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와 로마 군대 제4장 그리스도교 군복무관의 체제화 A. 그리스도교 병사 콘스탄티누스의 등장과 그리스도교 군복무관의 새 시각
 A.D. 306년 7월 25일에 서방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투스인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가 요크에서 사망하자 그의 군대는 곧바로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를 아우구스투스 곧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서방 통치의 구상에 대한 일대 타격이었다. 이제 로마 제국의 주인은 향후 5년에 걸친 내전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1.1)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원려(遠慮)와 심모는 아우구스투스로 선포된 이후의 처신에서부터 역력히 나타났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관할지역 내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공적으로 종식시키는 칙령을 반포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박해 이전의 사회적 신분과 특권을 회복시켰다.1 이같은 그의 정치적 제스츄어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신민들에 대한 입법권을 주장한 것이었다. 이 때까지 내려 온 사분통치(四分統治)의 전통으로부터 자신의 통치를 단절시키는 일대 과업을 단행한 것이었다. (192.1)
 뿐만 아니라 제국의 도처에서 박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해방자로 자신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는 이미 요크로 떠나오기에 앞서 갈레리우스의 궁정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그리스도인 박해를 지켜보았으며 그리스도교회는 대박해로 말미암아 치명적으로 쇠약해지기는커녕 유세비우스가 주장했듯이 명목상의 교인들을 추려냄으로써 더욱 강력한 단체로 단련되고 있음을 간파했을 것이다.2 (192.2)
 그는 또 휘하 군대에 의해 아우구스투스로 선포된 후에 선임 아우구스투스인 갈레리우스(Galerius)에게 자신의 아우구스투스 직위에 대한 추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갈레리우스로부터는 아우구스투스의 직위에 올라야할 사람이 콘스탄티누스가 아니라 세베루스(Severus)이며 콘스탄티누스에게는 카이자르 즉 부제(副帝)의 직위가 정당하다는 회신이 돌아왔다.3 콘스탄티누스는 이러한 결정에 복종했다. 그는 자신의 권력 기반 너머로까지 야망을 밀고 나가는 만용을 결코 범하지 않았다. 그런데 앞서 갈레리우스가 세베루스를 카이자르로 임명했을 때부터 크게 무시당해 왔다고 생각하는 막센티우스(Maxentius)가 아우구스투스의 지위를 요구하고 나섰다. 마침내 그는 306년 말 세베루스의 부재를 틈타 집정관 근위대에 의해 아우구스투스에 옹립되었다. 콘스탄티누스가 북쪽에서 은인자중 기회를 엿보는 사이에 처음에는 세베루스가, 그 다음에는 서방 제국의 아우구스투스 직에서 은퇴했다가 다시 아들 막센티우스로 부터 제위권을 회수하려고 나섰던 막시미아누스가 차례로 죽음을 맞았다. (192.3)
 콘스탄티누스는 신중했을 뿐이지 가만히 앉아 있지는 않았다. 서방 제국에서의 우위를 점하려는 그의 첫 시도는 아프리카의 알렉산더로 하여금 막세티우스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긴 사건일 것이다.4 콘스탄티누스는 이렇게 함으로써 로마에 대한 옥수수 선적을 위태롭게 하려했던 것이다. 311년에 이르러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와 맞서 결판을 보던지 아니면 앉아서 자신의 파멸을 기다리든지의 양자택일을 결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서방 제국 내의 이같은 세력 각축은 동방 제국 내의 세력각축과 연계되었다. 곧 로마제국의 내전은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가 한 편이 되어 막센티우스와 막시미누스 다야의 진영에 대결하는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휘하 병력의 대부분을 라인 변경지의 수비를 위해 남겨둔 채 4, 000명 미만의 병력만을 이끌고 알프스 산을 넘었다.5 그는 투린, 밀라노, 베로나를 차례로 함락하고 312년 10월 26일에는 로마 성 밖 밀비아 교(橋) 맞은 편에 진지를 구축하였다.6 10월 28일 막센티우스 군대가 로마 성내의 농성을 풀고 티베르 강을 건너 콘스탄티누스의 군대와 대치하고 보니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십자 군기와 십자가 상징의 방패를 갖추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락탄티우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와 접전하기 전날 밤 꿈에 휘하 병사들의 방패에 “하늘의 표지”를 부착케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7 그리고 결국 밀비아 교(Milvian Bridge) 전투는 이 “하늘의 표지”로 말미암아 콘스탄티누스 군의 승리와 막센티우스의 멸망으로 끝났다는 것이다. (193.1)
