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기야는 죽을 준비를 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너무도 낙심되어 살려 달라고 애걸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약속하셨다. “내가 네 눈물을 보았도다. 보라, 내가 너를 치유하리라”(왕하 20:5). 하나님은 때로는 욥에게 하셨던 것처럼 당신을 신뢰하는 자에게 고난을 주기도 하시고, 치유를 허락하기도 하신다. “그는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그는 상처를 내시다가 그의 손으로 낫게 하시느니라”(욥 5:18). (261.1)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기 위해 달라지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 마음대로 사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온갖 역경에 자주 빠지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질문으로 당신의 관심을 나타내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더 맞을 일만 하느냐? 어찌하여 여전히 배반을 일삼느냐? 머리는 온통 상처투성이고, 속은 온통 골병이 들었으며,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성한 데가 없이, 상처난 곳과 매맞은 곳과 또 새로 맞아 생긴 상처뿐인데도, 그것을 짜내지도 못하고, 싸매지도 못하고, 상처가 가라앉게 기름을 바르지도 못하였구나”(사 1:5, 6, 「표준새번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다. (261.2)
그들의 아픔과 괴로움을 아시는 주님은 고집스런 백성에게 회개와 개혁의 시일을 늦추지 말라고 감동적인 말로 호소하신다. “그들이 어찌하여 ... 나를 격노케 하였는고? ...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로페)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렘 8:19-22, 「개역한글판」). 그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의 처방전을 거부하고 자기들의 생활 습관을 바꾸기 원치 않기 때문이다. (261.3)
이 이야기는 위대한 의사가 죽어 가는 환자를 위해 유향을 준비해 가지고 그것을 처방하고 싶으나 환자의 거부로 좌절당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래서 선지자는 이런 말로 경고를 비친다. “어찌하여 ... 우리를 치유하지 않으시나이까? 우리가 ... 치유의 때를 바랐으나 [오히려] 고난을 보나이다!”(렘 14:19). 다니엘은 이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느부갓네살 왕에게 너무 늦기 전에 마음을 준비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순복하도록 권고했다. 그리하면 “혹시 왕의 평온(平穩)이 치유되리이다”(단 4:27 난외주). (262.1)
하늘 의원의 치유의 때와 방법은 따로 있다
솔로몬은 “죽일 때와 치유시켜 줄 때”가 있다고 말했다(전 3:3). 크신 의원은 당신의 환자를 치유함에 있어 환자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때와 방법을 따라 하신다. 치유를 바랄 때 그리스도인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인지 사도 야고보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약 5:13- 16). 병든 신자는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다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해 주기를 요청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거기엔 놀라운 결과가 보장되어 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라”(15절). 이미 살펴본 것처럼 그런 간절한 기도는 언제나 구원을 가져온다. 그런 뜻에서 치유를 구하는 모든 기도는 이처럼 근본적인 문제에 해답을 주는 것이다. (262.2)
그 다음 단계로 신유의 진리에 결정적인 요소는 이것이다: “[그리하면, 그것이 주의 뜻이면]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환자가 일어나고 못 일어나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뜻에 달려 있다. “그가 죄를 범했어도 그것들을 용서해 주시리라”(약 5:14, 15).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용서와 구원은 보장되나 몸의 치유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럴 경우 환자는 괴로움을 견딜 수 있는 충분한 은혜를 받게 된다. 그러나 병의 치유 여부는 전적으로 하늘 의사에게 달린 것이다. 그러므로 몸이 낫기 위해 기도할 때는 반드시 “주의 뜻이면”이란 단서를 달아 기도해야 한다. “건강 회복을 위해 기도를 요청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범하면, 그것이 천연의 법칙이건 영적인 법칙이건, 죄가 된다는 것과, 그들이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죄를 자복하고 버려야 할 것을 분명히 알려주어야 한다” (MH 228). (262.3)
때로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도움이 될 경우 병자들의 고생이 허용된다. 구원의 드라마에 드로비모의 이름이 기록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이유는 바울이 그를 병든 채로 말타에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이다(딤후 4:20). 디모데도 몸이 허약해 고생을 했고(딤전 5:23), 에바브로디도도 병들어 거의 죽을 뻔한 일이 있었다(빌 2:25-30). 바울은 그들의 치유를 위해 틀림없이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잘 믿는 형제들은 얼마간 계속 질병에 시달리도록 허락되었었다. 여기서 우리는 신실한 일꾼들에게도 하나님은 때때로 질병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배우고 용기를 얻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정과 당신의 시간표를 가지고 계시므로 우리는 다만 그의 손에 우리의 사정을 맡겨야 한다. (263.1)
