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들의 본질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에 관한 규정들은 전적으로 모세의 율법에만 속하는 것들이었을까? “절기와 월삭 안식일”의 준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골로새 교회의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 속에 구약에서 취해 온 내용이 들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거짓 선생들의 제한 규정들은 구약성경에서 거의 그 자취들을 추적해 볼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먹고 마시는 것”을 뜻하는 희랍어 브로시스와 포시스라는 용어는 “음식”(브로마)과 “음료(포마)”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행위”를 나타낸다.23 이것은 “어떤 것은 정결하고 어떤 것은 부정하며 혹은 어떤 것은 정당하고 어떤 것은 정당치 않은 음식”이냐 하는 주장이 아니라 언제 먹고 언제 마시고 언제 금식하느냐 하는, 시간과 관련된 식사 규칙인 것이다.24 이와 같은 식사 제한 규정들은 레위기의 율법에서 거의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레위기 율법은 금욕적인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모세의 율법은 나실인과 레위 족속이 취하게 하는 음료를 피하기로 서원한 경우들을 제외하고는 마시는 문제에 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25 (285.2)
 골로새서 2장 16절에 언급된 식사 규정이 모세의 율법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골로새 교회의 이단적 “철학자들”에 의해 부과된 금지사항(특히 음식의 소비에 관한)들이 언급되고 있는 21절에서 더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단 선생들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특정한 기간에는 어떤 음식이나 음료를 “붙잡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헌신의 열정과 자기 비하와 육체에 대한 가혹함을 강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이 금욕적 규정들은 유대인들의 표준적인 가르침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요소들이다. 대개 이런 금욕주의는 더 높은 거룩성을 얻기 위해 물질적인 세계와 인간의 육체를 멸시하는 이원론적인 삶의 개념으로부터 기인하였다. 골로새의 이단들은 이처럼 히브리인의 전인적인 인간 개념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는 규정들을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286.1)
 바울 당시에 이런 형태의 금욕주의가 교회 안에서 발전되고 있었다는 증거들이 있다. 로마서 14장에서도 바울 사도는 날들의 준수 뿐만 아니라(14:5-6), 채식주의와 포도주를 금하는 것을 고집하는 금욕주의적 당파(골로새의 것과 유사한)로 말미암아 야기된 불화를 다루고 있다. 이와 유사한 당파가 에베소 교회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 . . 감사함으로 받으라”고 하여 그런 자들을 조심하도록 디모데에게 경고하고 있다(딤전 4:3). (287.1)
 이같은 금욕주의적 가르침은 주로 분파적인 유대주의나 이방의 금욕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을까? 이 질문에 대해 결정적으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채식주의적 제도는

 (1) 데라퓨타이와 엣세네 같은 유대교 종파들과,

 (2) 엔크라티스와 에비온과 미르키온 종파 같은 영지주의적 기독교 분파들과

 (3) 오르페우스 신비주의 집단과 피타고라스학파 및 신플라톤주의자들같은 이교 학파들에 의해 조장되었기 때문이다.26

 예컨대 여러 개의 복합적인 배경과 요소들이 채식주의 전통에 관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필로스트라투스(Ca. AD 220)의 기록에 의하면 피타고라스학파에 속하는 철학자인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AD 98)는 마음을 더럽게 하는 부정한 식사라 하여 육식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말린 과일들과 채소만을 먹고 살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당연히 땅의 모든 과일들이 정결한 음식이기 때문이다.”27(헤게시푸스에 의하면 우리 주님의 형제 야고보도 “그의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거룩했으며, 그는 포도주나 독주나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28 (287.2)
 금욕주의와 금식을 실천하는 이교적인 이유들은 많다. 예를 들어 금식은 사람에게 신의 계시를 받을 준비를 하게 한다고 전해왔다. 영혼의 윤회에 대한 신념이 육식을 기피하는 동기로 작용했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29 육식은 곧 “사람의 고기를 먹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이원론적인 세계관 때문에 금욕주의로 향하게 되었다.30 골로새의 “철학”의 경우에 있어서는 분명히 식사의 금기와 거룩한 시간들의 준수가 “초등학문”(2:18, 20,)에 대한 굴복과 숭배행위로 간주되었다. (288.1)
 어떤 학자들은 골로새 교회의 거짓 교훈을 쿰란 공동체 교훈의 한 분파로 간주한다. 식사 규칙들과 축제절목(祝祭節目) 및 천사숭배에 대한 강조가 쿰란 종파의 관습과 완전히 일치하다는 것이다.31 그러나 E. 로제(Lohse)가 올바르게 지적한 바와 같이 골로새의 “철학”은 쿰란 공동체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급진주의적인 율법 이해의 징후를 전혀 나타내고 있지 않다. 율법(노모스)이라는 용어 자체가 골로새인들의 논쟁에서 나타나고 있지 않다.32 (288.2)
