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자주 우리는 비를 내리기 위하여 찌푸리는 흐린 날의 물상(物象)을 이해하지 못한 채, 비를 뿌리는 맑은 날을 동시에 누리려 하는가?

 — 시편 42, 43편(153.1)
 구름 속에 몸을 숨긴 태양의 실루엣
 인사말에 들어갈 만큼 좋은 날씨가 되자면 우선 하늘이 맑아야 하고 햇빛은 눈부셔야 한다. 그런데 그런 맑은 하늘의 좋은 날씨가 여러 날 계속되면 영락없는 가뭄이 온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까맣게 타 들어가는 대지는 갈증으로 허덕이게 된다. 땅 위의 동 • 식물이 함께 목이 타는 것이다. 맑은 하늘은 비를 내릴 수가 없다. 해가 눈부신 푸른 하늘은 비를 만들 수 없는 것이다. 그토록 갈급하는 비가 내리자면, 구름이 하늘을 덮어야 하고 눈부셨던 태양은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추어야 한다. 흐린 날만이 비를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153.2)
 얼마나 자주 우리는 비를 내리기 위하여 찌푸리는 흐린 날의 물상(物象)을 이해하지 못한 채, 비를 뿌리는 맑은 날을 동시에 누리려 하는가? 해가 가려지지 않은 맑은 하늘은 결코 비를 내릴 수 없다는 평범한 물리(物理)를 이해하지 못하고 찌푸린 날의 진심을 알아내지 못할 때, 마음이 찌푸려진 우울한 날을 낙망하며 사는 것이다. 인간 영혼의 해부학이요 인생의 만물상(萬物相)이 적나라한 책 시편에, 두터운 구름 속에 모습을 감춘 눈부신 태양의 실루엣이, 찌푸린 날을 암울로 살아가는 땅 위의 상(傷)한 갈대인 인간들 위에 나지막하게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는 표제가 붙어 소개된 시편 42편이며 그것의 연속임에 틀림이 없는 시편 43편의 내용인 것이다. “마스길”(maskil)이란 히브리어는 “깨달음” 혹은 “교훈”을 뜻하는데, 이런 표제가 붙은 시편은 13개가 된다. 고라 자손이 썼거나 편집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름 앞에 붙은 히브리어 접두(接頭) 전치사인 “러”(le)는 영어의 “to”, “at”, “for”에 해당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연주나 작곡 혹은 보관을 그들에게 위탁했음을 뜻할 수도 있다. 내용과 표현을 고려할 때 이상의 두 시편은 다윗의 경험을 드러낸 것임을 쉽사리 알게 된다. (154.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42편 1~5절). (154.2)
 “어찌하여”의 멜런코울리아
 두 시편을 합친 16절은 세 번이나 반복된 다음의 장탄식(長歎息)으로 고르게 삼등분 되어 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42편 5, 11절, 43편 5절) 두 시편의 16절을 한숨에 읽노라면, 그것이 극도의 의기 소침과 좌절에 빠져 암담한 기분을 특색으로 하는 요즈음의 “멜런코울리아”(melancholia), 즉 대부분이 경험하는 우울증의 일반 증상임을 알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무거운 짐이 자신의 어깨에 놓이기나 한 듯이 축 처진 어깨와 불면에 시달린 충혈된 눈과 창백한 얼굴, 모든 의욕과 함께 식욕마저 감퇴되어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음식 대신 눈물을 마시고 한숨을 먹고 사는 낮과 밤이다. 맹수에게 늘 쫓기는 사슴처럼 안절부절 할딱이며 살기에 지친 다윗은 앞날이 너무 어둡고 내일을 생각하는 것이 너무 힘겨워 차라리 돌아서서 “마음이 상하”(4절)기까지 아름답고 평화로웠던 과거를 반추하는 감상(感傷)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봄가을 일년 세 차례 대명절에 이웃과 친구를 부추기며 가족과 함께 하나님이 계신 성소를 향하던 못견디게 그리운 지난날의 추억이다. 행복스러웠던 과거에 대한 회상은 오늘의 불행을 더욱 쓰라리게 하는 것이다. (155.1)
일개 패잔병이 된 엘리야가 광야의 엉성한 떨기나무 아래 앉아 심각한 우울 증상을 호소하는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156.1)
 어떻게 이 불퇴전(不退轉)의 사나이 다윗이 이토록 처절한 낙망과 우울에 빠져 버렸는가? 다윗도 그러한 처지에 빠져 버린 자신이 안타까워 짧은 16절에서 열 번이나 “라마”(lamah 혹은 mah), 곧 “어찌하여”를 울부짖듯이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비단 다윗만의 말이었던가? 갈멜산 위에서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고 삼년 반이나 닫혔던 구리빛 하늘을 열어 폭우가 쏟아지게 했던 믿음의 거인 엘리야는 어떠했는가? 그 다음날 생명의 위협을 느껴 도망길에 나선 일개 패잔병이 된 엘리야가 광야의 엉성한 떨기나무 아래 앉아 심각한 우울 증상을 호소하는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열왕기상 19장 4절). 니느웨를 경고한 요나의 고백을 들어 보았는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요나 4장 3절). 낙망과 우울은 모든 것을 뜻한 대로 완벽하게 하려는 완전주의자(perfectionist)들 현실의 장애와 제한을 극복할 수 없어 실망하고 비하(卑下)를 느꼈을 때 겪게 되는 정신적 중격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완전〕하라”(마태복음 5장 48절)는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도록 요청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칫하면 우울증에 대하여 가장 취약한 사람들일 수 있다. 그것은 구경(□徑)이 큰 총포(銃砲)가 포탄을 발사한 후에 받게 되는 상대적인 충격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이러한 반충(反衝)을 해소하고 정신적 평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현대의 그리스도인 사상가 루이스(C.S. Lewis)는 그것을 인간의 성격 속에 존재하는 “파동의 법칙”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낙망과 우울은 언제나 아주 가까이 있는 익숙한 경험이라는 사실이다. (156.2)
