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1957, Ⅶ, 205-206.

 49. 디다케(8:1)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둘째 날과 다섯째 날에 외식하는 자들과 함께 기도하지 말고 대신에 넷째 날과 여섯째 날에 기도할 것을 권하고 있다.

 50. 유대인들과 초기 그리도인들의 안식일 금식에 대해서는 다음의 문헌들을 참고할 수 있다: Nathan A. Bara, A History of the Sabbath, (1965), 182; Judith 8:6; Jubilees 50:10, 12, 13; Augustine, Epistle to Casulanus 36, 6, NPNF 1st, 1, 267; Epistle to Casulanus, 36, 32, NPNF 1st, 1, 270; Tertulia, On Fasting 15, ANF, 112; Kenneth A. Strand, Essays on the Sabbath in Early Christianity, (1972), 9-15, 25-43.

 51. Sunday, W. Rordorf, 137.

 52. Gunter Bornkamm (fn. 13), 131.

 53. Lohse (fn. 13), 115.

 54. Jub. 5:15: 쿰란 제1동굴과 제4동굴에서 발견된 파편에는 모든 종류의 천사들이 창조 주간의 첫째 날에 창조되었으며 사람들에게 날들과 달과 안식일을 지키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달력과 천궁도의 표징을 가르친 주재도 하나님의 천사라고 기록되었다.

 55. Hippolytus, The Refutation of all Heresies 9, 11, ANF 5: 133.

 56. The Epistle to Dionetus 4, ANF 1:26.

 57. The Preaching of Peter, quoted in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eis 6, 5, 41, 2, trans. M. R. James, The Apocryphal New Testament, 1924, 17. Cf also Origen, Contra Celsum 1, 26.

 58. 각주 50의 문헌들을 참고하라.

 59. John Murray, The Epistle to the Romans, (1965), 173.

 60. W. Rordorf, 138.

 61. 각주 25를 참고하시오.

 62. 로마서 14장 14절에서 논의되고 있는 부정한 음식과 깨끗한 음식의 구별은 레위기 11장의 구별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