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6 장 재림의 소망을 실천함
 “재림교도”, 즉 임박한 구세주의 강림을 고대하면서 생애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재림의 소망이 우리의 생애와 사업 그리고 가치관과 결정에 어떻게 영향을 끼쳐야만 하는가? 중요한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은 주로 전과정을 통해 연구한 재림의 소망의 적절성에 기인한다. 결국 어떤 신앙이 중요하다는 것은 주로 개개인의 신자와 신앙 집단의 생활 양식에 끼친 영향에 의해 나타난다. (324.1)
 본 장의 목적. 본 마지막 장은 재림의 교리에 대한 실제적인 적용을 다룬다. 연구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제1부에서 우리는 어떻게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생애 하는가를 숙고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재림교도”가 된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반영할 것이다. 지금부터 “재림교도” 라는 어휘가 본 장에서는 절대적으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강림을 고대하면서 생애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함축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324.2)
 제2부에서 우리는 재림의 소망을 어떻게 함양하는지를 숙고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고 약속하신 지 거의 20세기가 지나가고 있는 오늘날은 과거 어느때보다도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대해 안일하거나 혹은 회의적이 되기가 쉽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재림의 확실성과 임박성 및 타당성을 보지 못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재림의 소망을 어떻게 우리의 마음과 심령 속에 살아 있도록 할 것인지를 숙고하는 것이 중요하다. (324.3)
 제 1 부 재림의 소망을 실천함
 1. 피해야 할 두 위험
 지나친 동요.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고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두 위험, 즉 지나친 동요나 무관심에 노출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임박한 강림의 생각에 지나치게 흥분된 나머지 자신들의 미래나 혹은 그들이 살았던 지역 사회를 위해 일하는 모든 노력들을 포기해 버린 기독교인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그러한 문제가 이미 사도 시대에도 있었다. 바울은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고 있던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이 일하기를 멈춘 것을 지적하면서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권고해야만 했다(살후 2:2, 3:12). (324.4)
 똑같은 태도가 오늘날에도 어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다. 이런 사람들은 현재의 세계를 침몰하고 있는 배로 간주하며 그들은 항해를 계속할 가치도 없고 놋장식을 광내거나 또 항해를 수정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배에서 일하기보다는 오히려 멀리서 배 안에 타고 있는 승객들에게 절박한 운명을 경고하면서 구명선에서 자신들의 시간을 소모하고 있다. 그들은 사회적 여건들을 개선하려는 어떤 시도도 무익하며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바,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재강림 때에 현재의 사악한 세상 질서를 파괴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324.5)
 그러나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벧후 3:7)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을때 분명히 그 속에 포함되었으며 그래서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강림 때에 새 세상이 건설될 것을 기다리면서 이 세상에서 신실히 일하도록 명령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요 9:4). (325.1)
 달란트의 비유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귀인이 자신의 종들에게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눅 19:13)는 말로 명령한다. 자신의 재림 때에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종들은 그들에게 위탁된 달란트를 가지고 사업을 하면서 그분을 기다린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임박한 강림의 고대에도 불구하고 일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것 때문에 일한다. (325.2)
 무관심.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기대감에 지나치게 흥분된 나머지 현재의 세상을 운명지어진 것으로 포기해 버린 반면, 거의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해 너무나도 무관심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 세상을 생애와 활동을 통해 궁극적인 실재를 실행하는 곳으로 만들기로 선택했다. 왜냐하면 현재의 세상은 장차 올 세계를 위한 대기실(waiting room)이 아니고, 가능한 한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아가기 위한 거실(living room)이기 때문이다. (325.3)
 12장에서 우리는 재림의 소망에 대한 무관심과 나태함을 조장해 온 여러 요인들을 고려했다. 인본주의적인 사고(思考)는 어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재림을 미래에 대한 현재의 실존적인 경험(existential experience)으로 해석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물질적 관념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의 건설을 정치적, 경제적 계획들과 기술의 발달을 통해 찾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휴거, 환란, 천년기, 및 재림의 징조들에 대한 논쟁적인 견해들은 모두 그 나름대로 재림의 소망을 약화시키는 데 영향을 끼쳐 왔다. 다소간 그리스도인들이 재림의 소망을 경시하거나 무시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현재의 동기와 미래의 확신에 있어서 다소 저조한 상태에 있다. (325.4)
