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 제 4 부 예수님과 함께 지성소에서 (죄의 존재로부터의 자유) 17. 사랑의 법칙 (나의 모든 애정은 그리스도의 것임)
 방심할 수 없는 이 위험 때문에 창조자께서는 사실상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들이 나의 인격이나 품성에 대한 어떤 피상적인 인상으로 너희의 영적인 시각이 결코 희미해지지 않기를 개인적으로 바란다. 너의 지성을 끝까지 펼쳐서, 무한한 지식과 능력을 가졌지만 삼가 비가시적으로 표면에 나서지 않기를 택한 자의 사랑과 온유, 겸손과 위엄을 이해해보려고 하라. 내가 만든 것들을 연구하여 보라. 그것들은 내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능력과 신성을 너희로 상상케 할 것이라(롬 1:19~21). 너희가 내게 드리는 예배에 도움을 주는 시각적, 구두적(口頭的)소품을 만들지 말라. 3차원적인 어떤 형상도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실체를 왜곡하고 한정한다. 오직 참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하라. 올바른 형태의 경배에는 어떤 대용물도 필요치 않다. (222.4)
 III.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셋째 계명은 참된 예배에 대한 접근에 초점을 맞춘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결혼하였다고 말한다. 이 백성들은 그분의 이름으로 불리웠고(비교 창 4:26; 행 11:26; 대하 7:14; 사 43:7), 그분의 언약의 가족의 일원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은 그들이 특성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침례받을 때에(마 28:19, 20), 그들은 하나님이 이제 그들의 연합의 띠이고, 행동의 권위이고, 또 성공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신부에게 그리스도 자신의 품성이 신부에게서 완전히 재현될 때까지 자신에게 진실되게 남아 있으라고 호소하신다(사도행적, 20). (223.1)
 이 계명에서 하나님께서는 사실상, 나는 너희가 너희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내 이름을 이용해 먹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내 이름을 써도 된다 라고 초청하신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 혹은 “나는 스스로 있을 자가 될 것이니라(I will become what I will become)”고 약속하셨을 때(출 3:14; 6:3), 하나님께서는 마음속에 성육신을 생각하시고 계셨다(요 1:14). 성육신 사건 때에 그는 엘 샤다이(El Shaddai)가 아닌 예수 임마누엘 구세주라는 새 이름을 가질 것이다. 이 이름이 나타내는 바는 그분께서 자신의 거듭난 제자들에게 언제라도 주실 채비가 되있다는 말이다. 셋째 계명은 하나님의 신부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찬란하게 빛내도록, 또 결코 흐리게 하지 말라고 촉구하고 있다. 우리가 참된 존경심을 가지고 우리 입술로 하나님의 이름을 일컫는 것은 모든 신성 모독을 배제하는 행위이다. (223.2)
 IV.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록히 지키라”
 넷째 계명은 옳바른 경배일에 초점을 맞춘다. 십계명의 중심 주제가 죄된 인간의 영혼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나는 나의 유일무이한 안식일이 너희에게 내 창조의 기념품이 되도록 특별히 고안하였다. 너희는 그것을 기억하여 지키라. 나는 안식일을 통하여 나의 사랑을 드러내 보일 것이고, 안식일은 내가 너희 창조자이고 또 너희가 사는 환경의 설계자인 것을 너희에게 상기시켜 줄 것이다. 안식일의 목적은 너희의 유전적이고 환경적인 연약함을 없애 주어 성화토록 하는 것이다(겔 20:12, 20; 출 31:14~17). 내가 너희에게 새로 태어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유전을 줄 것이고(벧후 1:4), 매 안식일 너희가 성장하도록 영적인 환경을 제공하여 줄 것이다. 너희는 내 은혜로 안식일을 준수함으로 죄의 속박과 능력에서 해방될 것이다. (223.3)
 바울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로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지를 설명하여 주었다(히 4:1ff). 몰간(G. Campbell Morgan)은 “일을 결코 하지 않는 자는 예배를 드리기에 적합치 않다. 끊임없이 예배만 드리는 사람은 일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안식일은 하나님의 역사(役事)의 어느 한 시대의 이상이 아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목적에 있어서 보편적인 것이고, 인간의 탄생을 기다렸던 시대 질서의 일부분이었다”(The Ten Commandments, 46, 48). “이것[안식일]은 그림자이거나 어떤 백성에게만 적용되도록 제한되지 않았다”(부조와 선지자, 48, []안은 필자의 추가한 것임). (223.4)
 진정한 경배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창조자와의 언약 관계에 충실한 것이다. (224.1)
 십계명의 첫번째 돌판에 기록된 이 네 계명은 인간이 자신의 창조자와 맺을 수 있는 모든 관계를 분명하게 한다. 이 네 계명들은 크고 첫째되는 계명인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마 22:37)의 범위를 보여준다. 이 네 교훈들은 인간의 사고와 예배를 수직적인 면에서 세운다. 이 계명들의 목적은 각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도록 함이다. (224.2)
 후반부 여섯 계명을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동료들을 사랑하는 것임
