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사도 시대
 역사가들은 예수 재림의 소망이 초기교회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별다른 이견이 없다. 신약의 가장 이른 저작들 중 하나인 데살로니가전서(4:16, 17)에 나타나는 용어들은 이 사실을 증명한다. 바울 서신들의 도입부에 나오는 감사의 말들 또한 초기교회의 신앙의 근간을 이루었던 파루시아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준다. 후기 서신들도 여전히 강한 종말론적 기대감을 견지하고 있다(벧후 3:8-13). 1세기의 끝부분에 있었던 위기의 시기에 기록된 요한의 계시록은 최후 심판의 영광스런 전망을 통해 신자들의 믿음을 지지하고 있다. (1035.1)
 그러나 심지어 1세기에도 거짓 가르침이 교회에 침투하여 신자들의 믿음을 위협하였다. 어떤 이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는 신앙을 포기하였다(고전 15:12), 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을 의심했으며(벧후 3:4),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이들도 있었다(요일 4:1-3). 신약의 기자들은 종말에 접근하고 있는 징조들을 보면서 이러한 경향에 대항하기 위해 씨름하였다(요일 2:18, 28; 벧후 3:3). (1035.2)
 B. 니케아 공의회 이전 시대
 어떤 학자들은 파루시아에 대한 교회의 열렬한 기대가 이미 신약 시대에 꺾이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증거로 신약의 몇몇 서신들에서 종말론적 언급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을 들고 있다. (1035.3)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2세기의 저자들의 증언에 의해 틀렸음이 입증된다(Landa 65-95). 파루시아에 대한 기대는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로마의 클레멘트는 고린도교인들에게 주님은 반드시 속히 오실 것이라고 상기시켰고(1 Clement 23), 〈디다케(Didache)〉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보낸 첫번째 서신에 기록한 종말론적 용어들로 풍부하며(16:3-8),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lgnatius)는 “마지막 때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썼고(Ephesians 11),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때를 신중하게 살펴야” 하였다(Polycarp 3). 〈바나바의 서신(Epistle of Barnabas)〉은 “모든 것이 악한 자와 함께 소멸될 날이 가까웠다. 주님은 가까우시고, 그분의 상급도 그러하다”(21:3)고 지적한다. 헤르마스의 목자(Shepherd of Hermas)는 그분의 오심에 대한 약속을 믿었다(Vision 3. 8, 9). 서머나의 폴뤼카르포스(Polycarp of Smyrna)과(에우세비우스의〈교회사〉3. 39에 인용된) 파피아스(Papias)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었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땅으로 오신다는 것을 기록하였다. (1035.4)
 변증자들은 선배들의 전례를 따랐다. 유스티노스 마르튀로스(Justin Martyr)는 선지자들이 두 번의 강림을 선포했다고 기록했다. 그 두 번째 강림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천사장의 호위를 받고 구름을 타고영광 중에 오셔서, 살았던 모든 자들의 몸을 일으키실 것이다”라고 하였다(Apology 1. 52). 이레나이우스(Irenaeus)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해 반박하는 글에서, 다니엘서 2장의 예언에 나오는 돌은 예수의 통치를 가리키며 그분의 날을 의미한다고 적용하였다(Against Heresies 5. 26). 3세기 초에 테르툴리아누(Tertullian)은 그리스도의 최종적 도래를 기대하였다(On the Resurection of the Flesh 22). 히폴뤼투스(Hippolytus)는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에 관한 논문(Treatise on Christ and Antichrist)〉에서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을 검토하면서 데살로니가 전서 4:13-17에 나오는 바울의 글에 묘사된 재림을 포함시켰다. (1035.5)
 그러나 이 시기에 기록된 다수의 글들에서 영혼불멸을 믿는 신앙으로 인해 종말론은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리스도인 저자들은,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Romans 1, 2, 6)고 믿는 헬라 철학의 사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에 대한 필요성을 더 이상 크게 느끼지 않게 되었다. (1035.6)
 오리게네스(origen)은 성경의 우화적 해석 방법을 통하여 종말적 사건들을 영적인 것으로 해석해 버렸다. 그는 구름을 타고 오시는 주님의 파루시아가 신자들의 영혼에 날마다 일어난다고 주장했다(Commentary on Matthew 50; 참조 PFOF 1: 317-320). (1036.1)
 3세기 초에 세상의 종말에 관한 문제는 그리스도인들, 특히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정치적 및 경제적 불안정과 더불어 박해로 인하여 신자들은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한 예언의 성취가 임박하였다고 믿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박해의 시련에 크게 영향을 받아서,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ea, 325)는 “거룩한 로고스께서∙∙∙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며” “거룩한 성경은 우리에게 죽은 자의 부활과 복수의 심판을 믿으라고 가르친다.”라는 신념을 견지하였다(Kelly 210). (1036.2)
 C. 니케아 공의회 이후부터 종교개혁 시대까지
 콘스탄티누스의 죽음 후에 곧바로, “지구는 현재 상태로서 예언된 왕국의 영토라는 사상이 생겨났으며”, “현재의 세대가 그 왕국의 실현의 때이며 인간의 손에 의한 지상 교회의 건립이 그 성취의 방식이라는 사상이 대두되었다. 따라서 교회의 계급적 통치가 실제로 예언된 그리스도의 지상 왕국”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PFOF 1: 373). (1036.3)
