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제와 번제를 한 쌍으로 드릴 때에는 속죄제를 먼저 드렸다(참고 레 9:8~14, 15~16). 이는 선물(번제)이 받아들여지기 전에 먼저 빚(속죄제)이 갚아져야 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에게 100달러를 빚졌는데 그 사람에게 100달러를 준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진 빚을 갚은 것뿐이다. 그리고 다시 100달러를 준다면 그것은 선물이다. (109.2)
 속죄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는 우리의 기도에 대해 응답하실 수 있는 수단인 그리스도의 희생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빚이 피로서 갚아지는 것이라는 사실은 이 빚이 보통의 평범한 빚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은 생명을 위한 빚인 속전의 빚이다. (109.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절대 치를 수 없는 우리 생명의 속전을 치르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분의 피는 제단의 가장 높은 부분이 아닌 십자가 위에 들려졌다. 십자가는 그분의 제단이다. (109.4)
 제사의식인 희생 제사는 자동적으로 죄의 용서를 제공할 수가 없었다. (109.5)
 레위기 4:26은 속죄제의 결과에 대해서 이렇게 요약하여 말한다. “이같이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참고 31, 35절). 제사장이 제사의식을 행함으로 속죄를 하지만 위의 성경절은 제사장이 죄인을 용서하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성경절은 죄인에 대해서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고 말한다. (110.1)
 누가 죄인을 용서했는가? 제사장이 용서할 수 없었다면 누가 할수 있었는가? 출애굽기 34:6-7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선포하셨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 (110.2)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한 일들에 대해서 용서해주어야 한다(마 6:12).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죄들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씻어낼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으며 항상 그분의 용서를 직접 행하셨다. 어떤 사람도 죄를 용서할 권리를 가진 적이 없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인식했던 것처럼 참람된 일일 것이다(막 2:7). (110.3)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여호와의 용서를 위한 전제 조건이 되었던 희생제사 의식을 집전하였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셨다. 제사의식이 올바르게 행해졌더라도 그분께서는 용서를 거절하실 수 있었다. 여러분이 동전구멍에 돈을 넣으면 자동판매기가 초콜릿 과자를 내뱉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제사의식이 용서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110.4)
 어느 때에 희생 제사가 적절한 방법으로 드려졌다 해도 하나님께서 용서 베푸시기를 거절하셨을까? 죄인이 희생 제물을 가져오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상태로 남아있는 위선자일 때이다(사 1:11~20; 66:3; 참고 58:1~5). (110.5)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말했듯이 여호와께서는 순종을 제사보다 더 낫게 여기신다(삼상 15:22). (111.1)
 여호와께 진심어린 헌신이나 순종이 결여된 위선적인 제사의식은 단순히 무가치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죄였다. 하나님께서는 위선적인 의식을 싫어하신다(참고 사 1:10-17). 이러한 사실은 성만찬 예식과 같은 기독교 예식에 경박하거나 위선적인 태도로 참여하는 것에도 적용된다(고전 11:17~34). (111.2)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중요한 계약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직접적으로 집행된다. 제사의식은 그 자체만으로는 영적인 계약을 성취하지 못한다. 그러나 제사의식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영적인 상호작용을 표현하는 한에 있어서는 중요한 것이다. (111.3)
 한 여대생이 나에게 자신은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가 침례는 상징적인 것이고 상징적인 것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며 실제적이 아닌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 여학생에게는 논리적일지 모르지만 나는 결혼을 약속한 남녀가 그들의 결혼에 대해서 상의하는 경우를 예로 생각해볼 것을 제안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말한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와 나의 인생을 함께 하길 원해. 하지만 결혼식은 상징적인 거야. 그래서 결혼식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중요하지 않은 거야. 그냥 결혼식을 건너뛰면 어떨까?” 이렇다면 어떻겠는가? 남자가 결혼식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그의 혼인 약속을 확인해주지 않는다면 여자는 자신에 대한 남자의 사랑을 어떻게 느끼겠는가? (111.4)
 예식이나 제사의식은 상징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상징이 만져지지는 않을지라도 매우 중요한 관계의 변화를 나타내는 실제적이고 중요한 것이다. (111.5)
 우리와 예수님과의 결혼관계를 생각해 볼 때에 우리에게는 성령님의 변화시키는 능력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물의 침례를 통해 우리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표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112.1)
 제의적 정결(ritual puritification)을 위한 속죄제
 영어 번역 성경들은 “속죄제”(sin offering)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번제와 속건제도 죄를 속죄했다. “속죄제”라는 이름은 “죄”로 번역되는 히브리 단어들 중 하나에서 온 것이다(참고 레 4:3, 14, 23, 26, 28, 35). 이 제사는 특정한 종류의 죄들을 속하였는데 주로 하나님의 명령들에 대한 부지중의/부주의한 범죄들이었다(레 4:2, 13, 22, 27; 5:1~4; 민 15:22~23). 하지만 똑같은 희생 제사가 죄가 아닌 심각한 제의적 부정들(ritual impurities)을 속하기도 하였다(레 12:6~8; 14:19, 22, 31, 15:30). (112.2)
 심각한 제의적 부정을 위한 속죄의 예는 막 아이를 출산한 여인은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것이었다(레 12:6~8). “속죄제”라는 번역은 그 여인이 죄를 지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를 낳음으로 인해 죄를 지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는 하나님의 축복을 성취했을 뿐이다. 이 여인의 경우에 드렸던 희생 제사의 목적은 출산으로 인한 출혈로 생긴 제의적 부정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부정은 도덕적인 잘못이 아니었다. (112.3)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선천적이고 육체적 과정에서 온 것이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사망에 종속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은 죄의 결과로 초래된 우리의 존재의 상태이다(롬 6:23; 참고 창 3). (113.1)
 우리가 나중에 제의적 부정의 특징들에 대해서 더 깊이 있게 살펴보게 되겠지만 우리는 여기서 죄와 제의적 부정의 근본적인 차이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할 필요가 있다. 범죄가 고의적(레 19:20~21)이든 아니든(레 4:2), 제의적 부정이 고의적(레 11:40)이든 아니든(민 6:9) 상관없이 오직 거룩한 명령을 범하는 것만이 죄였다. (1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