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6 장 재림의 소망을 실천함
 우리의 재림의 소망을 고양시킬 수 있는 예배의 한 국면은 주의 만찬의 예식이다. 우리가 떡을 먹고 포도즙을 마실 때마다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고전 11:26) 이다. 다시 말하자면 주의 만찬에 참여하므로 우리는 고난(Passion)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의 강림(Parousia)을 기념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최후의 만찬과 우리 주님의 속죄의 희생을 되돌아 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혼인 만찬(Marriage Supper)과 우리 주님의 영광스런 재강림을 내다본다. (336.6)
 상징들은 영적인 실체를 개념화하고 경청하는 데 중요하다. 주님의 만찬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상에서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분의 재림 때에 이루실 실체를 전유(專有)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뿐만 아니라 그분의 영광스런 강림의 축제로 보아야만 한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유월절 예배를 “다음해는 예루살렘에서!”라는 말로 끝맺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들도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마라나다!)”(고전 16:22)는 말로 주의 만찬 예식을 끝내야 한다. 이와같은 주의 만찬의 종말론적 의미가 빈번히 무시되고 있다. 그러므로 회중을 인도하는 목사와 직무를 수행하는 제직들이 주의 만찬 예식을 마지막 하나님의 나라에서 메시야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긴요하다. (337.1)
 3. 안식일
 창조, 구속, 회복. 예배와 주의 만찬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주의 만찬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안식일 축제로서, 우리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게 할 뿐만 아니라 앞을 내다보게 한다. 여러 연구 가운데서, 나는 제칠일 안식일이 성경과 유대 그리스도인의 전통 가운데서 과거의 완전한 창조와 완성된 구속뿐만 아니라, 인간과 그에게 속한 피조물들의 미래의 회복을 기념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337.2)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을 위해 제정된 주일(週日)과 규칙적인 안식일이 가져다 준 평화와 휴식 그리고 자유의 경험은 미래에 있을 메시야의 구원의 소망을 함축하고 함양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이와 유사하게, 신약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남아 있는 안식일”(히 4:9 참조)은 하나님의 과거의 창조와 구속의 완성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미래에 이 세상과 우리의 생애를 회복하시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일(work)로부터 육체적으로 쉬는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그 안식일의 풍부한 의미와 경험을 통해서 안식일은 재림의 소망을 든든히 하고 고취시키기 위한 신학적 보증과 실제적인 기회 둘 다를 제공한다. (337.3)
 신학적 보증
 미래의 휴식에 대한 보증. 신학적으로 제칠일 안식일은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히 4:9)고 끊임없이 확신시키므로 우리의 재림의 소망을 고취시킨다. 사실 안식일은 우리에게 미래의 안식에 대한 보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도록”(히 4:11) 우리를 권고하신다. 이 성경절의 후반의 암시는 절반 가량은 불순종으로 인해서 가나안 땅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광야에 있던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한 것으로, 안식일에 쉬는 것은 그 쉼의 표상이었다. 그 경험은 하늘 가나안의 안식을 바라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의 경고가 되고 있으며, 안식일 역시 그 곳의 안식의 하나의 표상이다. 광야의 세대와 같이 만약 우리가 불신실하고 불순종하게 된다면 우리는 미래에 있을 하늘 가나안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337.4)
 역사적으로 받아들임. 그리스도의 강림 때에 하나님의 백성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안식의 상징으로서 안식일의 종말론적 의미는 모든 그리스도인 역사를 통해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고 그리고 가르쳐져 왔다. 초기의 예로써 바나바의 서신(약 주후 130년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가 안식일에 쉬고 있다는 것은 곧 그의 아들이 와서 법 없는 자들의 때를 파멸시키시고 경건치 못한 자를 심판하며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을 바꾼 다음 그가 일곱째 날에 편히 쉴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편지의 저자에게 있어서 일곱째 날은 악을 멸망시키고 의를 세우며, 그리고 “모든 안식을” 주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시작되는 시대(일곱번째 천년기)를 표상한다.8 (337.5)
 말세의 안식의 상징으로서 이 안식일의 미래적 의미는 순교자 져스틴, 터툴리안, 히폴리투스, 키프리안, 오리겐,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제롬, 어거스틴, 크리소스톰, 피터 롬바르드, 칼빈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 저술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져 왔다.9 (337.6)
 어거스틴의 영원한 안식. 아마도 안식일의 쉼을, 새롭게 된 지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기다리는 휴식과 평화의 상징으로 가장 탁월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은 어거스틴(A.D 354~430)의 저서들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의 마지막 장에서 어거스틴은 하늘 도성의 축복을 약속된 안식일의 쉼의 궁극적인 성취로서 본다. “거기에서 ‘잠잠하여, 내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라’라는 말씀이 성취될 것이다. 그 말씀은 진실로 안식일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될 것이다. 저녁이 없는 안식일, 창조의 시작 때에 주님께서 승인하신 안식일 ∙∙∙ 거기에서 우리는 쉬면서 보고, 보면서 사랑하고, 사랑하면서 찬양할 것이다.”10 (338.1)
