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요한복음 제III부 예수께서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심 (5-12) 제 10 장 메시야가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줌 (10:22-11:57)
 이 장에서 다루는 내용은 자연스럽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수전절(修殿節, Feast of Dedication) 동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 경내를 방문하신 것이다(10:22-42). 예수께서는 하나님에 의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자신의 헌신에 대해 말씀할 기회를 가지신다(36절). 그 다음 부분(11:1-44)은 그리스도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맛보기가 되는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놀라운 이적에 의해 예수께서는 자신이 진실로 부활이요 생명(25, 26절)임을 증명하셨다. 하지만 바로 이 이적은,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에 대한 그분의 영향력을 너무도 결사적으로 막으려 했기 때문에, 민족이 멸망당하는 것을 막는다는 생각으로 예수를 죽이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게 만드는 상황을 제공했다(45-47절). (228.1)
 ■ 말씀에 들어감
 10:22-42를 적어도 두 번 읽은 후에 다음의 질문들에 대답하라: (228.2)
 1. 이 문단을 요한복음 7-8장에 나오는 예수의 성전 방문 기사와 비교하라. 두 이야기 사이의 공통적인 사항들을 모두 찾아 적어 보라. (229.1)
 2. 이 문단에서 예수와 유대 종교 지도자들 사이의 주된 문제를 간단히 요약해 보라.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예수께서 하신 대답을 한 단락으로 요약해 보라. (229.2)
 3. 5:16-476:35-58에서 발견되는 예수와 그의 답변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비판과 지금 살펴보고 있는 문단인 10:22-42를 비교해 보라. 앞의 사건들과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사건 사이에서 그대가 발견할 수 있는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229.3)
 문단의 구조
 이 본문은 수전절 동안에 있은 예수의 성전 방문이 남긴 많은 메아리들을 담고 있다. 이 사건들이 모두 성전 경내에서 일어났다(참고 7:14, 28). 전경(前景)에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그분과 토론하고자 서 있었다(참고 8:25, 53). 일차적인 문제는 예수의 메시야 자격에 대한 의문이었다(참고 7:26, 31, 41, 42; 9:22). 다시 한번 그분을 체포하고 그분에게 돌을 던지려는 시도가 있었다(참고 7:30, 32, 44-46; 8:59). 예수께서는 다시 그의 아버지와 고유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셨다(참고 7:16, 17, 28, 29, 33; 8:16-19, 26-29, 38, 42, 49, 50, 54, 55). (229.4)
 이 문단은 두 개의 기본적인 문제 주위를 맴돌고 있다. 즉 예수가 메시야인지의 여부(24절)와 그가 하나님과 고유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그의 주장이 신성모독이라는 유대인의 고소(33절)이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25-30절에 있다.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은 그분을 처형하기 위하여 돌을 들어 치려는 것이었다(31절). 그들이 신성 모독의 죄로 인하여 처형을 계획했다고 합리화하자(33절), 예수께서는 그것에 대하여 상당히 길게 대답하셨다(34-38절). 그분을 체포하려는 시도가 한 번 더 있은 후에 그분은 그곳을 빠져나와서, 전에 침례자가 전도하였고, 그분이 좀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요단 강의 다른 편으로 돌아가셨다(39-42절). 이와 같은 이야기의 결말로 이 복음서에서 유대교의 절기와 관련된 예수의 활동에 중심을 둔 부분이 끝나게 된다(5-10장). (229.5)
 문단의 배경
 수전절(오늘날에는 하눅카[Hanukkah]라고 불린다)은 구약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지 않다. 이것은 수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후 몇 년이 지난 B.C. 165년에 그 성전의 재봉헌을 경축하는 것이다. 안티오쿠스가 한 일들 중에서 몇 가지만 열거하자면, 성전 제단에 돼지를 희생 제물로 드렸고, 안식일 준수를 금지하였고, 많은 유대인들로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했다. 마카베오 왕조 이후로 유다 마카베오(Judas Maccabaeus) 지도하의 유대 게릴라들이 예루살렘을 안티오쿠스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들은 성전의 정결과 재봉헌을 유대교의 연례 절기로 경축하도록 했다. 비록 이것이 성경적인 기원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예수께서는 이 절기에 참석하심으로 확고한 정통성을 부여하셨다. (230.1)
