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죄를 범한 사람이 자신이 한 행동이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임을 알게 될 때까지 죄에 책임을 지지 않았을지라도 여호와의 명령들 중 하나에 대한 부지중의 범함도 죄였다(레 4:27~28). 그러한 부지중의 죄는 눈을 깜박이는 것처럼 무의식적인 신체적인 작용들과 같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죄인은 아마도 그런 행동들을 하려고 의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죄인이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의 명령을 범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그 사람이 죄를 지으려고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죄는 고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한 이스라엘 사람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날이 안식일인 것이 생각났거나 누가 그것을 일깨워 주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람은 일을 하려고 생각했었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은 안식일에 휴식할 것을 명령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출 20:8~11; 31:12~17) 그 날이 안식일임을 잊어버렸다. 그 날이 무슨날인 줄 알았다면 그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극악무도하게 죄를 지었던 것이 아니라(민 15:30~36에서와 같음) 그렇게 하려는 생각 없이 부지중에 죄를 지었던 것이다. (113.3)
 제의적인 부정들은 또 다른 문제이다. 제의적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은 어떤 생각이 전혀 포함되지 않는 월경이나(레 15:19) 몽정(신 23:10~11)의 경우와 같이 완전히 부지불식간의 것일 수 있다. 그렇게 부정하게 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불순종으로 여겨질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성교(레 15:18)와 시체를 만지는 경우(민 19:11~12)와 같이 하나님께서 금하시지 않은 그런 부정(레 18:19; 21:14, 11)은 계획적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도 허용되었다. 금지된 부정을 범하거나 제의적 부정을 정결케 하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민 19:13, 20) 죄였는데 이는 제의적 부정함이 죄였기 때문이 아니라 제의적 부정함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범해졌기 때문이었다. (114.1)
 “속죄제”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가 “죄”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와 똑같은 단어라는 것이다. 그러나 “속죄제”(sin offering)라는 번역은 제의적인 부정에 관련된 경우에 부정해진 사람이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죄를 지은 것처럼 암시하는 그릇된 인상을 주게 된다. 그래서 최근의 어떤 학자들은 이 제사를 “정결제”(purification offering)로 번역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 용어는 죄로부터 정결케 함과 제의적 부정으로부터 정결케 하는 것,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한다. 또 다른 가능한 번역은 “결함제”(imperfection offering)이다. 결함이라는 말이 제의적 부정과 도덕적 과실을 둘 다 포함하는 말이기 때문에 이러한 개념은 이 희생제사의 범위를 적절하게 나타낸다. 그러나 이 책에서 나는 독자들이 나의 설명과 자신들이 갖고 있는 성경 번역본을 비교할 때 혼돈을 겪게 될 것을 피하기 위해서 “속죄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114.2)
 우리는 죄를 지었고 죄로 인해 사망으로 인도되어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은 우리의 죄와 부도덕으로부터 우리를 대속하였다. 로마서 6:23은 이렇게 시작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이 성경절이 다음과 같이 이어짐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115.1)
 우리의 속전의 값은 우리가 치르기에는 너무나 비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그 값을 치러주셨다. (1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