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라이트(Bob Wright)와 오그레이디 대위의 F-16 비행편대는 유엔의 비행 금지 구역 유지를 위해 보스니아 상공을 비행하고 있었다. 오그레이디 대위의 전투기는 지상에서 발사된 SA~6 지대공미사일에 명중되어 두 동강이 났다. (116.1)
 라이트는 오그레이디 대위의 조종석이 분리되어 산산조각난 비행기의 불덩어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았으나 조종석이 구름 아래로 빨리 추락했기 때문에 조종사가 탈출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당신이 동료 조종사를 잃을 때에 자신의 일부가 그와 함께 떨어져나간 것 같을 것입니다.” (116.2)
 라이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는 오그레이디 대위가 추락한 지점을 표시했으나 오그레이디 대위가 아직 살아있는지는 알수 없었다. 그가 살아있다 해도 라이트는 보스니아에서 동료 조종사를 탈출시키기 위해 자신의 F-16 전투기를 착륙시킬 수는 없었다(Time, 1995. 6. 19. 22). (116.3)
 최선을 다했는데도 그것으로 중분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좌절한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자신 때문에 일어났을 때는 더 좌절할 것이다. 그리고 좌절감과 함께 죄책감까지도 느끼게 될 것이다. (116.4)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빼앗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빼앗은 것을 다시 돌려줌으로써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할수 있는 일을 할 수가 있고 또 해야만 한다. (116.5)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당신이 저질렀던 일에 대한 과실은 여전히 남아있다. 당신은 잘못을 되돌리기 위해서 몇 배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신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속건제에서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할 수가 있다(레 5:14~19; 7:1~7). (117.1)
 속건제는 기본적으로 번제단에서 행해졌던 속죄제와 어느 정도 닮은 면이 있다(참고 레 7:1~7; 4:22~35). 그러나 속죄제와는 다르게 속건제는 “음식 헌물”(7:5)이라고 불렸다. 이것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속건제를 드리기 전에 이미 문자적으로 특정 금액의 빚을 갚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행된 보상/배상은 전체 손실액의 총액에 20%를 벌금으로 더해 속건제를 드리는 사람이 해를 끼친 대상에게 지불하였다. 보상과 배상은 죄인이 신성한 어떤 것을 잘못 다루었을 경우에 그 대상은 하나님일 수도 있었고(5:16), 죄인이 거짓 맹세로 인해 해를 끼친 다른 사람이 그 대상일 수도 있었다(6:5). (117.2)
 다른 종류의 제사들도 죄를 속하는 것이었지만 속건제는 특별히 신성모독이 포함된 죄로 거룩한 것을 잘못 사용하는 것에 대한 죄를 다루는 것이었다. 속건제는 세 가지 종류의 죄를 속했다.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어떤 것을 잘못 사용하는 죄(레 5:14~16), 죄인이 부지중에 범한 죄(17~19절),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오용한 거짓 맹세가 포함된 사기죄이다(6:1~6). (117.3)
 여기서 부지중에 범한 죄는 신성모독죄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한 죄는 값비싼 가축이었던 수양의 희생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117.4)
 죄를 지은 줄 몰랐던 사람에게는 최대 가능치의 책임이 있었다. 이것은 내가 동료 교수와 함께 시카고에 있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차를 운전하고 가는 동안 동료와 깊이 있는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하다 고속도로의 톨게이트를 지나면서 통행권 뽑는 것을 잊어버렸던 때와 유사하다. 유료 고속도로에서 내가 얼마만큼 먼 거리에서 왔는지 알려주는 티켓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최대 금액의 통행료를 지불해야만 했다. (118.1)
 속죄제의 피가 단 뿔들에 발라졌던 것과는 달리 번제나 화목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속건제물의 피는 번제단 사면에 뿌려졌다(레 7:2). 속건제에서는 희생 제사를 드리기 전에 이미 문자적으로 빚을 갚는 일이 선행되었기 때문에 죄를 속하는 피의 중요성이 더 적었다. 속죄제가 어떤 특정한 값이 매겨질 수 없는 하나님께 대한 죄들을 속하는 것이기에 속죄제에서는 속죄가 더욱 크게 강조되었다. 그런 경우에는 빼앗았거나 오용된 것에 비슷하게 돈이나 물건으로 갚음으로 이루어지는 보상이 없었다. (118.2)
 왜 실질적으로 빚을 갚은 것 외에 부가적으로 속건제를 드리도록 요구되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최대한 잘못들을 바로잡기 위해 이 땅에서의 최대의 책임을 질지라도 죄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의 속전으로 갚아져야만 하는 빚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로 우리가 진 빚을 갚는 일에 충분할 수 없다. 우리의 배상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배상은 그리스도의 무한한 희생에 비하면 보잘 것 없고 하찮은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으로 우리가 잘못한 일들을 바로잡음으로 하나님과 협력해야한다. 그러나 용서와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이다. (118.3)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골동품 도자기를 깨뜨렸다고 가정해 보자. 깨어진 조각들을 주워서 그 주인에게 가져갈 수는 있어도 그 도자기를 복원시킬 수는 없다. 오직 복원 전문가가 복원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전문적인 노동에 비싼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우리가 부자가 아니라면 그 복원비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의 죄는 우리가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망가뜨린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필요하다. 그분은 우리가 깨뜨린 것들을 회복시키시고 우리 자신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미친 그 영향까지도 고치신다. 그분은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완전히 다시 회복시키실 수가 있다. (119.1)
 속건제는 우리가 오늘 적용할 수 있는 세 가지 원칙들을 제시한다. 첫째, 우리는 거룩한 것들을 취급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한 책임이 있다. 우리가 십일조나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들과 같이 거룩한 것들을 잘못 사용했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잘못 취한 것을 되돌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그 이상의 것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손해의 총액을 합한 원금에 20%의 벌금이 추가되었고 가장 비싼 가축이었던 수양 한 마리를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레 5:15~16).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께 속한 것을 착복하는 것이 심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면 하나님께 드려진 돈의 일부를 부정직하게 간직하고 있다 죽임을 당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행 5:1~11). (119.2)
 또 다른 한 가지 원칙은 우리는 동료 인간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레위기 6:5~6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쳤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기 전에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먼저 보상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119.3)
 예수님께서는 이 원칙을 산상설교 중에 적용하셨다. (120.1)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120.2)
 우리의 온 힘을 다해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잘못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무에 대해 파산선고를 해버리는 듯한 “값싼 은혜”가 아니다, 삭개오는 이런 노력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 19:8). (120.3)
 세 번째 원칙은 우리의 죄책감을 예수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왜 자신들이 죄책감을 느끼는지도 모르면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 죄책감들은 그들의 자신감을 다 갉아 먹어 버리고 그들을 깊은 절망으로 떨어뜨린다. 레위기 5:17~19은 이스라엘에게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었다.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 수양을 속건 제물로 제사장에게로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부지중에 그릇 범한 허물을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17, 18절). 이런 상황에서 사전 보상이 요구되지 않았던 이유는 보상해야 할 총액을 몰랐기 때문이다. (120.4)
 심지어 그들이 어떻게 죄를 지었는지를 몰랐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그분께 속건제를 드림으로써 그들의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