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17. 야훼 이레—나의 공급자 여호와 (돌보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 이름으로 당신을 계시하셨을 때의 배경은 아마 구약에서 가장 극적이고 아슬아슬한 사건일 것이다. 아브라함은 120세였다. 만사가 형통하고 아들 이삭이 성년기에 접어들 무렵, 그 아들은 바로 그의 기쁨과 소망의 전부요 중심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고 그의 상속자는 이제 자기의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때였다. 장막 촌은 태평 성세를 누리는 듯하였다. 그런데 마침 그 때 “하나님(언약 체결자이신 엘로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창 22:1) 그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독자 이삭을 이제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 내가 네게 말해 줄 한 산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2절)고 하셨다. (242.1)
 하나님은 사람 살리기에 가장 적당한 곳을 아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리아란 어떤 곳인가? 이 지명은 성경에 두 번 나온다.

 (1) 한 번은 이삭의 희생 장소로(창 22:2).

 (2) 또 한 번은 솔로몬의 성전이 위치한 곳으로 나온다(대하 3:1; 참고 대상 21:22; 23:1). (243.1)
 게세니우스(Gesenius)의 주장에 따르면, 모리아(Moriah)의 첫 음절인 모르(mor)는 라아(raáh)라는 히브리어 어원에서 파생된 구어(口語)이고, 라아(raáh)는 “보다, 보게 하다, 보이다”의 의미를 가진 말이다. 그러므로 그 말은 아마 분사(分詞)로 쓰였을 것이며, 모리아는 “보시고 보여주신 (Yah, 야훼 의 약칭)” 또는 야훼 가 보실 산에서 그를 보여주리라”라고 풀이해도 좋을 것이다. 모리아 산은 야훼 께서 인간의 필요를 보시고 그 필요를 제공하신 산이다. 버마와 튜니스 지방의 영국군 총사령관이었던 얼 H. R. 앨릭잔더(Earl H. R. Alexander) 대장의 어머니인 C. F. 앨릭잔더(C. F. Alexander) 부인이 작사한 유명한 찬송가 가사에 이런 말이 있다: (243.2)
저 멀리 성 밖에 푸른 언덕 있었으니
사랑하는 주님 우리 모두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임 당한 곳이라.
(243.3)
 이 어원이 사용된 한 예를 보자: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성전의 모형을 보이셨다(maréh, 마르에)(출 26:30; 참고 신 4:35). 모형만 그에게 제시되었을 뿐 아니라 모든 세부적 명세까지 주어졌다. (243.4)
 모리아의 어미(語尾)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칠 장소를 보여주신 야, 즉 야훼 를 말한다. 이미 본문에서 읽은 것처럼 주님은 당신의 종에게 이 지시를 내리실 때 이렇게 말씀을 마치셨다: “모리아 땅으로 가서 ... 내가 네게 말해 줄(또는 지명할) 한 산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이 말씀은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그들이 사흘째 되던 날 아침 길을 떠나려 할 때 부조는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때 그는 모리아 산 위에 떠 있는 약속된 징표인 영광스런 구름을 보고 자기에게 말씀하신 음성이 하늘에서 온 것임을 알았다”(PP 151). (243.5)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사람에게 명하신 것은 역사상 이것이 유일한 경우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실 일을 비치신 것이었다. “태초에” 구원의 계획을 세우는 절박한 상황 아래서 아버지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는 외아들, 그의 기쁨과 소망의 중심인 당신의 후사를 후에 알려질 한 산에서 제물로 바치도록 요구를 받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외에는 어떤 사람에게도 이런 요구를 하지 않으셨다. 물론 아브라함은 어느 날 갈바리에서 벌어질 드라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자기 문제에 몰두하여 불타는 심정과 굳은 각오로 자기의 결심을 이행하다가 드디어 놀라운 진실을 깨달았다. 이 일이 지난 후 하나님은 그를 친구라 부르시게 되었다. 그것은 양편이 다 공통적인 희생을 경험했고(대하 20:7; 요 15:15), 서로 이해하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244.1)
 믿음이 부족했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초기 생애를 보면 그는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이었다. 그가 처음 하나님의 제안을 수락하고 가족과 고향을 떠나 낯선 땅으로 갔을 때는 믿음이 충만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는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해 사라가 자기 아내임을 부인했다. 주님은 그의 후사인 아들이 태어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흐르게 하셨다. 이 명백한 지연 사태 앞에서 “아브라함과 사라 두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했고, 이 과오는 하갈과의 혼인으로 이어졌다”(PP 147). 이스마엘의 출생은 가정에 복잡한 문제를 일으켰고, 그것은 후일 해결 불능의 세계적 문제로 발전했다. (244.2)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그의 생애는 후세를 위한 믿음의 본보기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완전치 못했다.... 그가 최고의 표준에 달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를 또 하나의 시험에 부치시어 사람이 견뎌야 할 최악의 시험을 당하게 하셨다”(PP 147). (244.3)