 자신의 참회록(Confessions) 속에서, 어거스틴은 태양이 지지 않는 안식일의 쉼과 평화를 위해 열렬히 기도한다. “오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당신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소서 ∙∙∙ 저녁이 없는 쉼의 평화 안식일의 평화를 ∙∙∙ 모든 날 동안 가장 아름다운 만물의 이 질서는 지나가고 있는바, 왜냐하면 그 날들에는 아침과 저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해가 지는 저녁도 어두운 밤도 없으니 우리가 당신과 영원한 생명의 안식일에 쉬게 되도록, 당신께서는 영원히 그것이 계속되도록 거룩하게 하셨나이다.”11 (338.2)
 결정적인 모순. 안식일의 상징적인 기능을 하나님의 백성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최종적인 안식의 표상으로 받아들이고, 또 자주 열렬히 외쳤던 많은 그리스도인 사상가들이 불행하게도 현재의 그리스도인 생애에서 제칠일 안식일 준수의 타당성과 가치를 배척해 왔다. 그것이 미래에 있는 마지막 안식의 가장 고상한 상징일진대 어떻게 매주 안식일의 준수의 원칙과 실제가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끝나게 되었는지는 의심스러운 것이다. (338.3)
 안식일을 미래의 안식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면서 한편으로는 현재 준수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미래의 안식을 미리 맛보고 고대하는 현재의 예식이 거절되거나 또는 비난을 받을진대, 그 안식일이 어떻게 신자들 속에 미래의 안식과 평화를 조성할 수 있겠는가? 안식일을 전적인 미래의 실재로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안식일의 현재와 미래의 현세적이고 종말론적인 기능 사이에 있는 유기적인 성경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처사이다. 이 분명한 모순은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하다고 말하면서 넷째 계명이 변경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 준다. (338.4)
 안식일의 축복의 현재적 경험과 재림 때에 있을 미래의 완성 사이에 있는 성경의 유기적인 통일성을 받아들이는 신자는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히 4:9)는 일관된 신학적 보증을 안식일 예식에서 찾게 된다. 그 안식일의 쉼은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이루시기 위해 오실 때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 (338.5)
 실제적 기회들
 하나님의 임재와 안식. 안식일 예식은 앞으로 올 세상의 평화와 휴식에 대한 신학적인 보증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험을 미리 맛보도록 하는 실제적인 기회를 제공하므로 우리의 재림의 소망을 더욱 고양시킨다. 우리는 앞장에서 새 땅에서의 생애의 가장 복스런 국면은 백성들 가운데 이전에 없었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임을 보았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 21:3). (339.1)
 안식일은 앞으로 올 세상의 안식과 평화,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미리 맛보는 독특한 기회를 제공한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성경에서 반복해서 말한 안식일의 거룩성은(출 16:23, 20:8, 31:15; 신 5:12; 느 9:14; 사 58:15; 렘 17:22) 우리의 생애 속에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의 거룩한 임재를 이날을 통해서 나타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을 단순히 휴식과 예배를 위해 주일 중 한 날을 떼어 놓으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의 주님 곧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비록 볼 수는 없지만 매우 존경스런 실제적인 손님으로 찬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339.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애 속에서 자신의 임재와 평화에 대한 의식을 더욱 아낌없이 충분히 개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하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해방되기를 권하신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 의해서 웅변적으로 표현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안식일을 통해서 그분과 함께 휴가를 가지도록(ad vacandum divinis) 초청하신다.12 (339.3)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안식일 휴가(Sabbath Vacation)를 의례적인 예배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그날의 비의례적인 활동을 통해서도 즐길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축복들은 그분의 거룩한 날에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로 선택한 심령으로부터 솟아나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즐기는 이 영적인 교제는 우리가 그분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때 즐기게 될 더 충분한 교제를 미리 맛봄으로 우리의 재림의 소망을 고양시킨다. (339.4)
 시간과 공간에서의 만남. 금요일 해가 질 때에 안식일을 환영하기 위해 준비하는 매주일의 예배는, 어떤 의미에 있어서 이 세상 역사의 황혼녘에 오시는 구세주를 환영하기 위해 준비하는 우리의 지속적인 예비를 고무시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우리는 안식일에 불가시적인 주님을 시간(time)속에서 만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재림 때에 가시적인 주님을 공중에서 만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3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