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큰 환난”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는바 세상의 마지막 때에 있을 환난(계 3:10)이 아니다. 그리고,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에게 부과된 환난도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예언하신 “대 환난”과 동일한 것으로서 인간성의 존재 그 자체를 위협할 만큼 가혹한 시련기이다. (125.4)
 유럽은 계속해서 자체 개혁의 기회를 거절하였다. 로마 제국이 붕괴하던 시기에도 개혁의 기회를 거부하였다. 이로써 “서유럽의 백성들은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를 걸어가게 되었다. 14세기의 20년 대에는 중세 최대의 기근이 닥쳤으며 14세기 중엽에 무역로를 따라 번진 흑사병으로 유럽 전체 인구의 2/5가 죽었다. 영·불(英·佛) 간의 백년전쟁으로 14, 15 세기가 소비되었으며 이 전쟁의 후기에 화약과 중(重)포병 등 현대 무기가 도입되었다. 농촌과 도시 빈민들의 반란으로 말미암아 도시와 시골의 사회 질서가 파괴되었다.”15 (125.5)
 흑사병은 피부에 검은 반점을 일으키는 일종의 선(腺)페스트였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대부분 몇 일 안에 사망했으며 몇 시간 내에 사망한 사람도 많았다. 어떤 곳에서는 주민 전체가 몰사하여 시체를 매장하지 못했다. 삼백 년 동안 이 질병이 풍토병으로 남았었다. 이것이 두아디라 교회의 “침상”(병상)인가? (125.6)
 이와같이 유럽에 페스트가 근절되지 않고 있었는데 1600년 대에는 남쪽의 가톨릭과 북쪽의 루터교 사이에 종교적인 적대감이 팽대하였다. 1618~1648의 30 년의 전쟁으로 유럽 사람들은 또 한 차례 크게 동요했다. 드디어 그 무서운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이 제 정신을 차리게 되었을 때에는 중앙 유럽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군사들과 무법의 산적들에 의해 유린되어 있었다. 도처에 과부와 고아들이 즐비했으며 농업과 공업이 마비되어 있 었다. 사상자도 엄청났다. 독일 인구 1천 8백만 명 중에 사망자가 1천만을 기록하였다.16 (125.7)
 만약 남부 유럽의 가톨릭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신앙과 관련된 종교 개혁의 원칙들을 채택했더라면, 그리고 만약 북부 유럽의 개신교가 그 원칙을 망각하지 않았더라면 그 끔찍한 30 년 전쟁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125.8)
 5. 사데 교회 시대(1565~1740)
 예언적 상징으로 볼 때 사데 교회는 찬란히 빛나는 종교 개혁 시대를 잇는 두 세기(1565~ 1740) 간의 침체적이고 자기 만족에 빠진 개신교의 형편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사데 교회 시대는 종교 개혁의 평판에 힘입어 살았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거의 “죽게된” 상태에 있었다(계 3:1). (125.9)
 루터의 종교 개혁은 그리스도교에 새로운 출발점을 제공했다. 당분간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전의 어느 때 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선명한 빛을 구가했다. 성경의 중요성이 크게 인정되었다. 교육도 크게 신장되었다. 종교 개혁자들이 누구나 스스로 성경을 읽고 성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전에는 죽은 자들을 위해 수도 없이 치러지는 미사를 위해 사제(司祭)들에게 지불되던 수많은 자금이 이제는 가난한 자들의 구제를 위해 사 용되었다. 수도사들도 수도원을 나와 세상의 일터에서 직업을 구해 일했다. 사제들, 수도승들, 그리고 수녀들의 결혼이 장려되었다. 가정에서 직접 가장들이 예배를 인도하는 사례가 수없이 많아졌다. (126.1)
 그러나, 달콤한 맛은 곧 신맛으로 변했다. 일이 유감스럽게 꼬이다보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가 일상 생활의 경험을 통해 표현되기 보다는 정확히 엄선된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시되게 되었다. 루터교 역사가 라르스 콸벤(Lars Qualben)은 말하기를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교리로 취급되었으며, 그리스도교는 올바른 사유(思惟)의 종교로만 제시되고 그것에 상응하는바 마음의 올바른 상태에 대한 강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성경은 일종의 신학적인 무기 창고로 변했다. 거듭된 토론은 “호전적인 신학자들과 깡마른 개신교”를 산출하였다.17 이와같이 신학적인 토론이 너무나 불쾌하게 발전되었기 때문에 루터의 가장 가까운 동지였던 필립 멜란히톤(Philipp Melanchton)은 1560년에 자신의 죽음이 가까와오자 “신학자들의 맹위(猛威)”를 피할 수 있게 되어 오히려 기뻐하였던 것이다.18 (126.2)
 

흑사병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그 시체들은 마차로 마구 실어다 버릴 수밖에 없었다.