 “재림교도” 즉 그리스도의 강림을 고대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된다는 것은 현재의 세상을 운명지어진 것으로 돌려 버리는 지나친 동요와, 지금의 세상이 살아가고 활동해야 할 궁극적인 실제로 돌려 버리는 무관심을 모두 피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이 세상의 구원에 철저하게 연류되어 있는 것과, 세상일에 지나치게 얽히지 않으므로 내세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 사이에 세심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딛 2:12)아가는 것을 뜻한다. (325.5)
 2. 앞을 내다보며 생애함
 내세를 바라봄. 재림신도 그리스도인(Adventist Christian)이 된다는 것은 앞을 내다보며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어떤 사람들은 지나간 약간의 황금기에 미련을 갖고 뒤돌아본다. 다른 사람들은 현재의 성취나 혹은 여건을 만족스럽게 본다.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재림 때에 세워질 미래의 신시대(new age)를 바라보며 생애한다. 베드로는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13)라는 말로서 앞을 내다보도록 권하고 있다. (325.6)
 바울은 이 내세를 바라보는 것을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 14)는 말로서 웅변적으로 표현한다. 사도가 생애와 봉사를 위한 동기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면서 무지하게 낭비한 과거에서나 혹은 완전에 도달한 현재(“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오”12절)에서도 아니라 그리스도와 동료 신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장래의 목표 속에서 찾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사도는 모든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똑같이 앞을 내다보며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이 이렇게 생각”(빌 3:15)하기를 강권한다. (326.1)
 순례자의 자세. 이와같이 앞을 내다보면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현재의 생애를 순례, 곧 더 나은 땅을 향한 여행으로 본다는 뜻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아브라함과 모든 과거의 진실 신자들이 이 땅에 영원한 거처를 갖고 있지 않는 순례자였다고 주목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 하셨느니라”(히 11:13~16). (326.2)
 우리는 우리 자신을 순례자로 보는가 아니면 이 땅에 영주하는 자로 보는가? 어떤 사람들은 20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을 “이 세상이 지금까지 보아 왔던 가운데 가장 잘 위장한 순례자들”이라고 말해 왔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때로는 존스와 같이 차고에 두 대의 자동차와 솥에 두 마리의 통닭을 가지기 위해 둘째 혹은 셋째 직업에서 열심히 일할 때에는 그들이 단지 “거쳐 지나간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란 거의 힘이 든다. (326.3)
 이것은 재림성도들이 세상을 부정하고 은둔자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임박한 종말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계셨지만 여전히 그분께서는 자신의 원수들이 그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 11:19) 라고 규정한 것처럼 어느 정도 음식과 친구들을 즐기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비유 가운데서 천 연계에 대한 비상한 인식과 이해를 보여 주셨는바 그 이유는 당신의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이 세상이 하나님의 세계라는 것을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326.4)
 그러므로 앞을 내다보고 생애 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의 선하심을 즐긴다는 뜻이며 동시에 우리는 이 세상을 통과하여 새 땅을 향해 여행하는 순례자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사는 생애를 말한다. 이러한 긴장은 바울의 편지에서 발견된다. 디모데에게 편지 하면서 바울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라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는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 4)고 권면한다. (326.5)
 그리스도 중심적인 생애. 재림을 향해 앞을 내다보며 생애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을 우리 자신보다는 그리스도에게 집중시킨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필요와 욕망 그리고 문제들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관심을 우리 자신에게 더많이 집중시키면 시킬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왕국에 대해 적게 생각하게 된다. 죄악적인 생애의 본질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으나, 한편 죄없는 생애의 본질은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 그리스도인 생애가 성장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더욱더 우리의 존재에 중심이 되셔야만 한다. (3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