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요한복음 제III부 예수께서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심 (5-12) 제 10 장 메시야가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줌 (10:22-11:57)
 이 이야기의 배경은 앞에서 살펴본 부분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하심으로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끊임없는 적의에 시달리셔야 했다(10:33). 그분은 예루살렘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으로 물러나서 다소간의 긴장을 완화시켰다(40절). 그러나 독자들은, 종교 지도자들로 하여금 예수를 제거하도록 자극시킨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최종적인 도발 행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예수와 유대인 통치 협의회 사이의 험악한 관계에 마지막 불 지피기가 되었다. (236.1)
 11장에서 관건이 되는 진술은 4절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에 의하면 나사로의 질병과 죽음의 목적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이 그것으로 인해 영광을 받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예수와 그의 아버지의 성품은 이 이적이 생명을 주고 자비를 보여주는 두 분의 능력을 말한다는 점에서 영광을 받게 되지만, 예수께서는 또한 나사로를 살려주신 이적이 그분의 고난과 죽음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영광을 받으신다(53절). 영광을 받으신 목적은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이 믿게 되는 것이다(15, 40절). (236.2)
 문단의 배경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라는 이름이 포함된 무덤이 베다니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이 이 문단 속에 나오는 세 명의 인물의 실제 무덤인지는 절대적으로 확실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단순히 우연의 일치인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마도 매우 부유한 가족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이 가정에는 애곡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19절; Talbert, Reading John, 173]). 적어도 이 괄목할 만한 발견은 요한복음의 역사적 정황이 기본적으로 정확하다는 것을 확증하는 증거이다. (236.3)
 그 당시 일반적인 유대인의 신앙에 따르면, 개인의 영혼은 부활이 있을 것을 바라면서 3일 동안 육체 위를 배회한다고 믿었다. 그 이후에는 부활의 희망이 전혀 없었다(Talbert, Reading John, 172). 예수께서 이틀을 지체하신 결과(6절), 나사로를 일으키신 것은 죽은 지 만 나흘이 되는 때였다(17, 39절). 그가 좀 더 일찍 왔더라면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것은 단순히 다른 치료 이상으로 아무런 흥미를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지체는 예수가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확증해 주었다(25, 26절). (237.1)
 문단의 세부 사항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을 언급한 것(2절)은 이상하게 보이는데, 이것은 이 이야기가 다음 장에 가서야 나오기 때문이다(12:1-8). 분명히 저자는 그 이야기가 애초의 청중을 이룬 제2 세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알려져 있음을 알고 있었다. (237.2)
 예수께서 이틀 동안 지체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일차적인 이유는 그분이 이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지시가 없이는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다. 그가 가야할 때가 되면 아버지께서 어떤 식으로든 예수께 알려주실 것이다(4:34; 7:1-9). 그와 같은 알림의 한 예증을 12:20-24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그를 뵙고 싶다는 헬라인의 요청에서 그의 고난과 죽음의 시간이 이르렀음을 알려 주는 암시를 인식하셨으며, 그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끌 것이었다(32절). (237.3)
 예수께서 그가 나사로에게 가려 한다고 하시자, 제자들은 예루살렘 지역에서 그에게 돌을 던지려 한 최근의 사건을 그에게 상기시키면서 항의했다(10:31, 33). 제자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시면 이는 마지막 여행이 될 것이라고 느낀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대답은 그가 세상의 빛임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9, 10절; 참고 9:4, 5; 1:4; 3:16-21). 그가 그의 아버지의 지시를 따를 때 잘못 갈 수 없었던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의 빛 안에서 걸을 때 잘못 갈 수 없다. (237.4)
 이어지는 문단(11-16절)은 죽음과 잠 사이의 히브리적 유비(analogy)에 대한 분명한 예증이다. 여기서 “잠잔다”는 헬라어 단어들 중의 하나인 휘프노스(hypnos)는 최면술(催眠術, hypnotism; “사람을 잠들게 하기”)이라는 단어의 어근이다(어떤 사람들은 오늘날 교회에서 최면술이 많이 행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이 문단에서 도마는 의심쟁이로 보이지는 않는다. 예수께서 곧 죽게 되신다면, 도마는 그분과 함께 죽을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었다! 실제로 요한복음에서 진짜 의심쟁이는 빌립이었다(6:5-7; 14:8-11). (238.1)