세 번이나 바울은 그의 “육신의 가시”가 제거되기를 간구했으나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충분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게 됨이니라”(고후 12:9; 참고 13:7-10)고 하셨다. 바울의 육체적 고통은 치유를 받지 못했으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적절한 능력을 받아 그의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했다. (263.2)
요약: 치유를 바라는 신실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치유일 수도 있고 연약함을 견딜 수 있는 은혜일 수도 있다. 우리의 반응은 항상 예수님의 반응과 같아야 한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눅 22:42; 마 26:39). 치유를 거부하신 주님께 대한 바울의 반응은 매우 단순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려고 나는 더욱 더 내 약한 것을 자랑하려고 합니다”(고후 12:9, 「표준새번역」). (263.3)
예수는 위대한 의사
나사렛 회당에서 처음으로 말씀하신 안식일 설교에서 구세주는 아버지께서 당신께 주신 사명을 이렇게 비치셨다: “주의 영이 ... 나를 보내사 ... 치유케 하시며”(눅 4:18). 그래서 그는 날마다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또 왕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가운데 모든 질병과 모든 허약함을 고쳐 주셨다(마 4:23).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사도들은 예수께서 “마귀에게 억압받는 모든 자를 치유”하신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행 10:38). 사람들은 예수를 “의사”라 불렀다(눅 4:23). 그는 “병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기 때문이다(눅 9:11). 사실 “예수께서는 지상 봉사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는 병든 자를 치유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바치셨다”(DA 350). (264.1)
고난당하는 의사이신 그리스도는 당신의 환자들을 이해하고 동정하기 위해 인류의 질병의 결과를 친히 맡으셨다. 그렇게 하신 것은 그가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치유를 격려하시기 위함이었다(사 53:5). 그는 병든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퇴화된 본성의 누추함을 쓰시고 그로써 하늘의 능력을 주입하고 인류의 회복을 가능하게 하셨다. 이것을 깨달은 베드로는 말하기를 “그가 친히 나무에 달린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낫게 되었느니라” 하였다(벧전 2:24). 의사 누가는 주께서 구원의 은혜를 삭개오에게 선물하셨을 때 하신 말씀을 이렇게 기록했다: “오늘 건강(구원=건강)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눅 19:9; 위클리프[Wycliffe]와 틴덜[Tyndale] 두 사람 다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구세주의 치유는 전인적 치유인 때문이다. (264.2)
크신 의사는 자신의 처방을 고집한다
모세가 주의 명령에 따라 지정된 나무를 마라의 쓴 물에 던졌을 때, 물은 치유되었다. 이것은 그 나무에 무슨 힘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것은 마치 모세가 광야에서 치켜든 구리 뱀에 무슨 힘이 있어서 뱀에 물린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볼 때 치유를 받은 것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민 21:9; 요 3:14). 이 치유는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이 상징적 치유 방법 배후의 능력을 믿는 믿음에 달려 있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 형틀인 그 나무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 구원과 치유의 비결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우리의 제사장으로 봉사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한 믿음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절감하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신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병든 사람들에게는 필요하니라”(마 9:12). (264.3)
성경에 기록된 35개에 달하는 그리스도의 치유 기록 중 19개의 경우엔 구체적인 “처방”이 주어졌다.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은 두 단계로 치유를 얻었다. 그 첫 단계는 그리스도께서 침과 흙을 이겨 눈에 바른 것이고, 다음 단계는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은 것이다(요 9:1-7). “그 [생명]나무의 잎사귀들은 민족들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계 22:2). 이 잎사귀들은 우리가 건강해지기 위해 영접해야 할 진리, 거기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한다(MH 122). 성경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 처방이 수없이 많다. (265.1)
구주께서 마귀 들린 사람을 고치신 것(눅 8:26-40)은 그로 하여금 독사의 독을 이기는 은혜의 능력을 과시하게 하려는 것이었고, 죽은 자와 죽어 가는 자를 살리신 것은 생명을 주시는 당신의 권능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요 11:14, 43, 44; 눅 7:1-10). 우리는 모두 죄에 빠진 소경, 벙어리, 귀머거리, 절름발이이며,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혀 영적 기능이 “중풍 마비”로 죽어 가는 자들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크신 의원의 유향을 필요로 하며, 생명 주시는 이의 생명을 분양 받아야 한다. 치유의 역사를 통해 예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위한 당신의 계획을 우리가 성취하도록 도우신다. (26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