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역사와 신학 제 5 장. 안식일:구속의 기쁜 소식 I. 구약에 나타난 안식일의 구속적 주제들
 1. 안식일의 축복과 성화
 어떤 의미에 있어서 창조의 이야기는 구속의 이야기이도 하다. 그것은 무질서에서 질서를 끌어내고, 혼돈에서 조화를 끌어낸 구속의 이야기이다.2 창조의 사건 속에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첫번째의 구속 행위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 안식일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형태없는 물질에서부터(창 1:2) 새롭고 아름다운 어떤 것을 제조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피조물이 함께 지내는 기쁨을 누리기 위하여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우리는 안식일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의 행위는 당신의 거룩한 임재를 통하여 피조물들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보장을 나타내는 것임을 살펴 보았었다. (116.1)
 임마누엘의 약속. 하나님의 임석하에 누리던 즐거운 삶의 전망이 범죄로 말미암아 산산이 조각나게 되자 안식일은 파괴된 관계를 회복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이 되었다. 혼돈에서 완전한 조화를 이룩하신 하나님의 최초의 우주적인 업적을 상징했던 안식일은 이제 당신의 백성을 속박에서부터 자유케 하시는 활동을 상징하게 되었다.3 (117.1)
 당신의 임석으로 완전한 세계를 축복하고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인간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행위를 상징했던 안식일은 이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즉 임마누엘”이 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장차 인간의 육체 속으로 들어오실 행위를 상징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초림도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찬가지로 처음에 안식일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행동을 통하여 나타내신바, 이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를 뜻한다.4 (117.2)
 안식일의 이같은 구속적인 기능이 구약과 신약에서 어떻게 이행됐는지를 추적하는 일은 용이한 작업이 아니다. 왜 그런가? 첫번째 이유는 안식일이 항구적으로 이 새로운 의미의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주의 주일”(週日)과 안식년의 해방 경험, 그리고 “안식”의 주제 같은, 안식일의 개념들의 여러가지 지엽적 사항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를 나타내는 데에 사용되었다. 두번째 이유는 안식일의 해방 메세지가 정치적 해방을 기다리는 국가적 관심들과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미래적 기대에 다같이 적용되어 왔다는 점이다. (117.3)
 이와같이 똑같은 하나의 주제가 이중적으로 적용됨으로써 방심해 있는 독자들의 마음 속에 쉽사리 혼란이 일게 된다. 세번째로는 성경과 성경 이외의 자료가 안식일의 의미에 대하여 제공해 주고 있는 정보들은 조직적인 것이 아니라 산만한 것들이라는 점이다. 이제 곧 보게 되겠지만, 구약에 암시적으로 취급된 일부 안식일 주제들은 신약에 와서야 분명한 형태로 파악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형편상 안식일의 안식과 안식일 해방이라는 두가지의 구속적 주제들만을 추가적으로 취급할 생각이다. (117.4)
 2. 안식일 안식
 히브리서의 안식일 안식. 구약으로부터 시작해서 신약의 사대로 안식일 안식의 주제를 훑어 내려오는 것 보다는 그 반대의 방향을 택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것 같다. 왜 그러냐하면 안식일 안식의 메시아적인 의미가 분명해진 곳은 신약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찰을 시작해야 할 필연적인 장소는 히브리서 제 4 장이다. 여기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한면으로는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다”(히 4:9)고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독자들에게 “저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라”(히 4:11)고 독려하고 있다. (117.5)
 히브리서에는 영속성과 궁극의 구제(perseverance), 기결(旣決)과 미결(未決) 사이의 긴장이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된다.5 그러나 우리의 당장의 관심은 이와같은 긴장의 의의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서 4장 9절에 나오는 안식일 안식 즉 사바티스모스라는 용어의 의미와 용도를 확인하는 일이다. 안식일의 안식은 제칠일 안식일의 안식을 말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같은 안식에는 어떠한 의미들이 있는가? (117.6)
 문맥을 미루어 볼 때나 또 사바티스모스 즉 “안식일 안식”이라는 언어학상의 용도를 미루어 생각해 볼 때도 이 말은 여기에서 제칠일 안식일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는 안식의 주제는 안식일의 안식과 아무런 표면상의 연결없이 히브리서 3장 7절에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기자는 안식의 주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창세기 2장 2절으로 부터 “하나님이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히 4:4)라는 구절을 인용함으로서 안식의 기원을 창조 주일의 제칠일에 있었던 하나님의 안식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118.1)
 히브리서 4장 4절에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안식의 약속을 창조의 제칠일 안식일과 부합시킨 히브리서의 기자는 9절에서도 아무런 부담없이 “안식(휴식)”카타파우시스6 라는 흔한 용어 대신에 사바티스모스“안식일 안식 또는 안식일 준수”라는 다소 특수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바티스모스라는 용어가 제칠일 안식일의 준수를 특별히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은 플루타쿠스(putarchus), 순교자 유스티노스(Justinos martys),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같은 사람들의 저술에서도 그 같은 의미로 그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실례들이 발견됨으로써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7

 (118.2)