 그동안 밀비아교 전투에 관련된 사건들을 둘러싸고 다각적인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두 개의 특징적 사항들이 집중적으로 분석되었다. 하나는 콘스탄티누스가 경험했다는 환상(Vision) 사건이며 또 다른 하나는 병사들의 방패에 새겨 넣도록 지시 받았다는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유세비우스의「교회사」에서는 콘스탄티누스가 보았다는 환상에 대해서도, 그리고 하늘에 기록되었었다고 하는 그리스도의 상징 문자에 대해서도 그 설명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이 환상 사건의 진정한 기적은 이 기적을 둘러싼 상대적인 침묵 속에 놓여 있다고 한 맥물렌(Macmullen)의 주장이 옳을지 모르겠다.8 유세비우스는 그가 콘스탄티누스로부터 직접 그 사건에 대해 증언을 들었다고 하는 시기9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338년에야「콘스탄티누스의 전기」를 통해 이 사건을 보도했다.10 (194.1)
 락탄티우스의 보고와 유세비우스의 보고를 비교해 볼 때 하나의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만약에 그 환상 사건이 실지로 발생한 것이라면 그 환상에 대한 설명은 상당히 변질되어 결국 오늘날에 전해지고 잇는 것의 형태로 꼴 지어졌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락탄티우스의 설명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꿈에 본 것으로 되어있는데11 유세비우스의「콘스탄티누스 전기」에 의하면 하늘의 지는 태양 위에 십자가가 나타났고 “이것으로 정복하라”는 명문이 십자가 밑에 기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12 뿐만 아니라 이른 오후에 콘스탄티누스 휘하의 전군이 그 환상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유세비우스는 이 사건이 정확히 언제, 어디서 발생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암시를 주지 않았다. (195.1)
 T. D. 반즈(Barnes)는 이 사건이 콘스탄티누스의 군대가 알프스를 횡단하던 시기에 하늘의 해무리(solar halo)의 형태로 발생했을 것이라 했으며13 베인즈(N. H. Baynes)와 존즈(A. H. M. Jones)는 남부 잉글란드에서 성층을 이룬 얼음 수정(stratospheric ice crystals) 속에 태양이 비추었을 때 태양의 모습이 십자가의 형상으로 나타났다는 사례를 제시하였다.14 존즈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장하기를 당시 힘든 전투를 계속해서 치르느라고 지쳐있던 콘스탄티누스의 상상력이 태양숭배와 십자가 숭배를 융합시켰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장식 없는 십자가가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일반화된 것은 A.D. 5세기 이후부터였기 때문에 그 당시에 십자가를 그리스도교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도 있다.15 (195.2)
 이런 이유 외에도 유세비우스가 자신의「교회사」에서는 일언반구 언급을 않다가 문제의 당사자이며 또 유세비우스 자신의 주장에 대한 유일한 증인이기도 한 콘스탄티누스의 사후에야, 그것도 역사서라기보다는 일종의 송사(頌詞)에 가까운「콘스탄티누스의 전기」에서 환상 사건을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에드워드 기본(Edward Gibbon)을 위시해 수많은 학자들이 그 보도의 신빙성을 의심해왔다.16 (196.1)
 그렇다고 해서 락탄티우스의 보도가 이의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다. 락탄티우스는 당시 콘스탄티누스와 경쟁적으로 그리스도교 후원자의 이미지를 선전하고 있던 리키니우스(Licinius)에게도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꿈 이야기를 관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17 즉 밀비아 교 전투가 끝난 지 얼마 안되는 313년 5월 1일, 막시미누스 다야(Maximinus Daia)와의 운명을 건 결전의 전야에 한 천사가 리키니우스의 꿈에 나타나 전체 장병들에 가르쳐야할 유일신교적인 기도문을 전해주었으며 결국 리키니우스는 그 기도의 능력으로 막시미누스 다야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모로우(J. Moreau)에 의하면 락탄티우스는 아직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두 사람 중 누가 최종적으로 그리스도교회의 영웅으로 판결될지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정치 권력자 두 사람 전부에게 그리스도교 신의 은총을 선사하고 있었던 것이라 하였다.18 (196.2)
