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와 칼뱅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마태복음 24:14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성취로 보았다. 성경 연구와 더불어 아우구스티누스나 히에로뉘 무스 때보다 더 순수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하나님의 하늘 왕국 도래를 위한 길을 마련한다고 생각했다. 루터는 온 세상의 회심을 기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말하기를 “나는 마지막 날이 멀지 않았다고 믿는데, 그 이유는 복음이 이제 마지막 노력을 다 쏟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단언하였다(Tischreden 5488). (1037.3)
 E. 종교개혁에서 19세기까지
 종교개혁 이후 대륙에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종말론적 이해가 발전하였다. 진보적인 개혁자들은 종말론에 대한 생생한 관심을 유지하였으며, 때때로 지상에서의 천년기에 대하여 극단적인 견해를 가지기도했었다. 멘노 시몬스(Menno Simons)는 후에 작성된 ‘메노나이트 고백’에서와같이 구주의 임박한 재림의 신앙을 견지했다. 한편 독일 루터주의자들과 경건주의자들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커다란 도전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확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렬한 개인적 신앙 체험이 그들의 경험적 특징이었다. (1037.4)
 영국 제도(諸島)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을 “청교도들이 발견한 성경의 핵심 기별 중 가장 중요한 성과로 여겼다.”(Ball, Advent Hope 132). 영국 성공회와 장로교회와 회중교회의 신학자들은 비록 천년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을 하였지만 재림이 임박하였다는 사실을 그들의 저술과 설교로 전파하였다. 이 소망의 영향으로 신자들은 그 큰 날을 선포하고 준비하며 살아야하였다(위의 책, 146-149). (1037.5)
 프랑스 혁명과 그 후에 일어난 전쟁들은 사회적, 정치적 및 종교적 결과를 초래했는데, 그로 인해 종말론적 기대감이 증대되었다. 예언 연구의 부흥이 전세계에 걸쳐 일어났다 예를 들어, 칠레 출신의 제수이트 회원인 마누엘 라쿤자(Manuel Lacunza)는 1790년에 〈메시아의 영광스럽고 장엄한 재림〉이라는 책을 익명으로 출간하였고, 스페인어로 된 이 책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런던에서는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 1792-1834년)이 1826년에 이 책을 제1차 올베리 예언 총회(Albury Prophetic Conference)의 보고서에 덧붙였다. 이 총회는 1826년에서 1830년까지 몇 차례에 걸쳐 개최되었는데, 여러 다른 교회들과 종교단체들로부터 온 성직자들이 재림의 임박성과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예언들 그리고 “이 문제들로부터 발생한 교회의 임무”를 연구하기 위해 모였다(PFOF 3:276). 1826년의 총회에 참석한 20명 중 하나인 요제프 볼프(Joseph Wolff)는 구미의 나라들과 중앙아시아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1847년에 있을 것과 예루살렘에서 천년 통치가 수립될 것을 가르쳤다. 스위스에서는 1837년부터 프랑수아 고상(Francois Gaussen)이 등장하여 다니엘의 예언에 관한 일련의 일요학교 강연을 하였다. 그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이 세계 역사를 보여 주며, 그 역사는 곧 끝날 것이라고 설파하였다. (1038.1)
 19세기 초에는 영국의 학자들로부터 스웨덴의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다양한 목소리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선포하였다. 라큰자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은 다니엘과 계시록의 예언을 통해 1900년대 중반까지는 세상이 끝날 것임을 확신 있게 보여 주었다. 미국에서도 그 기간에 “예언이 많은 종교적 사색과 활동의 원동력이 되었다”(위의 책, 4:85). 설교와 팸플릿과 서적들은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 오로지 천년기의 전조라고 선포하였다. 미국의 설교자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였는데, 그는 예수께서 1843년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저술과 설교를 통해 1831년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윌리엄 밀러와 밀러주의 운동에 관해서는, 재림 I. A-C; 세 천사의 기별 VI. G를 참조하라.) (1038.2)
 이 운동이 전통적인 신학자들로부터는 보편적인 환영을 받지 못했다. 스콜라 철학에서 생겨난 가톨릭신학은 비현세적인 종말론을 제시했으며, 그것은 주로 죽음과 심판, 천국과 지옥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Rast 501-503). 합리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하나님의 왕국이 ‘과학과 이성의 승리’라는 수단을 통해 지상에서 수립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따라서 19세기 후반부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에 대한 기대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1038.3)
 F. 현대
 1844년의 대실망 후에 재림을 믿는 신자들은 파루시아의 지연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이 문제는 오늘날 신학의 중심적인 이슈가 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재림이 성경에 그토록 명백하게 명시되어 있는데 왜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가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게 된 것이다. (1038.4)