 뿐만 아니라 같은 어근(語根)을 가진 동사 사바티조(안식하다)도 70인 역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분명히 제칠일 안식일의 준수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출 16:30; 레 23:32; 대하 36:21). 이러한 요인들은 “안식일의 안식”(사바티스모스) 즉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는 안식일(4:9)이 실제로 일곱째 날의 안식 체험과 관련이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118.3)
 의미의 3단계. 히브리서의 기자는 안식일의 안식(또는 휴식)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95편 11절창세기 2장 2절을 하나로 묶어 우리가 안식일 안식의 의미상 세개의 다른 단계들 이라고 불러도 좋은 그러한 것을 제시하고 있다. 제1단계로서 안식일 안식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일이 이루었다”(히 4:3)고한 하나님의 창조의 안식을 지칭하고 있다. 이같은 의미는 창세기 2장 2절을 인용함으로서 정립되고 있다. (118.4)
 두번째 단계로서, 안식일의 안식은 “광야의 세대가 들어가지 못한”(히 4:6; cf 3:16-19) 가나안 땅에 들어갈 약속을 상징하였는데 이 약속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의 지도아래 안식의 땅에 들어감으로서 실현되었다(4:8). 가장 중요한 제3단계의 안식일 안식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 여명이 열리고 접근이 가능하게 된 구속적인 안식을 예시하고 있다. (118.5)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 마지막의 의미를 어떻게 정립시키고 있는가? 그는 이를 위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인용하고 있는(히 4:3, 5, 7) 시편 95편 7, 11절로 부터 주목할 만한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시편 95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저 패역한 광야의 세대가 들어가지 못한(시 95:7~11) 당신의 안식의 약속이 새롭게 제시되고 있는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두 가지 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첫째는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안식처를 얻은 것으로 하나님의 “안식일의 안식”, 즉 획득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는”(히 4:9) 안식이 있다는 것이다. (119.1)
 두번째는 그와같은 안식이 그리스도의 강림과 더불어 그 여명(黎明)이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히 4:3, 7). “오늘날 너희가 그 음성을 듣거든”(히 4:7) 이라고 되어 있는 구절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말이다.8 독자(競者)들은 “말세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며(히 1:2) 안식일 안식의 약속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건의 빛 속에서 볼 때 안식일에 일을 쉬는 것(히 4:10)은 구속의 현재적 경험(4:3)과 하나님과 누릴 미래의 친교의 희망(4:11)을 뜻하고 있다. 제라드 폰 라드(Gerhard Von Rad)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히브리서의 기자에게 있어서 “창조의 전체적인 목적과 구속의 전체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최초의 안식일 안식의 성취속에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9 (119.2)
 구약 성경속에 있는 안식일의 안식. 혹자는 어떠한 근거 위에서 히브리서의 기자가 안식일을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성취된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완성으로 해석했을까? 하고 의아히 여길 것이다. 전적으로 히브리서 기자 자신의 독창적인 해석인가? 아니면 안식일 안식에 대한 기존의 종말론적 관념의 새로운 접근인가? 구약과 또 동시대의 유대 문헌을 기초하여 안식일 안식의 주제를 연구해 볼 때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19.3)
 “성서적인 사고의 소유자에게 있어서” 안식일 안식 즉 메누하(menuhah)는 “평화와 조화와 행복과 고요함과 같은 것”이라고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Adraham Joshua Heschel)은 말하고 있다.10 이같은 관념은 구약 성경에서 단지 7일에 한번씩 오는 안식일 안식 뿐만 아니라 안식의 땅에서 누릴 평화로운 생활에 대한 민족적인 기대를 묘사할 때에도 사용되었다(신 12:9; 25:19; 사 14:3). 이 안식의 땅은 국왕이 백성들에게 “사방의 대적들로부터의 안식을”(삼하 7:1; cf. 왕상 8:5) 베풀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서, 특히 시온에 있는 하나님의 성소에서 “평안의 처소”를 발견하는(대하 6:41; 대상 23:25; 시 132:13, 14; 사 66:1) 곳이다. (119.4)
 대부분이 성취되지 않은채 남아있는 정치적 열망으로서의 안식일의 안식과 평화는 자주 “마지막 날” 또는 “후세”11로 언급되는 메시야 시대의 상징으로 나타났다. 그 예로서 데오도레 프리드만(Theodore Friedman)은 말하기를 “이사야가 안식일에 대하여 언급하는 세개의 성경 구절들 가운데 둘은 마지막때와 연결되고 있다(사 56:4~7; 58:13, 14; 66:22~24) ∙∙∙ 이사야가 즐거운(오넥), 존귀한(카보드)이란 말을 안식일과 말세에 대한 묘사와 연결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로만 볼 수가 없다(사 58:13 ‘네가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66:11), ‘그 영광(존귀)의 풍성함을 인하여 기뻐하리라’). 그것에 함축된 의미는 분명하다. 마지막 때의 특징이 될 즐거움과 기쁨은 지금 여기에서 안식일에 의하여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12 (119.5)
 유대 문헌 속의 안식일 안식. 후기 랍비 문학과 묵시 문학 속에는 안식일이 새로운 세상의 도래(到来)에 대한 기대와 예상으로 이해된 실례가 많이 나온다.13 예컨데 피르케 랍비 엘리에제르 18세(Pirke Rabbi Eiezer 18)는 역사의 구조를 묘사하여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일곱 이온(AEONS)들을 창조하셨다. 이 모든 것들 가운데서 하나님은 일곱째 이온만을 택하셨다. 여섯 개의 이온들은 사람들이 오며 가는 날들이지만 일곱번째의 이온 하나만은 전적인 안식일로서 영원한 생명 속에 있는 안식이라”고 하였다. 이 일곱번째의 안식일시대는 빈번히 메시야의 도래(到来)와 연결되고 있다. 바벨론 탈무드에는 “우리의 랍비들은 이 칠년기가 끝날 때에 다윗의 자손이 오실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R 조셉(Joseph)은 ‘너무나 많은 일곱번째의 시기가 지나갔으나 다윗의 자손은 도래하지 않았다!’고 항변하였다”고 전한다.14 (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