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달콤한 맛은 곧 신맛으로 변했다. 일이 유감스럽게 꼬이다보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가 일상 생활의 경험을 통해 표현되기 보다는 정확히 엄선된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시되게 되었다. 루터교 역사가 라르스 콸벤(Lars Qualben)은 말하기를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교리로 취급되었으며, 그리스도교는 올바른 사유(思惟)의 종교로만 제시되고 그것에 상응하는바 마음의 올바른 상태에 대한 강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성경은 일종의 신학적인 무기 창고로 변했다. 거듭된 토론은
“호전적인 신학자들과 깡마른 개신교”를 산출하였다.
17 이와같이 신학적인 토론이 너무나 불쾌하게 발전되었기 때문에 루터의 가장 가까운 동지였던 필립 멜란히톤(Philipp Melanchton)은 1560년에 자신의 죽음이 가까와오자
“신학자들의 맹위(猛威)”를 피할 수 있게 되어 오히려 기뻐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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