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일요일의 논쟁에 있어서 바울의 편지서 중의 세 성구가(골 2:14-17; 갈 4:8-11; 롬 14:5-6)가 늘 문제시 되어왔다. 위의 성경절에서 바울은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식일이 더 이상 구속력을 갖고 있지 않는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세 곳의 성경절 중에서도 특히 골로새서 2:14-17이 광범위하게 위의 주장을 위하여 인용되어 왔다. 왜냐하면 바울이 강조하기를 이 성경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무엇인가를 십자가에 못박으셨다고 했으며(2:14) 또 “안식일”(2:16)을 위시하여 절기와 월삭과 관련된 규칙들(도그마타)에 대해서도 엄중히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의 편지서에서 자주 율법을 언급했으나 분명하게 안식일을 직접 언급한 경우는 골로새서 2장 16절 한번 뿐이다. 골로새서 2장 16에서 바울은 안식일을 지칭하여 복수명사 “사바톤”(안식일들)이란 용어로 사용하였다. 한글성경에는 “안식일”이라고 번역했으나 사실은 “안식일들”이다. 이 구절들에 부여된 중요성을 고려하여 갈라디아서 4장 8-11절로마서 14장 5-6절에 앞서 골로새서 2장 14-17절에 나타난 바울의 안식일관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274.1)
 골로새서 2장 16-17절과 골로새 교회의 이단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 사도 바울이 엄중히 경고한 “안식일”(희랍어로 복수명사 사바톤)의 준수는 “골로새 이단”의 여러 가지 폐단들의 하나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골로새 교인들로부터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상을 빼앗으려”(2:18) 애썼던 골로새 이단의 그 거짓교훈을 전체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과연 골로새 이단은 모세의 율법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이단이 되었던 것인가. 그리고 그리스도가 “도말하시고 폐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신” “의문에 쓴 증서”(2:14)는 바로 모세의 율례를 뜻하는가? (275.1)
 주지하다시피 골로새 이단의 가르침은 유대적 요소와 희랍적 요소의 제설 혼합적 주장으로 되어 있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이단적 교훈의 신학적인 오류와 그 실천적인 오류들을 함께 논박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항하여 사람의 충성을 빼앗아 가려한 그들의 신학적 주장을 바울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 “사람의 유전,” “세상의 초등학문”(2:8)이라고 말했다. 바울은 이 철학과 유전과 초등학문의 목적하는 것이 “지혜”(2:3; 3:10)를 얻고 신적인 “충만”(1:19; 2:9-10)에 접근하여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골로새 이단은 교인들에게 이런 지식을 얻기 위해 우주적인 정사(혹은 권세와 세력; 2:10, 15)와 “초등학문(또는 세상의 원소들; 2:8, 18, 20)”을 경배해야 한다고 유혹하였다. (275.2)
 그러면 초등학문 또는 세상의 원소들이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어떤 이들은 “초등(스토이케이아)”을 유다주의와 이교주의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에 대한 초보적인 교훈이라고 해석한다.1 또 다른 이들은 이 세상의 생성이 그것들로부터 유래했다고 주장하는바 흙, 물, 공기, 불같은 이 세상의 “기본적인 원소(元素)들”이라고 본다.2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 주석자들은(갈 4:3, 9; 3:19 같은 병행 구절에 기초하여), 그것들을 율법을 전한 천사 중보자들(행 7:53; 갈 3:9; 히 2:2)과 인류의 운명을 지배하는 것으로 신봉되어온 이교의 별신(星神)들로 규정하고 있다. 즉 “스토이케이아”를 별신들의 인격화로 이해하고 있다.3 그런데 골로새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우주적 권세들과 세력들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천사적 권세들을(2:16, 18-19, 23) 예배하고 의식적이고 금욕적인 종교 관습들(2:11, 14, 16, 17, 21, 22)을 지키라고 촉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별신들의 예배와 금욕적인 습관에 의하여 신(神)의 “충만”(플레이로마 1:10; 2:9-10 참조)에 접근하여 그 충만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여기에 나타난 신학적인 오류는 무엇인가? 그것은 골로새 교회의 이단 철학자들이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2:9-10, 18-19) 대신에 그분보다 열등한 천사 중보자들을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예배에 끌어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275.3)
