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 불퇴전(不退轉)의 사나이 다윗이 이토록 처절한 낙망과 우울에 빠져 버렸는가? 다윗도 그러한 처지에 빠져 버린 자신이 안타까워 짧은 16절에서 열 번이나
“라마”(lamah 혹은 mah), 곧
“어찌하여”를 울부짖듯이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비단 다윗만의 말이었던가? 갈멜산 위에서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고 삼년 반이나 닫혔던 구리빛 하늘을 열어 폭우가 쏟아지게 했던 믿음의 거인 엘리야는 어떠했는가? 그 다음날 생명의 위협을 느껴 도망길에 나선 일개 패잔병이 된 엘리야가 광야의 엉성한 떨기나무 아래 앉아 심각한 우울 증상을 호소하는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열왕기상 19장 4절). 니느웨를 경고한 요나의 고백을 들어 보았는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요나 4장 3절). 낙망과 우울은 모든 것을 뜻한 대로 완벽하게 하려는 완전주의자(perfectionist)들 현실의 장애와 제한을 극복할 수 없어 실망하고 비하(卑下)를 느꼈을 때 겪게 되는 정신적 중격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완전〕하라”(
마태복음 5장 48절)는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도록 요청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칫하면 우울증에 대하여 가장 취약한 사람들일 수 있다. 그것은 구경(□徑)이 큰 총포(銃砲)가 포탄을 발사한 후에 받게 되는 상대적인 충격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이러한 반충(反衝)을 해소하고 정신적 평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현대의 그리스도인 사상가 루이스(C.S. Lewis)는 그것을 인간의 성격 속에 존재하는
“파동의 법칙”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낙망과 우울은 언제나 아주 가까이 있는 익숙한 경험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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