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 세계에서 파루시아는 이중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것은 부재(不在)를 채워주는 임석(臨席)과 도래(到來)를 의미했다. 그 단어는 또한 신의 임재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용어를 차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1016.1)
 신약은 그리스도의 강림을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울은 “주의 날”(살전 4:15; 5:2)이라는 표현을 파루시아와 동등한 의미로 사용하였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날의 임함”(파루시아, 벧후 3:12)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두 용어를 함께 사용하였다. 따라서 파루시아는 구약의 “야훼의 날”과 연결되어 종말적인 용어가 되었다. (1016.2)
 파루시아는 또한 그 사건의 왕권적 속성을 내표한다. 파루시아와 연결하여 퀴리오스(주)라는 칭호를 강조하여 사용한 것은 그것이 왕을 옹위하는 장엄한 의전(儀典)임을 말해 준다(살전 4:16, 17). 이와 연결하여 면류관과 기쁨에 관한 언급(살전 2:19)도 나타나고, 왕의 행렬을 보기 위해 나온 신실한 자들의 운집(살전 4:17)도 볼 수 있다. 신약에서 이 단어의 왕권적 의미는 계속된다. 파루시아는 악한 자인 사탄과 죽음 자체를 포함하여 모든 정사와 적대적인 세력을 파괴할 것이다. 모든 원수들이 소멸된 후 만물은 그리스도께 굴복할 것이다(고전 15:24-26). 신약에서 파루시아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럽고 장엄한 출현을 나타낸다. (1016.3)
 2. 에피파네이아(나타나심, 현현)
 동사 에피파이노(보여 주다, 나타나다)와 그 명사형인 에피파네이아(출현, 현현)는 신약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 단어들은 풍부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동사는 네 번 중 두 번이 어두움에 비취는 빛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눅 1:79; 행 27:20). 다른 두 용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 하셨을 때 그분에게서 나타나고 보여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특성을 강조하고 있다(딛 2:11; 3:4). (1016.4)
 에피파네이아는 오순절 전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딤후 1:10)과 마지막때에 있을 그분의 재림(딤전 6:14)의 특징을 묘사하기 위해 목회서신에서 사용되었다.따라서 이 단어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하여, 부활 때 그분의 나타나심에 대하여, 그분의 재림에 대하여 말해준다. 이러한 삼중적인 사용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가시적인 속성에 대해 초기교회가 가지고 있던 믿음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1016.5)
 디모데후서 4:1, 8에 나타난 에피파네이아의 문맥은 그 기대감에 대한 임박한 종말적 속성을 강조한다. 신앙고백의 형태로 언급된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마지막 심판과 더불어 짝을 이룬다. 디도서 2:13에서 엘피스(소망), 에피파네이아(나타남), 독사(영광)이 함께 어우러져 나타나는 것은 가시적인 사건에 대한 기대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불법의 사람의 나타남에 대한 언급(살후 2:8)에 더하여 에피파네이아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의 가시적인 속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1016.6)
 3. 아포칼륍시스(드러내심, 계시)
 아포칼륍시스(계시, 묵시)라는 용어가 신약에 사용된 것은 이전에 감추어져 있던 어떤 것이 이제 드러나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이 단어는 구원의 신비(롬 16:25), 복음의 계시(갈 1:12), 그에 따른 계획(갈 2:2)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1016.7)
 이 용어는 또한 나타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두 번째 오시는 영광스러운 광경을 가리킬 때 명백히 드러난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아직 감추어져 있다(눅 17:30). 그것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식별할 수 있지만(엡 1:17, 19), 언젠가는 나타날 것이다(행 3:21). 오실 그분이 오실 것이다. 그분은 하늘로부터 영광 중에 강림하실 것이다(살후 1:7; 벧전 4:13). 신자들은 그날에 대한 기대 속에 살아간다(고전 1:7; 벧전 1:7). (1016.8)
 C. 소망의 중심
 세상 끝에 관한 구약과 신약의 주요 테마와 어휘의 검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오심과 신약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성경적 종말론의 절정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1017.1)
 1. 소망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깊은 갈망은 신약 곳곳에 나타나 있다. 그것은 의(갈 5:5)와 영광(골 1:27)과 부활(행 24:15)과 구원(살전 5:8)과 영생(딛 1:2)에 관한 소망과 관계가 있다. 그 소망은 하나님 자신에 기초해있다(딤전 4:10). 예수께서는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 14:3, 28). 그분은 당신의 영광에 대해 언급하셨고(마 24:30), 밤낮 부르짖는 자들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이 되지 않으실 것을 언약하셨다(눅 18:6-8). 끝까지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의 인내는 헛되지 않을 것이다(마 10:22). (1017.2)
 그러나 “복스러운 소망 곧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딛 2:13)은 인간의 일반적인 소망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일반적인 개념의 소망은 미래에 관한 하나의 열망이고 바람이다. 그것은 현재 잡고 있지 않은, 불확실한 소유에 대한 어떤 욕망이다. (1017.3)
 한편 성경적인 소망은 확실한 닻을 가지고 있다(히 6:19). 그것은 과거에 행하신 하나님의 능력 있는 행위 위에 놓여 있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며”(요 1:11),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부활하셨다(롬 4:25). 성경적 소망은 이러한 반석 위에 서 있으며, 그것은 세상의 어떤 능력보다 뛰어난 것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신” 하나님의 능력이다(엡 1:20). 이것은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행 2:36) 예수님의 주권에 기초한 살아 있는 소망이다. 그분은 하늘 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앞서 가신” 분이 되셨다(히 6:19, 20). (1017.4)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이미 성취된 것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거하신다(고전 15:19, 20. 성령으로 말미암아(롬 5:5) 소망의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부르사(엡 1:18), 그 마음속에 소망으로 채워주셨다(골 1:27). 하나님 없이는 세상에서 소망도 없으며(엡 2:12),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소망은 믿음을 굳게 하고, 사랑으로 활동하게 한다(골 1:4, 5). (1017.5)
 2. 마라나 싸
 종말적 소망은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소중한 것이 되어 왔다. 오랫동안 교회의 전통이 되었던 고대 아람어의 표현인 마라나 싸(marana tha, 고전 16:22)는 이 사실을 증언해 준다 “우리 주님이 오실 것입니다.”라는 의미의 이 기도는마치 예수께서 아람어로 기도하실 때 사용하신 아바(아버지, 마 14:35)처럼 원래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마라나 싸요한계시록 22:20에서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1017.6)
 초기교회의 예배에서 드려진 이 기도의 중요성은 그들이 얼마나 간절한 재림의 기대 속에서 살았는지를 보여 준다. 재림은 성찬식에서도 고대되었는데,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성찬식의 떡과 잔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의 오심에 대한 믿음을 선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였다(고전 11:26). 재림에 대한 이러한 기대와 선언은 초기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10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