 이 문제를 언급한 가장 두드러진 학자는 알베르트 쉬바이처(Albert Schweitzer)인데, 그는 우리가 초자연적인 시대에 돌입했는가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믿음과 우리는 이미 메시아 왕국의 기대 속에 살고 있다고 믿는 단순한 믿음으로 구분하였다(75, 90, 99). 슈바이처는 십자가의 사건이 이미 종말론적 대격변이며, 그것은 그 어떤 종말론적 기대도 끝낼 수 있다고 하였다. (1038.5)
 카를 바르트(Karl Barth)와 파울 알트하우스(Paul Althaus)의 변증 신학은 후에 에밀 브룬너(Emil Brunner)에 의해 계승되는데, 이 신학은 초월적 종말론으로 귀결된다. 이 학자들은 우주적 드라마의 역사적 절정을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에 두어야 할지를 모른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오심”도 모든 시간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1038.6)
 루돌프 불트만(Rudolph Bultmann)은 종말론과 역사의 비신화화(demythologizing)에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실존론적 종말론을 발전시켰는데, 이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재림은 복음의 진수를 선포하는 가운데 일어나며, 그것은 또한 듣는 이에게 믿음의 결단을 촉구한다고 하였다. (1039.1)
 C. H. 도드(C H. Dodd)의 실현된 종말론에 따르면 마지막 사건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속에서 일어났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종말적 개입은 이미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1039.2)
 또 다른 견해로,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은 희망의 신학을 제시했다. 미래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하며, 그것은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정치적, 사회적, 환경적 참여를 통해 가시적으로 성취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몰트만은 역사에 새로운 인간적 관점을 부가하였다 이 “희망의 신학”을 지지한 두드러진 신학자는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인데, 그의 종말론은 “최종적 미래”에 기초하며, 그것이 인류 전체의 운명과 개인의 삶으로서의 역사에 궁극적인 중대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최종적 미래”의 구체적인 내용은 오로지 비유적으로만 해석할 수 있으며, 예측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현재와 미래의 구분은 모든 사건의 영구적 합일 속에 허물어진다고 했는데(Pannenberg 81), 이는 판넨베르크가 어떤 면에서 몰트만의 견해를 공유했음을 시사해준다. (1039.3)
 오스카르 쿨만에 중점(Oscar Cullmann)은 성경에 중점을 둔 구원의 역사를 회복하였다. 역사는 과거, 현재, 미래 속에서 객관적으로 발전한다. 교회는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니”(not yet) 사이에 있으며, 이 시간은 복음의 기대와 선포 사이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쿨만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기다림의 과정에 있는 신자들에게 버팀목이 된다고 하였다. 신자들은 반드시 와야 할 무언가를 기대하면서 “아직”의 시간 속에 살아야한다. 믿음의 개인적 대면에 있어서 종말론적 의미를 감소시키는 것은 곧 믿음의 빈곤화를 뜻한다. 성경적 종말론은 육신의 부활뿐 아니라 만물의 회복과도 관계가 있다. (1039.4)
 G.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1844년의 대실망이 있은 지 오래지 않아서 재림을 믿는 신자들은 그날짜의 정확성은 여전히 확신했으나, 그 사건의 실체에 관한 그들의 실수에 대해서는 인정하였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여전히 미래의 일이고, 그들은 지체되는 시간 속에 살고 있으며, “깨어서” 그날을 기다려야만 했다(참조 눅 12:36, 37). 비록 몇 가지 문제에 대한 교리적 논쟁이 분란을 가져오기도 했으나, 구주의 임박한 재림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어떤 심각한 분열도 없었다. (1039.5)
 제임스 화잇(James White) 1850년에 〈애드벤트리뷰(Adventist Review)의 4가지 이슈들을 발간했다.그 다음 해에 새로운 저널 〈애드벤트 리뷰 앤드 새버쓰 헤럴드(Adventist Review and Sabbath Herald)가 발행되기 시작했다. 그 표제는 선구자들이 가졌던 소망과 확신이 어떠했는지를 증명해준다. 1851년에 엘렌 화잇(Ellen White)은 그 시간이 “비록 지체되기는 하겠지만 아주 조금 길어질 뿐”이라(초기문집, 58)고 기록하였다. (1039.6)
 아직 어리던 교회가 1860에 그 이름을 채택했을때 그 교명의 선택은 신자들이 가졌던 확신을 분명하게 반영해 주었다. 엘렌 화잇은 기록하기를 “제칠일 안식일예수재림교라는 명칭은 우리의 믿음의 특성을 눈에 띄게 나타내 준다”(교회증언, 제1권, 224)고 하였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초기 지도자들은 재림이 그들의 기별의 중심부에 있다는 강한 확신 속에 연합하였다. (1039.7)
 1889년 판〈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연감(Seventh-day Adventist yearbook)〉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은 천년기 후가 아니라 천년기 전에 있다.”라고 진술했다. 더 나아가서, 다니엘 8:14에 나오는 2300주야의 예언적 기간은 1844년에 끝나며, “재림의 때에 미치는 다른 어떤 예언적 기간도 없다”고 하였다. 이에 더하여 “다가오는 재림”을 설교하는 일은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세 천사의 기별로 상징된다고 하였다(148-150). (103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