 이같이 잘못된 신학적인 사색의 실제적인 결과는 곧바로 실천적인 오류로 발전하였다. 골로새 이단들은 엄격한 금욕주의와 의식주의를 고집하였다. 이들의 금욕주의와 의식주의는 “육적 몸을 벗는 일”(2:11, 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4과 몸을 괴롭게 하는 것(2:23)과 어떤 음식과 음료를 맛보거나 혹은 만지는 것을 금하는 것(2:16, 21), 그리고 몇몇 성일들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골로새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금욕적인 관습들을 쫓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로써 그들에게 신적인 보호가 추가되고 신성의 충만함에 충만히 접근할 수 있게 되는 줄로 유혹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초등학문”을 좇아 사는 것과 “그리스도”(2:8)를 좇아 사는 일에 대한 바울의 구분과 성육하신 그리스도의 탁월성에 대한 그의 주장에서 추론될 수 있다. 바울은 강조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그 안에 거하시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2:19),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의 “충만”을 얻는 것이지 별신들로 인격화된 세상의 “초등학문”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276.1)
 이러한 간략하고 개괄적인 기초 위에서라도 우리는 어렵지 않게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 안식일이 성서적 율법의 의무에 대한 직접적인 토론의 문맥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 안식일이 골로새 철학자들에 의해 옹호되어온 제설혼합주의적 신념과 관습의 문맥에서 언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금욕주의적 원칙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구약으로부터도 많은 요소들을 끌어다가 이교적인 요소들과 함께 병용하였다.5 우리는 이 이단 선생들이 어떤 종류의 안식일 준수를 장려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규칙들”의 철저한 준수를 강조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성일을 가장 엄격하고 미신적인 방법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사실상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토성(Saturn)의 날로 규정한 안식일에 부여된 점성술적인 신념은 안식일 준수를 더욱 더 미신적인 것으로 만들게 했다. (277.1)
 이처럼 사도 바울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바와 같이 골로새서에서 유대 혹은 유대-그리스도교적 율법주의의 평범한 오류들에 대해서 논박하였던 것이 아니라 유대적인 요소들까지도 포함한 골로새 교회의 제설혼합적 이단 “철학”에 대해 논박하고 있었던 것이다.6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진지하게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는 이 성경절을 안식일에 대한 바울의 기본적인 태도로 판단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 둘째는 바울이 안식일의 왜곡된 준수에 대해 경계했다고 해서 이것을 근거로 하여 사도 바울이 안식일 신앙 자체를 공격했다고 결론을 지어도 좋은가 하는 것이다. 골로새서 2장 16-17절에서 과연 바울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떤 성일도 준수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고 가르쳤는가 하는 것이다. (278.1)
 이런 질문들을 검토하기에 앞서서 골로새 교회의 이단에 대한 바울의 논박에 있어서 율법은 어떤 비중과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으신”(골 2:14) “의문에 쓴 증서(케이로그라폰)”에 대해서 바울이 말할 때, 바울은 이것을 도덕적 율법이나 혹은 의문의 율법을 지칭해서 말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설명은 바울의 사상에서 안식일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의 일부인지에 대한 해답을 얻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278.2)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무엇인가?