 그러나 성전 봉헌이란 개념은 성경적 기원을 가지지 못했다. 광야에서 모세의 지도 아래 회막을 봉헌할 때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셨다(출 40:34, 35; 민 7:1-11). 민수기 7장은 모세의 글 중에서 수전절 동안에 주로 낭독하는 장이 되었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마쳤을 때, 비슷한 봉헌식이 거행되었는데,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친히 현현(顯現)하셨다(왕상 8:1-11, 62-65; 대하 7:1-9). (230.2)
 바벨론 유수 후에 스룹바벨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무너진 솔로몬의 성전(대하 36:18, 19)을 대신하여 전보다 더 초라한 성전을 세웠다(학 1:12-2:9). 이 건물의 개막도 역시 봉헌식으로 경축되었다(스 6:13-18). 비슷한 예식이 거의 100년이 지난 후에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예루살렘 성벽의 완공을 경축하기 위해 거행되었다(느 12:27-47). 그래서 마카베오 지도하의 봉헌식은 결국 연례적인 수전절로 발전되었는데, 이는 분명히 전례가 없던 일이 아니다. (230.3)
 신약에서 봉헌의 개념 또는 언어는 성전에서 있었던 아기 예수의 봉헌(눅 2:22, 23), 예수의 침례(마 3:13-17; 눅 3:21, 22),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요한복음 10장의 장면, 그리스도의 승천시에 하늘 성소에 들어가심(히 10:19, 20; 계 4, 5), 요한계시록에서 진노의 일곱 대접을 쏟기 전에 하늘 성소의 봉사가 종료되는 것(15:5-8; 16), 그리고 새 예루살렘이 지상에 시작되는 일(계 21:1-8, 22)과 연관되어 사용되고 있다. (231.1)
 문단의 세부 사항
 수전절은 보통 겨울이 시작되는 12월에 있다(10:22). 이 때의 팔레스타인의 날씨는 유럽의 11월과 아메리카 대륙의 북반부와 매우 비슷하여 추우면서도 종종 비가 내린다. 동쪽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이 자주 예루살렘에 불어닥쳤다. (231.2)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솔로몬의 행각(行閣)이라 불리는 성전 지역을 거닐고 계셨다(23절). 이는 시기적으로 부합되는 것인데, 왜냐하면 솔로몬의 행각은 성전 건물이 동쪽 벽을 따라 기둥으로 받쳐진 지붕이 덮인 보도(步道)였기 때문이다. 행각은 매서운 동풍을 막아주는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고, 맑은 날의 오후께는 햇빛으로 따뜻하게 덥혀지곤 했다. (231.3)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둘러싸고 “그리스도[메시야]여든 밝히 말하시오”(24절)라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대답을 요구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란 말은 너무 독창적이면서도 정확한 번역이다. 헬라어 숙어를 대충 직역하면 “당신은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의 영혼을 들어올리고 있을 것입니까?”이다. 이 질문은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의 이야기(8:3-6)에서와 마찬가지로 고의적으로 함정을 곁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수전절은 이미 200년 전에 외국의 압제에서 유대인이 해방된 것을 경축하는 것이었기에 이 절기 동안 로마로부터의 해방이 다시 일어나게 되리라는 희망을 북돋아 주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로마인들은 메시야라는 주장에 대해 평상시보다 더 민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질문의 의도는 로마인들이 예수께 대해 경계심을 가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231.4)
 예수께서는 이미 소경으로 태어난 자를 치유하는 것과 같은 자신의 행위를 통하여 그들의 질문에 답하셨지만(10:21), 그들은 그분의 양이 아니고, 따라서 그분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25-27절). 26절과 27절에서 예수께서는 이 장의 초반부에 있는 선한 목자에 관한 토의(3-5, 14-16절)를 언급하셨다. 28절은 영생이 예수와의 관계를 통하여 현실이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공통적인 주제를 다시 반복하고 있다. 이것은 그분과 아버지가 전적인 조화를 이루어 일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28-30절). (2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