 뿐만 아니라 락탄티우스에게는 황제의 송덕작가(頌德作家)들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태양 숭배를 연결시키고 있던 사건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재구성했을 여지도 있다. 라틴 송덕문(Panegyriques Latins) 자료에서도 콘스탄티누스의 환상 사건이 보도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사건이 태양숭배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콘스탄티누스가 310년 마실리아(Massilia)로 행군하던 도중 갈리아 지방의 한 아폴로 신전에 참배했는데 그 때 콘스탄티누스가 아폴로 신(神)이 자신에게 전쟁의 승리와 장수를 약속하는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다.19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이교도들이 그리스도교적 환상을 이교적으로 재해석했다는 주장도 가능하며 실지로 알핼디(Alfőldi)는 그같은 주장을 펴고있다.20 (197.1)
 반즈(Barnes)는 문화의 신이며 동시에 아우구스투스의 수호신이기도한 아폴로 신과 콘스탄티누스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한 이 기사의 이면에는 갈리아 지역에 거주하는 교양 계층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정치적 의도와 태양신인 솔 인빅투스(Sol Invictus)와 동일시되고 있는 아폴로 신 숭배와 그리스도교의 유일신 신앙의 제설혼합적 노력이 숨어있다고 하였다.21 (198.1)
 그러면 그리스도교와 이교 측이 경쟁적으로 자신들의 관점에 따라 보도하고 있는 이 사건의 진상은 무엇일까? 이 사건이 하나의 완전한 허구일 것 같지는 않다. 기상학적 현상과 연관되었던지 아니면 콘스탄티누스의 꿈이나 의식에 연관되었던지 콘스탄티누스가 어떤 초자연적 경험을 겪었다는 것, 그리고 그 초자연적 현상의 배후에 있는 신적 존재에 대한 콘스탄티누스의 확신이 상당 기간 자신의 태양숭배적 전통과 친그리스도교적 의지가 서로 병립하는 형태로 존속하다가 드디어 측근 그리스도인들의 영향력에 힘입어 결국 그리스도교적 신념으로 굳히게 되었으며 그때가 312년 10월 26일 밀비아교 전투를 앞둔 시점일 것이다라는 것이 이 환상 이야기의 핵심일 것 같다. 처음에는 그 환상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측근 그리스도인들의 설명을 듣고 “하늘의 표지”가 그리스도교의 상징인줄을 알게되었다는 콘스탄티누스의 증언을 유의해야 한다.22 다만 그리스도인들의 설명을 듣고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환상을 깨닫는 데 필요했던 기간은 유세비우스의 설명처럼 단 하루가 아니라 상당한 기간에 걸친 노력과 진행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198.2)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군기 라바룸(Labarum)에 대한 락탄티우스와 유세비우스의 설명은 환상 사건에 대한 설명보다 한결 용이하게 분석되었다. 위 두 사람의 진술을 검증할 명문과 주화가 있기 때문이다.23 락탄티우스가 묘사하는 그리스도 상징의 모양은 유세비우스가 설명하는 라바룸의 모양보다 덜 복잡하다. 락탄티우스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가 꿈에 본 그리스도의 상징은 군기로 만들도록 지시된 것이 아니라 병사들의 방패에 새기도록 지시되었으며 그 모양은 X자 위에 I자를 수직으로 관통케 한 후 I자의 위 끝을 둥글게 굽게 한 형태(x)였으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였다.24 반면 유세비우스가 전하는 x 상징 글자의 형태는 위의 모습과는 크게 다르다. 수직의 창자루에다가 막대기를 가로 질러 붙여 십자가 모양의 깃대를 만든 다음 십자가의 양 날개에 x를 새긴 천을 깃발로 매달았다.25 (199.1)
 그러나 유세비우스가 묘사하고 있는 군기는 유세비우스가 후기에 목격했을 라바룸 군기의 모양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따라서 밀비아 교 전투 시에 사용되었다고 하는 깃발의 모양이 정말로 유세비우스가 묘사하는 그대로의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 당시에도 그 깃발의 상징적 의의가 유세비우스가 주장하는 그대로의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광범위하게 의심되고 있다.26 그리고 유세비우스는 밀비아 교 전투에 앞서 병사들의 방패에 새겼다는 그리스도의 상징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 반면 락탄티우스는 유세비우스가 장황히 전하고 있는 라바룸 기에 대해 아무 말이 없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199.2)
