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은 초대 교회를 없애기 위해 먼저 그것을 핍박했다. 신조를 타락시키는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유대인들에 의한 핍박은 예루살렘에서 오순절 후에 위협과 함께 왔지만(행 4:21), 곧 몇몇 사도들을 체포하고 매질하는 것으로 발전되었다(행 5:40). 군중이 스데반을 돌로 치는 일(행 6:8-15; 7)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무너뜨리기 위한 다소 사람 사울에 의한 거침없고 체계적인 노력으로 이어졌다(행 8:1-4; 딤전 1:12, 13).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사도 야고보를 얼마 후 사형시켰는데도 그리고 같은 일을 베드로에게도 자행했는데도(행 12:1-4) 팔레스타인 밖의 로마 정부는 전반적으로 교회를 반대하지 않았다. 로마 당국자들은 그리스도교를 인가받은 종교였던 유대교 신앙의 변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회 정책은 AD 64년의 로마 시 방화사건 이후 네로 황제가 누명을 씌우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1118.1)
 그러나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예언들뿐 아니라 예수님(마 24:21, 22)도 유대나 로마의 권력이 교회에 자행했던 핍박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핍박의 물결을 예고했다. 요한계시록 12장의 중추적인 예언을 다시 상고하라:“용[사탄 9절]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하나님의 백성의 상징]를 박해하는지라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13-16절). (1118.2)
 이 예언의 앞부분에 이와 비슷한 말이 나온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6절). (1118.3)
 이 기간, 즉 사탄이 교회를 파괴하려던 시기는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여러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그것은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에 일곱 번 언급되는데, 작은 뿔과 표범 같은 짐승의 핍박하는 일과 관련되어 세 가지 형태로 나온다.

   (1) “한 때, 두 때 그리고 반 때”는 3년 반이라는 예언상의 해와 같(단 7:25; 12:7; 계 12:14).

   (2) “마흔두 달”(계 11:2; 13:5)

   (3) “일천이백육십 일”(계 11:3; 12:6). 이 세 가지 형태는 모두 동일한 시간을 말한다. 묵시 해석의 역사주의적 원칙에 의하면, 하루라는 상징적인 날은 실제의 1년과 같은 기간이다. 결과적으로 이 예언들은 1,260년 동안 벌어진 “성도들에 대한 전쟁”을 말하는 것이다(참조 묵시문학 II. D). (1118.4)
 D. 축소판 대쟁투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분의 변화시키는 은혜를 통한 구원의 교리(바울의 관점에 의하면 칭의, 성화, 영화롭게 됨; 참조 구원론 II)는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도덕적 쟁투의 관점으로도 설명된다. 아담의 타락은 그의 본성과 그의 후손의 본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참조 II. C. 5). 하나님이 사탄과 인간 가족 사이에 두신 적대심 또는 적의는 양심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의 역할에 의해 이르러 온다(II. D를 보라). 이러한 상태는 각 개인 속에 우주적인 차원에서 치러지는 축소판 도덕적 대쟁투를 만들어낸다. 다음 본문들의 요지를 살펴보라; “육체[죄로 기우는 인간의 육적인 본성]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6-8).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낳느니라”(약 1:14, 15). (1118.5)
 사도 바울은 그의 육적인 본성이 그에게 행사하는 지배적인 힘을 발견하고서 구원을 달라고 부르짖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그를 지배하는 육정]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는 자신의 질문에 대해 자신이 기쁨의 확신을 갖고 대답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4, 25). (1119.1)
 신약이 개인의 내면적 투쟁에 대해 구약보다 더 많이 말함에도 불구하고 후자 역시 침묵하지 않는다.다윗은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0, 11). (1119.2)
 그리고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기의 회개하는 실향민들에게 약속하셨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 27). (1119.3)
 비슷한 방식으로 신약은 그리스도를 구세주요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요 1:12) 죄의 용서(요일 1:9), 하나님 가족의 자녀됨(요일 3:1, 2), 변화된 마음(요 3:5-8; 고후 5:17) 그리고 영생(요일 5:11, 12)을 약속한다. 그리고 새 언약에 대한 서약식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법을 각 사람의 마음에 기록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히 8:10). 그렇게 됨으로써 신자는 아버지의 뜻을 마음으로부터 행하기를 원할 것이었다(참조 시 40:8). 이 모든 거래는(하나님의 추종자가 되는 것은) “흑암의 권세에서”(사탄이 지배하는 세계로부터) 신자를 건져내는 일로 그리고 “그의[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어지는 일로 귀결된다(골 1:13). (1119.4)
 그러나 회심하는 죄인이 그리스도를 구세주요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이 “전쟁”을 끝내지는 않는다. 어떤 면으로 개인의 쟁투는 더 극심해진다. 사탄은 늘 우리를 속이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사도는 말한다(고후 2:11). 그 결과 신자는 싸움을 위한 영적 힘을 키우도록 장려되는데, 이는 하나님과의 밀접한 연합을 통해서 일어난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0-13). (1119.5)
 다른 사도들도 비슷한 경고를 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 9).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궁극적으로 신자의 유일한 안전처는 매일 매일의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전념에 있다.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하늘 아버지께 의지를 매일 드리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훈계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또는 헬라어 원어의 구문이 말해주듯 “자신들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것이라고 여기기를 계속하고, 자신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것으로 여기기를 계속하라.” 신자의 삶은 때로 전투라고 설명하는 것이 올바르다. 어떤 경우 그것은 “전투 한번과 행군 한번, 전투 한번과 행군 한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로 “전투”는 지연작전밖에는 사용할 수 없는 패배한 적에 대한 것이다. (11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