 까닭 있는 웅크림—“솨하흐”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언제 이처럼 처절한 낙망과 자기 연민에 빠져 심각한 우울증에 사로잡히게 되는가? 여기 뼛속까지 찢고 들어오는 우울의 독화살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활의 시위를 떠나고 있다. (157.1)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시편 42편 10, 11절). (157.2)
 하나님을 하늘처럼 받들고 땅처럼 의지하고 살아온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생각할 때도 그렇고,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의 비웃음에서도 그렇듯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 나올 지경에 처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때가 어디 있을까? 자존심은 상하여 누더기같이 되고 감정은 복받쳐 울분이 치밀어도 별수 없다. 속절없는 자신을 바라보며 좌절과 낙망의 깊은 바다 속으로 “엄몰”(42장 7절)되는 것이다. 가라앉으며 부르짖는 비명이 있다. (158.1)
그러나 시편은 비명으로 끝나지 않는다. 낙망은 절망과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낙망할 수는 있어도 절망하지는 않는다.
(158.2)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42편 9절) (158.3)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43편 2절) (158.4)
 그러나 시편은 비명으로 끝나지 않는다. 낙망(落望)은 절망(絶望)과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낙망할 수는 있어도 절망하지 않는다. 본 시편에 입버릇처럼 쓰여진 “낙망하다”(cast down)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솨하호”(shachach)인데 본래 의미는 욥기 38장 40절에 쓰여진 대로 사자와 같은 맹수들이 먹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굴속에 구부리고 엎드려 있는 동작을 나타낸다. 그렇다. 비록 그리스도인이 끊임없이 난관에 부딪히고 온갖 역경에 에워싸일 때 심신이 위축되어 잠시 엎드려질지라도 그것은 다음 순간의 새롭고 힘찬 도약(跳躍)을 위한 사자의 까닭 있는 웅크림인 것이다. 이 웅크린 사자는 어떻게 그 침침한 좌절의 굴 속을 뛰쳐나와 도약하는가? (158.5)
 「밤의 찬송」-「오히려 찬송」
 구세군이 낳은 세기적인 영적 지도자 브랭글(Samuel Brengle)의 영력이 넘치는 글과 말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께 가까이 이끌었다. 그러나 그가 엄청난 좌절과 우울한 감정에 맞서 무서운 싸움을 계속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술회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같이 느껴졌다. 나는 무덤으로 향하여 끝없이 달리는 것같이 느껴졌다. 나는 인생의 모든 영광과 매력과 의미를 잃어버렸다. ∙∙∙ 기도를 해도 아무 소용 없었고 진정 나는 기도의 영과 기도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C. W. Hall, Portrait of a Prophi 214쪽). (158.6)
 그는 어떻게 이 죽음과 같은, 아니 죽음에 이르는 우울증을 극복했는가?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적고 있다. “다음 순간 내가 기억했던 것은 비록 내 마음에는 전혀 찬양과 감사를 드리고 싶은 느낌이 없었지만, 내 의지로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었다. 나의 감정은 우울증과 흑암으로 완전히 뒤덮여 있을 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그러한 시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을 때, 그것은 축복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환한 빛이 희미하게 떠오르면서 천천히 타오르는 그 빛은 마침내 내 마음속에 있던 흑암을 깨뜨리고 말았다. 우울증은 지나가 버렸고 나의 인생은 다시 아름답고 생기 있는 모습으로 변했다. 나는 다시 한번 은혜로우신 축복들로 인하여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었다”(상게서, 214쪽). 그것이 바로 시인이 치유 받은 경험을 통하여 고백하고 있는 “밤에는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42편 8절)라는「밤의 찬송」이요.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42편 11절)라는「오히려 찬송」의 의미인 것이다. (1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