 골로새서 2장 14절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골로새 이단의 “철학”에 대처하기 위한 바울의 주장들을 이해하는 일이 필요된다. 앞에서 우리는 거짓 교사들이 우주적인 존재들의 보호와 도움을 받아 신성(神性)의 완전함과 충만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규칙들”(도그마타)을 준수해야 한다고 그리스도인들을 속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이러한 가르침을 반대하기 위해 두 개의 중요한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 첫째로 그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그 안에서만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며”(골 2:9),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다른 권위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이신”(2:10) 그분에게 복종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둘째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신성의 충만”(2:9)을 소유하실 뿐만 아니라 “구속”의 충만과 “죄의 용서”“충만”(1:14; 2:10-15; 3:1-5)까지 제공해 주시기 때문에 신자들이 “생명의 충만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279.1)
 신자에게 “어떻게 완전(1:28, 4:12)과 충만(1:19, 2:9)이 베풀어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율법에 호소하지 않고 침례에 호소하고 있다.”7 이 점은 중요한 변화를 시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언제나 복음을 제시할 때마다 율법의 중요성에 대한 설명을 핵심사항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의 하나는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이단을 비판하는 골로새서 2장 전체의 논쟁에서 ‘율법’이라는 낱말을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8 이 사실은 골로새 교회의 이단이 유대의 율법주의에 기초했던 것이 아니라 제설혼합주의적인 금욕주의와 제의적인 규칙들에(δὸγματα, 도그마타) 기초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증시켜 준다. (279.2)
 바울은 이런 거짓 가르침에 대항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고,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찬양하기로 작정하고 그리스도인이 완전에 이르는 것은 침례(2:11-13)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혜택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임을 설명해주고 있다. 즉 침례의 혜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심을”(2:13) 받는 결과로 이어진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침례의 혜택은 “우리의 모든 범죄”의 용서라는(1:14; 2:13; 3:13) 구체적인 모습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이 용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심을” 받는(2:13)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으며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용서와 충만의 재천명이야말로 “규칙”들에 굴복함으로 완전을 얻으려는 자들에 대한 바울의 기본적인 답변의 요지를 이루고 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용서의 확실성과 충만함을 강조하기 위해 골로새서 2:14에서 법정(法廷)의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즉 그가 묘사하는 하나님은 “의문에 쓴 증서(케이로그라폰)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신 재판관이다. (280.1)
 “의문에 쓴 증서”: “쓰여진 협약” 혹은 “채무증서”의 의미로 쓰인 케이로그라폰이라는 고대 희랍어 용어9를 바울은 무슨 의미로 사용했을까? 바울은 이 용어를 사용할 때 율례들이 포함되어 있는 모세 율법을 의미했는가? 그리하여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율법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진실로 골로새서 2장 14절의 의도하는 것이 그렇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이런 의식들 가운데 마땅히 안식일도 포함될 수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게 된다. 주지하시다시피 이런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10 그러나 제이 J. 허비(J. Huby)가 옳게 지적했듯이 문법적인 여러 난제들은 제쳐놓는다 해도11 바울이 하나님을 그가 그 ‘거룩한’(롬 7:6) 것이라고 주장한 모세의 율법을 십자가에 못 박는 분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12 더구나 위의 견해는 하나님의 용서의 충만을 증명하기 위해 준비된 바울의 논증의 가치를 증가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크게 훼손시키고 있다. 도덕적인 율법이나 의문의 율법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용서의 확신을 보장하는 일이 될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인간으로부터 도덕적 원칙들을 제하여 버리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이다. 죄는 법전을 없애므로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 (280.2)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케이로그라폰(cheirographon)을 우리의 죄로 말미암은 “채무(債務)증서” 혹은 인류를 정죄하기 위해 사용되는 바 “죄의 기록을 보관한 책”으로 해석하고 있다.13 “실질적으로 서로 유사한 이 두 해석은 모두 랍비문학이나 계시문학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을 수 있다.” 로제(Lohse)는 말하기를 “유대주의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흔히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로 묘사되어 있다”고 말하였다.14 그 한 예로써 한 랍비의 말을 들어보자. “사람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은 사망의 채무를 기록하신다. 만약 그 사람이 회개하면 그 채무는 취소된다(즉 채무의 무효가 선언된다). 만약 그가 회개치 않으면 기록된 채무는 계속 남아 있게 된다.”15 『엘리야의 계시』에는 한 천사가 엘리야 선지자의 죄가 기록되어 있는 「케이로그라폰」(cheirographon:채무증서)이라는 책을 들고 있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16 이것들과 이와 유사한 예들을 토대로 하여 생각해 볼 때 케이로그라폰은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죄의 채무증서”혹은 “죄의 기록책”이라는 사실이 아주 명백해진다. 왜냐하면 후자는 바이스가 지적한바와 같이 “기록의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17 (281.1)
