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준수의 기원과 역사 제4장 그리스도교가 이교화되어 가는 과정 제2절 로마 제국시대의 점성술 성행과 태양신 숭배의 풍조
 3. 고고학적 증언들-유적지와 유물들
 a. 율리우스 캐사르 역
 고대의 로마 달력은 매우 불완전했다. (296.2)
“B.C. 750년경에는 1년을 304일로 하는 10개월이었고 세 수는 춘분 경이었다. 즉 마르티우스(Martius)로 시작하여, 31일의 4개월, 그 후는 30일이 6개월인데, 디셈베르(December)로 끝난다.... B.C. 710년경 누마 왕 시대는 1년을 355일로 하고 2개월을 추가하였다.
야누알리스(Janualis, 문의 신) ‧‧‧‧‧‧‧ January
페브루알리스(Februalis, 재계의 달) ‧‧‧‧‧‧‧ February
‧‧‧‧‧‧
아무튼 1년 355일로 하면 1태양 년보다 10일이나 단축되었으므로 역과 계절과는 차이가 크다. 따라서 B.C. 400년경부터 격년으로 23일 또는 22일의 윤년을 더함으로써 평년을 355일, 윤년을 377일 또는 378일로 하는 불완전한 태양력을 썼다.... .”
51)
(296.3)
 이것은 윤월의 길이가 너무 짧고 또는 1년의 길이의 장단이 심하여 율리우스 캐사르 때는 계절과 너무 차가 심했다. 그래서, 그가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 소치게네스의 도움을 받아 개정하기에 이르렀다. (296.4)
 

대리석에 새겨진 로마력의 단편. 아퀼라 국립 미술관 소장.
(297.1)
“캐사르는 B.C. 47년에 춘분 날을 로마의 제2대 누마(Numa Pompillius, 715-673 B.C.) 왕 시대의 춘분 날인 3월 23일로 하기 위하여 당연히 두어야 할 23일의 윤월에 다시 장월 2개월에 해당하는 67일을 붙여 445일의 1년을 만들었”다.52)
(297.2)
 새로 제정하게 된 새 달력에 대해서 독일의 저명한 법학자이자 고전학자이기도 했던 베를린 대학교 역사학 교수 몸젠(Theodor Mommsen, A.D. 1817-1903)은 로마의 고대 관습과 풍속에 관한 저술을 펴냈었는데, 아래와 같이 증언하여 일곱 혹성신 명칭으로 불리는 별의 달력, 즉 주일도 병합했음을 보여 주었다. (297.3)
 

율리우스의 역의 석판 단편
“캐사르는 결국 헬라의 수학자 소치게네스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의 유독쿠스 달력에 따라, 이탈리아의 농민 역년에다가 적절한 윤년제를 삽입함으로써 그 오점을 제거해 종교용과 관제용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바로 이 시점에서 폐기된 구 달력의 3월 1일이 해의 시작이 되도록 해서 그 날이 1월 1일로 했다. 이 결과로 애당초 일반 시민 생활 속에 오랫동안 널리 이행해 왔던 최고 행정관(시장, 지사) 임기의 교체를 위하여 정착되었던(1월 1일)-이 또한 역시 해가 시작하는 달력 기간으로 채택되었다. 두 가지 변경이 A.U.C. (Ab Urbe Condita, 로마 도성 건설한 해부터 기산하여) 709년 정월 1일에 실시되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그 권위에 의하여 소위 율리우스 역(Julian Calander)의 사용이, 캐사르 독재가 몰락된 이후 오랫동안, 민주화된 세계의 정규적인 표준으로, 그리고 대체적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집트인의 천문학적 관찰에서 유래된 항성력이-확실하지 않으나 매우 섬세하게-이탈리아에 전승되었는데 그것은 달력 날짜에 따라서 떠올랐다 지는 별들을 정돈한 항성력에 대해 상세한 설명으로 된 포고령이 동시에 첨가되었다.”53)
(298.1)
 이전 달력에 없었던 이 별에 대한 캐사르의 칙령은 몇몇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로마의 유명한 전기작가 플루타르크(Plutarch, A.D. 46- 119)는 그의 저술 황제 열전 (De Vita Caesarum)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299.1)