(126.3)
 루터교도들은 1577년에 최초의 루터파 신조인 “협약 신조”(Formula of Concord)를, 1580 년에는 86개의 소단위 루터교 영방 교회(領邦敎會)들과 8천여 루터교 목사와 교사들이 서명한 “일치 서”(Book of Concord)를 내놓음으로써 루터교도 사이에 딱딱한 평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제 루터교도들은 로마 가톨릭이 트렌트 공회의(Council of Trent)를 통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의 한정적인 교리적 신조를 갖추게 되었다. 루터 교회는 외관상 난공 불락의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꼭대기에 위치한 그리고 이상하리 만큼 냉랭하고 형식적이고 침체된 “사데 교회”가 된 것이다. (127.1)
 영국으로 시선을 옮겨보면 영국 교회 역시 시작 당시의 열정을 많이 상실하고 “39 개조” 라는 신앙 신조를 요새로 삼아 피난처를 높이 구축하고 있었다. (127.2)
 종교 개혁 제2의 지도자였던 칼빈의 추종자들은 장기간에 걸쳐 창조적인 힘을 발휘했다. 이 무리들이 중부 유럽에서는 개혁 그리스도교도(Reformed Christians)로, 프랑스에서는 유그노(Hnguenots)로, 영국에서는 청교도로 불리었다. 멀지 않아 청교도들은 장로교도와 회중(會衆) 교도(Congregationalists)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보다도 더 후에 미국에서는 침례교도로 알려진 그리스도인들도 청교도들이다. (127.3)
 이와같이 모든 개신교 운동이 처음에는 영웅적인 공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700년 대의 개신교 유럽은 종교 개혁자들이 마음속에 품었던 이상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지식인들은 부활과 재림의 신앙을 거부하고 합리주의자들이 되었다. 이리하여 계몽 시대(Enlightenment 또는 Aufklarung)라고 이상스런 명칭이 붙여진 시대가 전개되었다. 일반 사람들은 교회에 출석해서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신봉하면 족했다. 영국은 불경의 사회에 표류하게 되었다. 영국에는 1700년 대 초의 “일반 백성들의 오락이 조잡했고 문맹률이 높았으며 법적인 강권력이 야만적이었고 교도소들에는 질병과 불법 행위가 가득하였다. 영국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취태가 범람했다.”19 (127.4)
 만약 사데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종교 개혁이 시작되던 때 그들이 “받고 들은 것”(계 3:3)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그 이후의 교회 역사는 얼마나 달라졌을 것인가? (127.5)
 그러나, 사데 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깨어 있어 “합당한” “몇 명이” 있다. 하였는데(계 3:4) 이들은 누구인가? (127.6)
 상당 수의 루터교인들이 이 무리에 포함될 것이다. 파울 게르하르트(Paul Gerhardt; 1607~1676)는 아직도 교파를 초월하여 애창되는 여러 편의 깊이 있는 영적 찬미가들을 작사했다. 그 중의 하나가 “오, 거룩한 머리에 가시관 쓰셨네” 이다. 게오르크 프레드루 헨델(George Fredrick Hendel ; 1685~1759)은 “메시아” 를 작곡했다. 요한 세바스챤 바하(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은 전체 서방 교회의 예배를 풍요롭게 했다. 요하네스 벵겔(Johannes Bengel ; 1687~1752)은 탁월한 신약 성경 주석을 내놓았다. (127.7)
 퀘이커 파(派)를 창설한 평화주의적 종교 지도자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 도 빼놓을 수 없다.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와 그의 옥중 자서전인 “죄인 괴수에게 주신 넘치는 은혜”(Grace Abounding to the Chief of Sinners)를 통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파를 초월하는 감명을 끼친 침례교도 존 번안(John Bunyan, 1628~1688)도 그렇다. 도로시 트라스케(Dorothy Traske, 1640년경 사망)는 그리스도의 제칠일 안식일을 사랑한 까닭으로 16 년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127.8)
 필립 제이콥 스페너(Philipp Jacob Spener, 1635~1705)도 그리스도에 크게 공헌한 사람이다. 그는 소규모의 성경 연구와 기도 집회를 계속했다. 그의 “경건주의”(Pietism)는 지대한 감화를 끼쳤다. 부분적으로 스페너의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니콜라우스 폰친젠도르프(Nikolaus von Zinzendorf)는 그의 넓은 개인 사유지 헤른후트(Hermhut) 마을에 정착해 있는 모라비아 형제단(Moravian Brethren)을 지도했다. (127.9)
 루터교도들과 유대를 갖고 있던 이들 모라비아교도들은 하나님과 형제들 사이에 대단히 깊은 영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예수님의 재림이 있기 전에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시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존중하여 그들은 가장 어려운 선교지로 예컨대 남아프리카와 북극 같은 곳으로 그들의 형제 교우들을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이 지역들을 땅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1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