 인간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통하여 동료 인간들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채비를 한다. 후반부 여섯 계명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보여주신 그대로 인간들끼리 행하라고 하심으로써 처음 네 계명에 그 윤곽이 이미 잡힌 원칙들을 또 다른 분야로 확장시킨다. 율법의 두 번째 돌판은 수평적 국면, 즉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224.3)
 V. “네 부모를 공경하라”
 율법의 첫번째 판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늘 아버지에게 온전한 충성을 바치라는 명령으로 시작되듯이, 두번째 판도 아이들에게 이 땅에서 여호와의 대표자인 그들의 부모들을 온전히 성원하고 존경하라는 요구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아들과 딸로서 그들이 가진 풍부한 잠재력에 달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녀들에게 가정에서의 그들의 의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라고 강력하게 권면하신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영예를 돌릴 때 그들은 가족을 만드신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린다. (224.4)
 바울은 자녀들에게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상기시켜 준다(엡 6:2). 이 계명은 부모에게 보여준 충실함과 감사는 인류에게 행복한 미래를 가져다 줄 것을 보장한다. 바울은 쓰기를 교회에 참석하는 자녀들이 “집에서 효를 행하”도록 권장하라고 편지를 썼다. 우리말 개역성경에는 “효”로, 공동번역과 표준 새번역에는 “종교적 의무”로 번역된 고어(古語) 피에타스(pietas, piety)는 “사람들이 자기 부모에게 행할 의무에 반영된,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갖고 있는 의무”를 뜻한다(Farrar, The Voice from Sinai, 188). “부모를 존경하는 분위기 속에서 형성된 품성 안에는 생명을 연장시키는 숨겨진 능력의 요소가 있다. 반면 복종의 분위기 가운데서 형성된 품성 안에는 생명을 짧게 하게 하는 무모성과 초조함의 요인이 있다”(G. Cambell Morgan, op. cit., 58). (224.5)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보여주신 순종의 모본은 참으로 완전하지 않은가! 로버트슨(Robertson)은 아이 예수가 어떻게 자신의 두 아버지의 계명들을 지켰는지를 다음과 같은 말로 환기시켜 준다. “예수는 그들[그의 부모]에게 계속하여 복종하였다. 부모나 랍비보다 실제로 더 많이 아는 이 놀라운 아이, 이 부드럽고, 순종하고, 다정스러운 아이 예수는 그들[그의 부모]에게 계속하여 순종하였다. 나사렛에서의 그 후 18년(눅 3:23)동안 예수는 어른이 되어 갔고, 요셉을 뒤이어(마 13:55)—요셉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여기가 마지막이다—나사렛의 대표 목수가 되었다(막 6:3).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하늘 아버지께서 메시야 임무에로 부를 것을 기다리며 생각에 잠겨 지낸 나날들에 관하여 누가 이야기할 수 있는가?”(Word Pictures in the New Testament, vol. II, p. 35). (224.6)
 인간 부모와 하늘 부모의 권위에 대한 존경은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한다. (225.1)
 VI. “살인하지 말지니라”
 이 계명은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생명과 빛, 그리고 기쁨의 근원이시다. 태양에서 발하는 광선과 같이, 샘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과 같이 모든 축복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그의 온 피조물에게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 안에 있게 되면 그것이 넘쳐 흘러서 다른 사람에게 사랑과 축복을 주게 될 것이다”(정로의 계단, 81). 인간은 생명을 만들어 내는 데에 참여하지 않았고, 생명을 파괴할 아무런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생명이 창조자로부터 온 선물이기에 인간은 자기 자신이나 혹은 다른 어떤 사람에 대하여 생명의 온전한 가치를 줄이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신체적 · 정신적 · 사회적 · 영적인 면에서 생명을 분석할 수 있다. (225.2)
 예수께서는 이 점을 산상 설교에서 설명하시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기 이웃을 바보라고 하는 자는 자아의 가치에 대한 자신의 의식을 감소시키고, 자기 생명의 특질을 해치는 자라고 하셨다(요일 3:15; 마 5:21, 22). 그 사람과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이 가지는 부정적인 느낌은 결국 생명을 단축할 것이다. 분노는 혈압을 높이고, 또 몸에 해로운 영향을 많이 준다. 부정적인 감정, 분노, 증오, 질투, 시기, 그리고 인색함은 다른 이들과, 또 이런 것을 감추는 이들의 암살자이다. 여섯째 계명은 생명의 잠재력이 발휘되도록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라고 요구한다. (225.3)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유형, 무형의 애정과 관심의 표를 가지고 이웃을 감싸주며, 그 사람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하는 동안에 자기 자신의 건강도 좋아진다. 인간의 생명에는 인간의 어떠한 계산도 셈하지 못하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 “한 생명을 종결하는 행위는 인간의 재치와 지혜를 하나님의 재치와 지혜보다도 더 우월한 데 놓는 행동이다. 죽음이라는 문제는 너무나 광대하기에, 생명을 취하는 것 보다 인류에 대하여 또 그러기에 하나님에 대하여 범하는 더 큰 죄는 있을 수 없다”(G. Campbell Morgan, op. cit., 65,66). (2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