 아브라함은 순종했다(히 11:8). 그 숙명적 환상을 보기 전에 그는 이미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혹시 사라가 알면 자기가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한 그는 그 문제를 아내와 상의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종 둘을 데리고 여로(旅路)에 필요한 식량을 나귀에 실은 그는 아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50년 전 그는 여러 나라를 다니며 여러 해를 보내는 여로에 올라 큰 모험을 시작했다. 그 때 길을 나선 이후 그는 이제 다시 두 번째의 대 모험의 길에 나선 것이다. 그의 목적지는 하늘이 표시해 줄 어떤 산이었다. (245.1)
 자기 앞에 닥친 일로 고민하며 심적 갈등으로 밤잠을 설치고 먼길에 피곤한 그는 드디어 “모리아 산 위에 나타난 약속된 징표를 보았다” (PP 161). 위기가 그를 덮쳤다. 두려움으로 기가 꺾인 그는 자기가 이제 방금 수행할 일은 하나님만 보셔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젊은이들에게는 그 자리에 남아 있으라고 말한다. 그는 이삭과 홀로 희생을 드리고 곧 함께 돌아오겠노라고 그들에게 약속한다. (245.2)
 죽을 인생이 무의식적으로 요청한 희생양
 산정에 다가갈 때 이삭은 호기심으로 물었다. “내 아버지여, ... 보소서. 불과 나무는 있사온대, 번제에 쓸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내 아들아, 하나님(언약 체결자이신 엘로힘)께서 자기 자신을 번제에 쓸 어린양으로 제공하실 것이라’(창 22:7, 8, KJV). (245.3)
 “어린양”이란 말이 여기 최초로 성경에 나온다. 이삭의 이 물음은 구약 전체를 통해 모든 죄인의 입술에서 하늘을 향해 수없이 발해진 절규요 물음이다. 구약 경전이 말라기를 끝으로 마감된 후에도 이 물음은 해답을 찾아 절규하는 온 세상 남녀들의 가슴과 입술에서 계속 메아리쳤다. “어린양은 어디 있는가?” (245.4)
 신약에서 최초로 “어린양”이란 말이 들린 것은 침례자 요한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는 두 번이나 이 말을 썼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36). 구약이 탄식하며 묻던 “어디 있는가?”란 물음이 신약의 “보라!”로 확실한 해답을 찾았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던 “하나님의 어린양”이 나타난 것이다! 그 양은 예수이다. 그의 무죄함은 마귀가 준 그의 수난을 전후하여 확증되었다. 참으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대체(代替)하는 양으로 제공하신 것이었다. 실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하게”(고후 5:19) 하신 것이었다. (245.5)
 그러면 다시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영감의 글은 구원의 역사에서 이 이야기를 전할 때 우리의 상상에 맡기는 부분을 남겨 두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도와 제단을 쌓고 그 다음엔 그 위에 장작을 얹고, 아버지가 설명을 하고, 아들은 자기의 운명을 알고 놀라나 “즐거이 순종”한다. 눈물과 포옹이 있은 후 이삭은 “아버지의 슬픔을 위로하며 아버지의 더딘 손이 자기를 제단에 단단히 묶도록 격려한다”(PP 152). 그리고 마지막 기도와 작별의 말을 나눈다. (246.1)
 드디어 “아브라함이 그의 손을 내밀어 칼을 집어들고 이삭을 죽이려 하는데”(창 22:10)-실은 의지와 마음으로 이미 그는 이삭을 죽인 사람이다-그 순간 하늘에서 음성이 들린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것은 성경에서 이름을 두 번 연거푸 불러 강조한 첫 번째 사례이다. 이 습관으로 인자이신 그리스도는 자기가 누구인지 인식되기를 바라신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가 이름을 두 번씩 연거푸 부르신 경우를 여기저기서 발견한다: “시몬아, 시몬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마르다야, 마르다야!” “사울아, 사울아!” 등등. 그 음성은 명한다: “네 손을 아이에게 대지 말고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나는 이제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다음 순간 잠시 침묵이 흐르고 쓰지 못한 칼이 바위 위에 “딸그락”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이삭은 풀려난다. (246.2)
 그러나 아버지께서 십자가의 제단에 아들을 바치실 때는 그의 수난이 끝났음을 알리거나 형 집행을 모면하게 해주기 위해 하늘 저쪽에서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은 일은 없었다. 하나님의 어린양을 죽인 칼은 아버지의 심장을 찔렀다. (24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