 이 새로운 사상이 일어나기까지 몇 가지 요인들이 작용하였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마제국에 의해 교회에 부여된 지원과 새로운 법적 지위였다. 이러한 정신과 조화되게 가이사랴의 에우세비우스(약 340년 경 사망)는 재림이 거룩한 왕국의 시작이 될 것이며(Proof of the Gospel 4. 15; 9,17), 이제 그리스도인 제국이 그 언쐐 관한 구약 예언들의 성취를 어느 정도 실현하고 있다(Commentary on Isaiah 19.18)고 공식적으로 가르쳤다. 이와 동시에 그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그리스도인 소망의 성취라고까지 격찬하였다(Life of Constantine 2.28; 3.1). (1036.4)
 예루살렘의 퀴릴루스(Cyril)는 “세상의 종말이∙∙∙박두했다”고 확신하였다(Catechetical Lectures 15. 12).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파루시아의 절박성은 더 이상 다른 교리들에 대한 신학적 논쟁만큼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1036.5)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전한 성경의 우화적 해석의 영향으로 튀코니우스(Tyconius, 4세기)는 재림으로부터가 아닌 그리스도교 시대로부터 일곱 번째 천년을 계수해야 한다는 개념을 제시했다(Landa 86).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354-430)는 튀코니우스의 개념을 기초로 삼아,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과 동일시되며,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교회에 임하심으로써 교회의 천년기 통치가 예수님에 의해 이미 시작되었다고 확증하였다(City of God 20. 5-9). 이와 동시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참되신 하나님의 온 교회가 신조로 믿고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하늘로부터 오실 것이며,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마지막 때 또는 종말의 때이며 거룩한 심판이다.”라고 단언하였다(위의 책, 20. 1). (1036.6)
 이탈리아의 고행자들과 단테의 〈신곡(The Divine Comedy)은 중세기 사상을 지배했던 지옥에 대한 두려움의 정도를 잘 나타내준다. “죄악의 사람” 또는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종말을 알리는 중요한 징조인데, 이 적그리스도는 황제나 선지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교회의 가시적인 우두머리라는 확신이 자라났다. 이러한 확신이 종교개혁의 누룩을 제공했다. (1036.7)
 D. 종교개혁 시대
 아우구스티누스(5세기) 이래 종말론적 기대는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거두는 승리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실패와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릇된 논지는 종교개혁을 불러왔다. 루터는 세상의 끝이 오기 전에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먼저 있을 것이며, 그것은 이미 교황을 통해 실현되었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징조”라는 견지에서, 루터는 재림이 멀지 않았다고 1522년에 진술하였고(Weimar Ausgabe 10/1, 2:95), 1532년에 있었던 좌담(Table Talk)에서는 재림이 “문 앞에 이르렀다.”라고 단언하였다(Tischreden 1291). 이러한 기대는 그의 신앙에 깊이 깃들인 확신 때문이었다. 루터는 재림을 하나님의 진노의 현현으로 보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그것을 행복한 날로 간주했으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교리가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었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그날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날이 속히 와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에서 벗어나고 육신적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기를 기도하였다(WA 41:37). 1537년에 한 마태복음 25장에 관한 그의 설교에서 루터는 다음과 같은 그림을 보여 주었다 “그분은 마지막 날에 천사의 무리와 함께 큰 권능과 영광과 위엄으로 오실 것이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심판일 것이며 모든 천사들의 옹위 속에 그분이 계신 모습은 형언할 수 없이 장엄한광경일 것이다.”(위의 책, 43:325). (1036.8)
 루터의 소망은 독일에서의 종교개혁을 활기차게 유지시킨 원동력이었다. 멜란히톤(Melanchthon)과 니콜라우스 헤르만(Nicholaus Herman)을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은 재림을 열렬히 믿었다. 대중에 의해 불린 그의 노래는 그 영광스러운 기대를 말해준다. (1037.1)
 이와 마찬가지로 장 칼뱅(John Calvin)도 그의 추종자들에게 “주님의 재림을 모든 사건들 중에 가장 행복한 사건으로 열망하라”고 권고했으며, 그리스도께서 “구속자와 구원자”로 오셔서 우리를 악과 불행에서 건져내어 그분의 복스러운 생명과 영광의 유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권면하였다(Institutes 3. 9. 5). 1545년에 칼뱅은 재림의 소망과 그에 따른 심판이 신자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단언하였다(Catechism of the Church of Geneva), 1560년에 그는 그의 〈기독교 강요(Institutes)〉에서 두 문단을 할애하여 기록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은 당신의 백성에게 호의적인 심판을 선언하실 것이라고 단언하였다(1.16. 18). 칼뱅은 또한 부활의 약속과 재림을 연결시켰다(3. 25.1-4). (103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