“어찌되었던, 이 칙령은 캐사르를 시기하고 그의 권력을 싫어하는 자들이게 비난할 호기를 주었다. 어느 한 사람이 이 칙령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리라’ (Lyra, 거문고 성좌)가 내일 떠오를 것이라고 한 마디 소견을 말했을 때 웅변가 키케로는 캐사르가 사람들로 하여금 억지로 이 제도를 수용토록 했다는 것을 넌지시 비치면서 대꾸하기를 ‘네, 그렇군요, 이 포고령으로’ 했다.”54)
(299.2)
 우리는 이 율리우스 캐사르의 새로 개정한 달력의 모형에 대해서 아는 것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 당시에 사용했던 것으로 학자들이 생각하는 돌로 만든 한 달력 단편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 달력을 “사빈네 달력”이라 부른다. (299.3)
 b. 사빈네 달력
 오덤은 그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299.4)
“1795년에 중부 이탈리아의 한 지역에서, 사빈네 달력으로 알려진 놀라운 한 단편 조각이 발견되었다. 이 조각들은 율리우스 달력의 9월과 10월을 재차 보여주고 있다(이 Sabine calendar도 Corpus Inscriptionum Latinarum, 1863 ed., part 2, 1:302에 수록되어 있다). 고고학적 발견물들 중에서 이런 표본을 감정했던 한 전문가는 이것을 아우구스투스 캐사르 치세 기간의 것으로 판명했다. 즉 이것은 19년 B.C.-A.D. 14년 사이에 (로마 도시 건국 A.D. 735-757년 사이)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조상에 기록된 첫째 단은 그 달의 날짜의 숫자가 순서대로 표시되었고, 둘째 단은 A, B, C, D, E, F, G와 같이 대문자로 주일의 칠일을 나타내 보였다. 셋째 단은 순열 항목으로서 A, B, C, D, E, F, G, 그리고 H의 글자가 ‘눈디내’(Nundinae)라 불리는 장날의 순환 주기로 표시되었다.... .”55)
(299.5)
 로마 가톨릭 저술의 권위자로 널리 정평있는 허버트 털스톤(Herbert Thurston)은 이 사빈네 달력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진술로 매우 명쾌하게 해설했다: (300.1)
“동방의 7일 기간, 또는 주일이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치세시 소개되었을 때(눈디내를 위해 쓰였던 것처럼), 같은 방법으로 처음에는 알파벳의 일곱 글자가 시간의 새로운 구분을 나타내기 위해 채용되었다. 사실에 있어서, 눈디내를 나타내는 A에서 H까지의 여덟 글자로 된 주기와 또 주일을 나타내는 A에서 G까지의 일곱 글자로 된 주기가 나란히 함께 쓰여진 달력의 단편 조각이 오늘날까지 소실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Corpus Inscriptionum Latinarum, 2d ed., I, 220.-The Philocalian Calender of A.D. 356 [354], ibid., 256에 나타난 같은 항목을 보라). 이 달력의 고안을 그리스도인들이 모방해서 만든 그들의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의 연월일 달력도 A, B, C, D, E, F, G의 일곱 글자들이 반복적 순환 주기로 기표되었다.”56)
(300.2)
 c. 로마의 티투스 황제의 욕실
 로마 황제 티투스(Titus Flavius, A.D. 39-81)가 토목 공사로 남긴 것은 선황이 시작한 “콜로세움”과 그 근처에 자신을 위해 만든 화려한 욕장이었다. 티투스의 욕실은 현재 파괴되어 로마에는 없다. 본래는 콜로세움과 황제 트라야누스의 욕실(Trajan's Baths) 중간에 세워졌던 것인데 필자가 로마에 가보니 콜로세움 경기장 주변 도로 확장으로 그 흔적마저 없어졌다. (3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