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6 장 재림의 소망을 실천함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고대하면서 생애하는 것은 우리의 생애의 중심에 그분을 모시는 하나의 방법이다. 우리가 그분의 오심을 생각할 때 우리는 끊임없이 그분께서 죄의 허물과 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것과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돌아오실 때 영생의 선물과 그분과의 교제를 승인하시므로 우리를 위해 행하실 것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성취 속에 닻을 내린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도록”(롬 8:37) 할 것이다. (327.1)
 일시적인 제도들. 그리스도의 오심을 내다보는 것은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제도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영향을 끼친다. 중세기 동안에 교회는 지상에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을 건설하고 있었다는 것을 많은 백성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에는 지상에 하나님의 왕국이 현존하는 정치적 사회적 구조를 개선하고, 또 인류가 혜택을 입을 수 있는 경제적이며, 기술적인 진보를 증진시키므로 설립되기를 바라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327.2)
 하나님의 미래의 왕국을 바라보는 것이 현재의 종교적인 제도나 혹은 정치적인 제도에 영원한 가치와 기능을 부여하지 말도록 추구하고 있는 것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왕국이 설립되어져야 할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서 오실 때 우리의 그리스도인 기관들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의 제도들이 종말이 올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촉구한다. (327.3)
 우리는 장래의 세대를 위해 건설을 해야 하지만 한편 그 미래는 우리가 건설하고 있는 바로 그것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제도들이 고정화된 구조들이 되어서는 안 되고 새로운 상황에 부응하기 위해 변경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제도들이 재림신자들의 적응에 따른 같은 순례의 특성을 나타내야만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앞을 내다보는 생애의 궁극적인 영향은 우리의 모든 기관들과 개인의 결정들을 우리 주님의 재림의 빛 속에서 보도록 해야 한다. (327.4)
 3. 영으로 생애함
 미래를 고대함.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고대하면서 살아가는 열렬한 재림성도가 되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20세기가 지나가는 오늘날은 그 어떤 시대보다도 그리스도의 재강림의 확실성과 임박성 그리고 타당성을 의심하기 쉽다. 성령의 중요한 역할은 현재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를 제공하므로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의심을 극복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경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여러 방법으로 가능하게 만든다. (327.5)
 첫째, 성령은 그리스도의 강림 때에 얻게 될 하나님의 자녀의 직분과 미래의 상속에 대해 우리를 확신시킨다(롬 8:14~17; 엡 1:14). 성령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추수의 첫 열매, 즉 내세의 축복을 미리 맛보게 된다(롬 8:23). 그것이 단지 미리 맛을 보는 것(foretaste)이긴 하지만 그것은 실제의 맛이다. 이 진리는 성령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다고 말한 히브리서에서 나타났다(히 6:5). 성령은 그리스도의 강림 때에 우리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완성된다는 보증(guarantee)을 우리에게 제시한다(고후 1:22, 5:5; 엡 1:14). (327.6)
 그리스도는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셨다(마 25:1~3). 어리석은 처녀들은 그분이 오실 때에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준비되어 있지 않았는바 그들은 자신들의 생애를 성령의 능력으로 채우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성령의 능력을 위한 간구를 지연시키므로 영원을 위한 적합한 품성을 계발시키기란 불가능하며 그 때는 너무나도 늦은 것이다. (328.1)
 재림의 실재와 임박함에 관해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느껴지는 불확실함을 그들의 생애 속에 성령의 감화가 없다는 것을 잘 나타낸다. 바울은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롬 5:5)라고 기록한다. 하나님의 실재(實在)는 단순히 지적인 논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영접과 조명을 통해서 알게 된다(고전 2:12~14). (328.2)
 화목한 사회. 성령의 활동의 가시적인 표시는 사회적 인종적 문화적 및 종교적 장벽들을 허물어 버리는 것이다. 타국 사람들이 성령께서 그들의 생애를 인도하시므로 함께 모였을 때 오순절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한 지역 사회의 새로운 의미는 유대인과 이방 신자들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고전 12:13)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되었을 때 발전하기 시작했다. (328.3)