 유세비우스가 전하는 라바룸의 표지는 그리스도교에 국한되는 상징이 아니라는 사실도 그간의 연구들을 통해 밝혀졌다. BC 2세기의 희랍과 스키티아의 주화들에서도 라바룸의 상징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27 이교 사회에서 라바룸 상징이 최초로 사용된 예를 찾자면 로마제국 수립 2천년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주장도 있으며, 가까이는 BC 4세기의 갈리아 지역에서 라바룸의 상징을 찾아내기도 하였다.28 예컨데 리용에서 발굴된 한 비명을 보면 토르(Thor)신에게 헌정된 기념비에 이중으로 교차된 십자가 형상이 나타나고 있다.29 하트(Hatt)에 의하면 라바룸은 겔트족의 아폴로 신 숭배에서 기원했으며 X상징이 겔트족의 아폴로 신 숭배와 밀접히 관련된 사실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많다는 것이다.30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는 갈리아 지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그란드(Grand)에 있는 아폴로 신의 본전에 참배한 일도 있다.31 여기에 콘스탄티누스의 일부 주화에 나타나는 X상징이 제우스 신을 상징했던 두 개의 도끼를 겹친 모양의 라브리스(Labrys)와 유사한 사실32을 관련시켜 고려해 볼 때 콘스탄티누스의 주화에 나타나는 X상징이 기원한 곳을 갈리아 지역으로 추측할 수 있다. (200.1)
 위와 같이 후에 그리스도교 상징으로 유명해진 x(Chi-Rho) 상징은 그 앞서 갈리아 지역민들 사이에서 일반화된 상징이었다. 신앙인이기 전에 통치가였던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적으로도, 그리고 이교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모호한 성격의 x 상징을 채택한 의도의 이면에는 동방과 서방을 지배하기 위해 가급적 더 많은 종교적 지지집단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동기를 의심할 수 있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의 군장에 x 상징을 새기게 하면서도 전통적인 기치들이나 상징들을 철폐시킨 것도 아니며 주변에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을 수행시키고 있었지만 로마 군대의 전통적인 종교의식들을 철폐시킨 것도 아니었다.33 콘스탄티누스의 절묘한 절충주의는 x상징을 통하여 그리스도교적 감정과 이교적 감정을 융합시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평화의 신으로서의 그리스도 이미지에 전쟁의 신의 이미지를 결합시키고 있었다.34 (201.1)
 앞에서 로마 군대종교를 논의할 때 밝혔듯이 위와 같은 제설혼합적인 절충주의 경향은 로마 군대를 위시하여 사회 전역에 걸친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라바룸에 나타난 절충주의적 모호성은 321년에 제정된 콘스탄티누스의 일요일 법(Sunday Law)에서도 똑같이 들어 나고 있다. 이 일요일 법은 일요일에 농번기의 농사와 교회의 노예 해방업무를 제외한 모든 업무를 공과 사의 구별 없이 금지시킨 것인데35 이는 당시 매우 보편화되어있던 태양 신을 위해 “영예로운 태양의 날”(venerabilli die solis)을 성스럽게 기념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36 그런데 유세비우스는 이 법을 그리스도를 위해 일요일을 성별한 것으로 해석하였다.37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군대에서도 일요일 법을 적용시켰다. 그리스도인 병사들에게는 외출을 허락하여 교회에 출석케 했으며 이교도 병사들에게는 매 일요일마다 병영에 남아서 정확히 태양 신인지 그리스도 신인지가 불명한, 유일신을 향해 기도문을 암송케 했다.38 (202.1)
 이렇듯 콘스탄티누스는 x 상징을 통해 그리스도교와 로마 군대를 결합시켰고 일요일 법을 통해 그리스도교와 이교 세계를 융합시켰다. 이러한 복심이 있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315년에 로마에 건립한 개선문에 “그리스도 신의 영감과 도움”이라는 딱 부러진 표현보다는 “신의 영감”(instinctu divinitis)과 도움으로 독재자를 분쇄했다는 애매한 비문을 새기게 했던 것이다.39 (203.1)
 제설혼합적인 절충주의 정책에 의해 그리스도교들과 이교집단들의 지지를 함께 확보하려 했던 의도에 있어서는 콘스탄티누스의 경쟁자였던 리키니우스(Licinius)도 마찬가지였다. 주시하다시피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와 더불어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313년 4월 20일, 막시미누스 다야(Maximinus Daia)와의 결전을 앞에 둔 자리에서 리키니우스는 장병들로 하여금 신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 “최고의 신”에게 올리는 기도문을 장병들에게 낭송케 하였다.40 앙리 그레고아르(H. Gregoire)에 의하면 리키니우스는 때로 친그리스도교적 제스추어에 있어서 콘스탄티누스를 앞지르기도 했다.41 그 일례로서 콘스탄티누스는 그 가계의 시조로 그리스도교와 상관없는 클라디우스 고티쿠스(Claudius Gothicus)를 내세운 반면 리키니우스는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인 황제로 평판이 높았던 필립 아랍스(Philip Arabs)를 선조로 내세운 사실을 들 수 있다. (2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