 따라서 바울이 이같이 대담한 은유를 사용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어떤 의미에서는 인류의 죄를 나타냄)을 통하여 죄의 기억의 도구인 케이로그라폰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없이하여 버리셨다는 것이다. 기억의 도구인 케이로그라폰의 법적인 구속력은 “얽어메는 증서”(τοίς δὀγμασιν: 토이스 도그마신, 2:14)이다(한글역에는 “대적하는 의문의 증서”로 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없이하여 버리신 것은 우리의 죄를 밝혀주는 법적인 근거인 율법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의 기록들이다.18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죄의 기록을 제거해 버리심으로서 이미 용서받은 자들이 거듭해서 채무에 대해 추궁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없이하여 버리셨다.19 이 견해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카이 아우토 에르켄 에크 투 메수, 엡 2:14)라는 구절에 의해 뒷받침 되고 있다. “중간”이라는 말은 고소하는 증인이 법정이나 회중의 중앙에 서서 증언했음으로 바로 그 증인이 서 있는 공간상의 위치를 뜻한다.20 골로새서의 문맥으로 보아 법정 “중간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고소하고 있는 증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법정 기록으로부터 지워 없애 버리신 케이로그라폰임이 분명하다. 바울은 이같이 강렬한 은유를 사용하여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마련된 하나님의 용서의 완전함을 재확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의 증거물을 없이하심으로 말미암아 또한 우리로부터 “정사와 권세의 멍에를 벗”기셨다(2:15). 이로써 그것은 더 이상 형제의 참소자(계 12:10)로서의 기능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느끼고 “규칙”(도그마타)을 통하여 신성의 “충만함”에 참여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침례를 통해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자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과 용서의 확신 속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정사와 권세는 더 이상 그들과 상관이 없다. (282.1)
 우리는 이상에서 바이스가 주장했듯이 “골로새서의 전체 논쟁에 있어서 율법의 문제는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21 그러므로 케이로그라폰을 안식일에 대한 언급으로나 혹은 구약의 다른 어떤 예식법으로 보려는 시도는 전혀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 십자가에서 못박힌 증서는 도덕적 율법이나 의문의 율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기록한 증서이다. 자신의 죄에 대한 기억이 자신의 불완전성을 일깨워 준다는 것은 오늘날에서도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에 의하면 이같은 자기 불완전성의 극복은 “규칙들”(도그마타)에 대한 복종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도말하시고 완전히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받아들임으로서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의 기록과 죄악을 못 박으셨다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의 핵심을 재확인하고 있으며 바울이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한 신앙적 관행은 율법과 안식일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다. (283.1)
 바울의 안식일관
 바울은 그리스도의 최고 주권과 그 구속의 충만함을 재확인하면서(2:8-15) 골로새 이단의 지적인 공론(空論)을 논박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그는 이단들의 공허한 주장에 따른 실제적인 결과들로 시선을 옮겼다. 바울은 그 허황한 종교적 관습의 특정한 부분들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2:16, 17). 이 경계 중에는 안식일이 “장차 올 것의 그림자”로 지적되었다. 이 지적을 근거로 하여 “바울은 여기에서 명확히 안식일을 이름까지 밝히면서 폐지했으며 몸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안식일을 과거와 함께 사라진 그림자라고 부른”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22 (284.1)
 이런 전통적인 해석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이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로 골로새 교회 내의 괴팍스러운 이단 집단들이 옹호하고 있던 관습들(안식일을 포함하여)은 어떤 것들이었는가. 둘째, 그 관습들은 모세의 법규나 혹은 제설혼합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로부터 유래되는 과장된 청교도적 가르침이었는가? 셋째, 바울 사도는 여기에서 성일이나 절기들의 일반적인 유용성뿐만 아니라 사람의 먹고 마시는 일상적인 생활이나 또는 사람이 때에 따라 먹고 마시는 것을 절제해야 하는 일까지 정죄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성일을 지키는 일이나 음식물에 대해 금욕하는 일들을 사람이 오용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인가? 넷째, 거짓교사들이 옹호한 안식일 준수는 어떤 종류의 안식일 준수였는가? 다섯째, 안식일과 유대의 성일들에 대한 바울의 기본적인 태도는 어떠했는가? (28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