 대부분의 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 가장 그럴싸한 결론은 골로새 교회의 거짓 교훈들과 관습들이 이교적인 것과 유대적인 요소들을 모두 간직하고 있는 제설혼합주의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골로새 이단들이 자신들의 주장 속에 구약 성경을 이용한 명백한 이유도 구약 성경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제설혼합적인 신념과 관습의 정당성을 교인들에게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33 (289.1)
 이런 결론이 옳다면 안식일과 축제일들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그가 반대하는 이교주의적, 금욕주의적, 제설혼합주의적 관습을 배경으로 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바울이 안식일과 같은 성일 제도의 곡해된 사용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말들을 안식일 계명의 타당성에 대한 비난으로 이해되거나 이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법령이라는 것은 잘못 이용되었다고 해서 폐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289.2)
 그러나 바울의 안식일관을 더 직접적으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그 앞서 골 2:16, 17에서 바울이 실제적으로 정죄하고 있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것들이 관습들인지 아니면 원칙들인지를 확실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289.3)
 관습들이냐 원칙들이냐
 바울은 골로새의 거짓 교사들이 주창하고 있던 다섯 가지의 금욕주의적 습관(“먹는 일, 마시는 일, 월삭, 절기, 안식일”)들에 대해 공식적으로 정죄하고 있는가? 이런 습관들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전한 충족성을 저해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우리는 바울이 그것들을 철저하게 정죄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과연 이 일이 바울이 의도한 일이었는가? (289.4)
 먼저 그가 사용한 동사들을 연구해 보자.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메이 욱스 티스 휘마스 크리네토). 여기에 나온 “크리네토”(폄론하다)라는 동사는 중성이다. 그리고 이 동사의 의미는 “정죄하다”가 아니라 어떠한 행위가 할 만한 행동인지 또는 불가한 행위인지를 “판단하다”의 뜻이다.34 바울은 이와 유사한 문제를 다룬 로마서에서도 같은 동사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메이 크리네토, 14:3). “혹은 이 날을 저 날 보다 낫게 여기고(크리네이)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크리네이, 14:5)라 하였다. 이 단어의 일반적인 용례에 따르면 “크리노”라는 동사의 의미는 “정죄하다”가 아니라 “의견을 말하다, 결정하다, 판단을 내리다”의 뜻이다. (290.1)
 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바울이 사용한 이 동사 자체에 의하여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관용적인 입장이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앞에서 상술된 관습들을 정죄하지 않고 그저 어느 누구도 그것들의 준수를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 문제의 결정을 “모든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에게 맡겨버렸던 것이다.”35 바울은 “식사법이나 절기를 지키는 문제를 모든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겼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느 누구가 그것들을 준수하거나 준수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그 일 때문에 골로새인들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36 (290.2)
 우리는 이제 결론에 도달하였다. 골로새서 2장 16절은 안식일, 절기, 식사규칙들과 같은 것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이런 관습들을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보조물로,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초등학문”으로부터 안전하게 벗어나기 위해 필수적으로 이행해야 하는 필수적인 행위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충만성을 부인하는 그런 자들에 대한 경고였다.37 바울에게는 안식일이나 절기나 식사 규칙들에 대하여 준수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정죄할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 바울의 이러한 뜻은 17절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하였다. 바울로서는 그가 구약의 성일들을 “장래 일의 그림자”(스키아 톤 멜론톤)로 인정하였으므로 “안식일의 이름을 밝히면서까지 그것을 폐지하고 그것을 지나간 그림자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38 (291.1)