 17절은 예수께서 나사로가 나흘 동안 죽어 있도록 하기 위해 베다니에 도착하는 일을 고의로 지체하신 것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비록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죽은 정확한 시각을 알고 있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238.2)
 예수께서는 바로 베다니로 들어가지 않고 마을 밖에 머물면서 자신이 왔다는 말씀을 전하셨다. 마르다는 그를 만나러 나갔으나 마리아는 집에 머물러 있었다(20절). 아마도 마리아는 예수께서 자신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오지 않으신 것에 상처를 받은 연약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3절). 아마도 그녀는 예수께서 참으로 관심을 베풀고 계시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나가서 그분을 뵙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238.3)
 마르다는 그와 같은 불안이 없었기에 실망의 표현을 부드럽게 한 후, 곧 예수께 대한 자신의 믿음과 신뢰를 표현하면서(21, 22, 24절), 그분에게서 가장 감동적인 자기 확증들 중의 하나를 이끌어내었다(25, 26절). 이에 답하여 마르다는 이 복음서 전체에서 가장 심오한 표현들 중의 하나, 즉 베드로의 신앙 고백(6:68, 69)보다도 우월한 고백을 하고 있다(27절). 이 표현이야말로 이 복음서의 기자가 독자들에게서 이끌어내기를 추구하던 것이다(20:30, 31). 그리하여 누가복음 10:38-42에서 영원히 부엌일만 맡겨진 것처럼 보이던 마르다가 이 복음서에서는 성숙한 신앙과 제자도(弟子道, discipleship)에 대한 가장 명쾌한 귀감들 중의 하나로 두드러지게 되었다. (238.4)
 마리아는 그렇지 못했다. 마침내 마리아가 예수의 각별한 요청을 받고 나왔을 때(28절), 그녀는 마르다의 불평을 반복하였으나 믿음을 견지함에 대한 어떠한 확증도 보여주지 않았다(32절). 그 결과, 그녀는 예수로부터 아무런 계시도 받지 못하였고(비교 25, 26절), 예수께서는 그녀에게서 아무런 신앙의 고백도 이끌어내지 못하셨다(비교 27절). 대신에 그분은 그녀의 믿음 없음과 그녀와 함께한 사람들에 대한 믿음의 부족에 대해 속으로 통분히 여기셨다(33-37절). 마리아의 진술이 믿음의 부족을 드러낸다는 것은 33절과 38절의 예수의 반응과 그와 같은 반응을 야기시킨 진술들을 대조해 보면 분명해진다(32, 37절). 예수께서는 오셔서 그들이 부활과 생명을 목격하도록 초청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이 제공하셔야 할 것을 기다리는 대신에, 그분이 오셔서 죽음 즉 나사로의 무덤을 보도록 초청하였다(34절). (239.1)
 요한복음 11:26은 많은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예수께서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도 보다시피 믿는 자들도 언제나 죽어가고 있다. 이것은 몸은 죽지만 영혼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산다는 뜻인가? 여기가 바로 11-16절에서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 사이의 대화가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곳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믿는 자들이 죽는 죽음은 실제로 죽음이 아니다. 이는 잠자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시적인 것이다(11-14절). 비록 믿는 자들이 나사로처럼 잠은 잘 것이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239.2)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면 누구에게나 생명을 주실 수 있다(5:21-29). 흥미로운 것은 살아서 그분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산다는 것이다(11:26).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믿는 자들은 잠들 것이지만 참으로 영원히 죽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로부터 영적 생명을 받은 자들은 부활시에 육신의 생명을 보장받는다. (239.3)
 21-27절에서 마르다의 믿음은 찬란히 빛나고 있지만, 그녀는 바로 눈앞의 상황에서(39절) 예수의 “나는 ... 니라”(“I AM”) 진술(25, 26절)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녀가 요청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 위로, 그것을 초월해 있는 어떤 것, 즉 종말 시기의 충만함을 예표하는 한 이적을 행하러 오신 것을 보지 못한다고 그녀를 부드럽게 꾸짖으셨다(40절). 예수께서는 눈을 뜨신 채로 머리를 들고 기도하셨다(41, 42절; 성경은 기도의 특정 자세가 다른 것 보다 더 좋은 것이라는 지시를 내리고 있지는 않다). 그는 나사로를 만지거나 무덤에 접근하지도 않으셨다(43절—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 부르”셨다). 그의 말씀은 그의 접촉만큼이나 좋은 것이다. (240.1)
 일어난 결과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이적이었다(44절). 나사로는 나흘 동안 죽어 있었다. 그 이적의 실체는 적의를 품고 있던 목격자에게도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47절). 이 이적을 묘사하면서 요한은 5:28, 29의 약속을 이행하시는 예수를 분명하게 나타냈다. 죽은 자는 무덤에 있었고(11:17; 참고 5:28), 그는 예수의 음성을 들었고(11:43; 참고 5:28), 그리고 그는 무덤에서 나왔다(11:43; 참고 5:29). 이것이 바로 “부활”“생명”이신 분께서 죽음과 접촉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11:25, 26; 참고 5:21-30). (240.2)
 문단의 주요 주제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