 재림신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세우려는 분열된 사회적, 인종적,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 장벽들을 허물어 버리는 데 오늘도 똑같은 기적을 성령께서 이행하시도록 허용하는 것을 의 미한다. 만약 우리가 새 땅의 질서 정연한 지역 사회에서 화목하게 살기를 진실로 바란다면 우리는 모든 백성들 속에서 연합과 조화 그리고 평화를 심어 주기 위해 준비되어져야만 한다. 스티픈 트라비스(Stephen Travis)는 “우리가 인종과 계급의 장벽을 초월하는 지역 사회에 속해 있으며 그 지역 사회가 서로를 귀중하게 돌보도록 위탁했다는 어떤 징표가 보여 주지 않는 한 하늘의 실재에 대한 우리의 증거는 세상에서 철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교회가 그 이상을 위해 노력할 때 곧 그것이 소망의 한 상징이다”1라고 기록한다. (328.4)
 그리스도와 같은 생애. 성령의 감화가 우선 개개인 신자들의 생애에서도 느껴지지만 주로 교회 생활을 통해 보여질 수 있다.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생애를 살므로 앞으로 올 세상의 생애의 독특한 일면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과 함께 있고 또 그와 같이 되기를 내다본다는 것은 이 현재의 생활에서 더욱더 그리스도와 같은 생애를 산다는 뜻이다. (328.5)
 이 진리는 요한에 의해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 3).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은 인간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화를 통한 우리의 생애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 하심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328.6)
 품성에 있어서 점점 그리스도와 같게 되는 것은 통상적으로 “거룩함”이라고 불리워지며 그 개념은 오늘날 더 이상 인기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목표에 더 이상 도달할 수 없다며 보다 낮은 표준에 머물러 있기를 선택한다. 보다 낮은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것은 우리 안에 새 땅을 위한 적합한 품성을 만드는 성령의 능력을 의심한다는 뜻이다. 존 웨슬레(John Wesley)는 “회개는 종교의 현관이고, 믿음은 종교의 문이며 거룩함은 종교 그 자체이다 ∙∙∙ 지금 하나님을 향해 생애하는 자만이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될 것이며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자만이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즐기게 될 것이다”2라고 논평한다. (329.1)
 재림의 그림자 속에서 살고 있다는 의식은 경건하고 거룩한 생애를 살도록 끊임없이 자극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엄중한 질문을 하므로 이 사실을 강조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 ”(벧후 3:11). 만약 우리가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에서 살고자 계획한다면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그 새 땅에 거하는 데 적합하게 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329.2)
 4. 균형진 생애를 함
 한편 우리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강림을 고대하면서 성령의 능력으로 생애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와 같은 생애는 균형진 생애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성경은 재림신도의 생활 양식의 여러 중요한 특징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베드로는 여러 자세한 자질들을 언급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리라”(벧전 4:7). (329.3)
 온전한 정신을 유지함.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의 첫번째 생활 양식의 특징은 “건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사용하고 있는 헬라어 동사는 “마음을 편안하게 유지하는 것” 다시 말하자면 사람의 건전한 정신을 보존한다는 문자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 소프로네인(sophronein)이다. 건전한 정신의 주요 특성은 올바른 전망으로 사물을 보고, 옳고 그름과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며, 역경 가운데서도 평온을 유지하고 옳지 못한 광신과 이해할 수 없는 무관심을 피하는 능력이다. (329.4)
 재림신자들은 자신들의 건전한 정신을 특별한 방법으로 보존하는 것이 필요한 바, 그 이유는 이미 주목한 것처럼 그들은 지나친 동요와 무관심이라는 두 가지 위험 가운데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인은 북미와 해외에서 강연하는 동안 기독교를 분열시키고 불명예스럽게 만든 지극히 환상적이고 극단적인 가르침 때문에 자신들의 건전한 정신을 잃어버린 개인들과 집단들이 존재하는 것을 반복해서 고통스럽게 인식하여 왔다. 우리가 불길한 2,000년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말의 시기와 상태에 대한 선동적인 예언들과 또 살아남는 프로그램 및 생산품들의 증가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건전한 정신을 잃어버리는 위험 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 건전치 못하고 도의에 벗어난 상업주의 까지도 한몫을 톡톡히 보는 듯하다. (329.5)
 너무나도 광기어린 이 세계에서 온전하게 살아가며 또 장차 올 세계의 실제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것을 위해 일하도록 하는 건전한 정신이 오늘날 필요된다. 건전한 정신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으며, 특히 편만한 곡해, 폭력, 부도덕, 물질주의 및 세속주의에 끊임없이 노출된 거대한 도시 가운데서 살아가며 일하도록 부름을 받은 그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종종 낡은 부도덕이 새 도덕처럼 증가될 때 재림신자들은 그 어느때보다도 자신의 건전한 정신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2, 13)라고 말하고 있다. (3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