 그 자신이 유대인이었던 바울은 유대주의의 가장 신성한 의식들을 무가치한 그림자라고 간주할 수 없었다. 그의 사상은 오히려 옛 의식들에서 미래의 어떤 위대한 결정을 겨냥하고 있는 그림자 같은 가치를(예컨대 안식일은 하나님의 완전한 안식을 표상한다. 히 4:11) 발견하고 있는 히브리서 기자의 사상과 같은 것이다.39 (291.2)
 그러나 많은 주석가들은 어떻게 바울이 구약의 성일들과 제설혼합적인 성격의 금욕주의적인 습관을 예언적인 의미와 예언적인 기능을 가진 “그림자”들로 볼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림자”라는 말 앞에 “단순히” 혹은 “기껏해야”를 추가하여 “그림자”라는 말에 경멸의 뜻을 부여함으로써 그 딜레마를 풀려고 시도했다.40 더욱이 “그림자이다”(ἐστιν: 에스틴) 라는 동사를 “그림자였다”(ήν: 에인)로 해석하여 마치 이것들의 기능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완전히 끝난 것처럼 이해하려 하였다.41 이런 해석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바울이 모호한 기원을 가진 식사 규칙들을 “장래 일의 그림자”로 보았을 까닭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들은 기껏해야 그리스도교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들이었는데 세상과 역사에 그리스도가 등장하였으므로 이제 그것들은 더 이상 그림자로서의 존재 의의까지도 상실하였다는 것이다.42 이 해석은 그것들이 예수님 오시기 전(예수님 오신 후가 아닌)까지만 그 정당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하고 있으나 이것은 물론 골로새서의 본문이 뜻하는 진실과는 다르다. 하나님이 어떻게 한때나마 미신적인 식사 금기를 인정하셨다가 후에는 그것을 배척하실 수가 있었겠는가? (291.3)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즉 바울은 여기에서 이런 정체 불명의 규정들의 기원이나 형태, 또는 그 정당성에 관한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그것들이 비록 오도되기는 했으나 고결하고 진정한 영적 포부의 표현임을 인식함으로써 그것들의 가치를 인정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사도가 기본적으로 의도하고 있는 것은 이런 규정들의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차원을 넘어서 “그림자와 몸”의 대비를 통해서 이런 준수 규칙들이나 제도들을 그리스도와의 적절한 위치에 두려는 것이었다.43 이 목적을 위해 그는 신자들에게 “그림자와 몸”의 대비를 강조한 것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바울은 성일들의 준수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식사규칙까지라도 장차 올 세계의 실재를 위해 준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림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44 구약의 절기들은 그리스도인을 위한 기별을 가지고 있다. 유월절(오늘날에는 부활절이라고 불려지고 있는)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희생을 기념하고 그의 오심을 선포한다(막 14:25; 고전 11:26). 무교병은 “순전함과 진실함”(고전 11:26)을 표상하고 오순절은 성령의 부어주심을(행 2:4) 예표하고 안식일은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구원의 축복을 상징하며, 안식일에 의해 상징된 구원의 축복이란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 안식일을 통하여 영원한 쉼을 미리 맛보는 것을 의미한다.45 그러나 바울은 그림자들이 “몸”(17절)이요 “머리”(19절)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즉 그림자가 실재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그가(바울)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음식과 음료들은 먹고 마시어야 하며 어떤 것들은 피해야 한다는 식의 가르침에 기초한 종교는, 그리고 안식일 준수와 그 유사한 것들 위에 기초된 종교는 참 종교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참 종교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이기 때문이다.”46 (292.1)
 우리는 위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많은 이단적 지도자들이 신앙적 가치의 우선 순위들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가져왔다는 사실에 눈살을 찌푸리게 되지만 이 문제는 기독교 역사상 끊임없이 그리스도교를 고통스럽게 해왔다. 너무나 자주 종교는 준수해야 할 의식들과 규칙들로 잘못 간주되어 왔다. 바울은 말한다. “이런 것들은 헌신의 엄격성과 자기 비하와 육체에 대한 가혹성을 진작시키는 지혜의 외양을 갖고 있을 뿐(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히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육체를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다”(2:23). 율법주의적 경건을 위한 모든 계획은 결국 그리스도인들을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육”의 죄인으로 만들 뿐이다. 사도가 제시하는 바 금욕주의적이고 의식적인 율법주의에 대한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294.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치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1-3). (2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