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은 밧단아람에서 고향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형 에서의 위협을 당면했다. 에서가 야곱의 화해의 몸짓을 거절하고 사백명을 이끌고 야곱에게 복수하기 위해 다가올 때 ‘심히 두렵고 답답’한 심정이 되었다(창 32:7). 이 때 야곱이 드린 기도가 창세기 32:9-12에 나온다. 야곱의 기도는 참된 기도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는 집요하리만큼 하나님의 은혜에 매달렸다. 하나님의 약속은 모두 은혜로 해석되었다. (233.4)
 창세기 31:3의 귀향명령의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הֵיטִב, hê†îb, 선하게 대우하다)로 재해석했다(창 32:9[10]). 야곱은 후손에 대해 벧엘에서 받은 약속 대신에 이삭을 제물로 드렸을 때 조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자기의 것으로 붙잡았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며’‘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הֵיטֵב אֵיטִב, hê†ëb ´ê†îb )로 표현되었다. 야곱은 하나님의 ‘헤세드’(דסֶחֶ) (, hesed) ‘은총’‘에메트’(אֱמֶת, ´émet) ‘진실하심’과 물질의 축복들을 받기에 합당한 인물이 아님을 느꼈다(창 32:10[11]). 그러나 일가족이 몰살될 위기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나님께 매어달려 그분의 은혜만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234.1)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는 약속 안에서 발견하였다(창 32:12[13]). (234.2)
 한글 성경의 ‘은혜를 베풀다’로 번역된 ‘헤티브’(הֵיטִב, hê†îb )는 ‘선하게 취급하다’는 뜻이며 히브리어 기본형인 ‘야타브’(יָטַב, y¹‰ab)는 ‘선하다, 좋다’이다. 야곱은 불의하게 형을 취급했지만, 하나님은 야곱을 선대하셨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선으로 갚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내버리지 않고 그와 함께 행하고 큰 복을 주시는 것이다. (234.3)
 야곱은 스스로의 선행을 의지하지 않았으며, 자기에게 주신 약속과 더불어서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여 목숨을 구해 주시길 기도했다. 얍복 시내에서 하나님과 씨름할 때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 하겠나이다’(창 32:26)는 말은 야곱이 하나님의 은총에 모든 것을 걸었음을 증명한다. 야곱은 믿음의 승리를 거둔 그곳을 ‘브니엘’(פְנִיאֵל, Pünî´ël) ‘하나님의 얼굴’이라 칭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유일의 희망으로 삼고 그 은혜에 매달린 야곱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 밤에 에서의 마음을 돌려놓으셨다. 야곱은 에서에게서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라고 했다(창 33:10).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고도 살아 남았던 야곱은 복수심에 가득 찼던 형을 만났을 때 형에게서 그를 죽일 의사가 전혀 없는 것을 확인했다. 살의에 찼던 에서의 얼굴은 하나님의 자비하신 얼굴로 변해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야곱은 구원을 받았다. (234.4)
 6) 요셉
 요셉의 생애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죽음 직전의 찰나에 은혜로 죽음에서 벗어났고, 애굽으로 팔려갔다(창 37:20, 22, 27).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그는 이스라엘 민족 뿐 아니라 열국의 구원자가 되도록 준비되었다. 요셉은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의 은혜를 입었다. 그가 부당하게 감옥에 갔을 때에 간수장에게 은혜를 입었다(창 39:4, 21). 보디발의 아내와의 사건은 요셉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사건이었지만, 그는 살아 남았다. 감옥 속에서도 그는 옥중 죄수를 모두 관할하는 인물이 되었다. (235.1)
 요셉은 위기 속에 빠질 때마다 그 속에서도 살아남고 형통했다. 그 이유는 ‘야훼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창 39:2, 21, 23). 칠년간의 연속적인 풍년과 그 후 칠년간의 연속적인 흉년으로 온 세상이 기아 속에 빠지게 될 때, 전 세계적인 위기의 때에 요셉은 애굽 궁전에서 바로에게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세상의 구원자로 우뚝 섰다(창 41:38). (235.2)
 아브라함에게 열국의 축복이 되라고 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명령은 요셉을 통해 성취되었다.요셉은 형제들에게 자기의 신분을 밝혔을 때 하나님이 위기로부터 형제들의 생명을 구하고 그 후손을 세상에 보존하기 위해서 자기를 애굽에 먼저 보내셨다고 말했다(창 45:5, 7). 이것은 구속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이스라엘 민족이 칠년 흉년으로 이 세상에서 멸절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과 요셉의 형제들과 열국과 온 세상이 구원을 받은 것이다. (236.1)
 요셉의 이야기는 매우 감동적인 에피소드로 가득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은혜의 섭리를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하나님의 은혜는 위기의 시간 시간마다 단순히 목숨을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 먼 미래까지를 위해서도 인물을 준비시키고, 만백성에게 축복을 안겨준다. 요셉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창세기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 한다. (236.2)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죄인을 사랑하신다. 요셉의 형들이 범한 죄가 그냥 넘어가지 않았던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죄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요셉의 형제들은 삼일 간 투옥되었고(창 42:17) 시므온은 형제들이 돌아올 때까지 갇혀 지냈다(창 42:24; 43:23). 베냐민은 애굽에서 종이 될 위기에 처했고(창 44:17) 아버지 야곱이 슬퍼하며 스올, 곧 죽음으로 내려가게 될 것이다(창 44:29, 31). 그러나 중보자 유다를 통해서 요셉이 형제들의 회개와 완전히 변한 삶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형제들을 온전히 용서하고 다시 화해하여 이스라엘이 기근을 벗어나게 해 주었다. 마찬가지로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그들은 저주에 빠졌다(신 28:20-68).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회개할 때 그들을 용서하시고 새 생명의 기회를 주실 것이었다. 사사기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배도와 회개와 하나님의 구원은 이것을 실증한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왕상 8:22-53). 이스라엘은 국가적 멸망을 겪었지만, 하나님은 그 민족을 버리지 않으시고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하셨다. 국가적 부활까지 주신 것이다. (236.3)
 교회는 흠이 많을지라도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고난도 겪었으나 결코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 당하지 않았다. 요한계시록 2-3장의 일곱 교회 중 그 어떤 교회도 주님께 버림 받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흠이 많고 칭찬할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님은 최고의 선물을 주셨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언제나 희망을 갖고 있다. (237.1)
 2.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기독교의 핵심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해 창세기는 ‘믿음’이나 ‘믿다’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성경의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은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사라, 요셉 등 창세기의 주요 인물들을 40절중에 절반이 넘는 22개 절 속에서 포함하고 있다(히 11:1-22). 창세기는 믿음을 신학적으로 논하지 않고, 믿음의 본이 되는 인물들을 통해서 진실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삶으로 보여준다. 믿음은 생활인 셈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구절은 창세기 15:6 뿐이다. ‘아브람이 야훼를 믿으니(וְהֶאֱמִן בַּיהוה, wühe´émìn Byhwh) 야훼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믿다’의 히브리어 어근인(אמן,´mn)은 칼형에서 소위 말하는 믿음을 의미하지 않고, 힢일형 ‘헤에민’(הֶאֱמִן, he´émìn)에서 믿음을 나타내는데 주된 강조점은 지적 동의가 아닌 ‘의지함’‘신뢰함’이다.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의 진실성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성품과 속성(진리, 선함, 사랑, 정의, 거룩성, 일관성) 등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만드는 모든 것에 대해 믿는 것이다.5 (237.2)
 1) 아담
 히브리서 11장은 창세기의 믿음의 조상들에게서 볼 수 있는 믿음의 핵심 요소들을 드러낸다. 믿음의 조상의 첫 부분에 아담을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아담이 가졌던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이다(히 11:3). 아담은 우주의 삼라만상과 자기의 존재 근거에 대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들었다. 하나님 말씀은 창조력이 있어 발해질 때마다 사물이 존재케 되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아담에게 말씀은 생명과 사망의 문제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을 때, 그의 불신적 행동은 사망을 가져왔다. 생명은 스스로 건강하게 살려는 몸부림에 가까운 노력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있다. (238.1)
 2) 아벨
 아벨은 에덴에서 주신 희생제사를 통해 인류에게 낙원과 영생이 회복될 것을 믿었다. 에덴을 떠나며 인류가 갖고 나온 제사제도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대책을 마련하셨음을 증거한다. 구원은 인간편의 고안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편의 자기희생을 통한 구속적 결단으로 마련되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베푸시는 사랑의 진정성을 마음에 수용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길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순종을 통해 구원은 현재화된다. 아벨은 자신의 행위의 열매, 자기 공로를 하나님 앞에 내세운 가인 보다도 더 나은 제사를 드렸고, 순교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믿음이 생명 보다 귀하다는 것을 증거한다(히 11:4). (239.1)
 3) 에녹
 에녹은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통해 승천의 상급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은 제사 의식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과 매일의 삶 속에서 동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타락하기 전 인류가 에덴에서 누렸던 축복이지만, 죄로 가득 찬 이 땅에서도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에녹은 매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이 일은 하나님이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호의를 갖고 계신 분, 인간의 행복을 바라시고, 그분과 더불어 동행하는 것을 제사 드리는 것보다도 더 기뻐하시고 제사 제도의 궁극이 하나님과의 만남임을 확신하는 때에 성취 된다(히 11:5-6). 주님의 백성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상은 하늘로 옮겨지는 것이다. 에녹의 승천을 통해서 인류는 이 땅이 궁극적으로 저들의 무덤이 될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이 인류의 눈앞에 활짝 열려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전인적 경험이다. 영생과 구원은 추상적 사고 속에 존재하는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온 몸과 혼과 영혼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현실적 세계이다. 구원은 환상 속에서가 아니라 인간 공동체 속에서 매일 마다 이루어지는 현실이다. (2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