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 제 4 부 예수님과 함께 지성소에서 (죄의 존재로부터의 자유) 15. 영광의 그룹들 (내가 겪는 모든 도전은 그리스도의 것임)
 루스벨은 우주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영향력이 크고, 가장 아름다운 천사이었다. 루스벨이란 이름은 라틴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빛’을 뜻하는 룩스(lux)와 ‘몸에 지니다’를 뜻하는 페로(fero)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빛을 지닌 자”를 의미한다. 루스벨이란 용어는 그의 직함으로서 그의 본래적 기능인 “덮는 그룹”을 뜻한다. 루스벨의 창조자는 “그분의 성소의 산”에 있는 자신의 보좌를 감싸는 산 덮개의 역할을 그에게 주었다(나탄<natan>, 출 28:14). “그리스도 옆에”(4BC, 1143, 1163)서서 하나님의 광채를 받으면서 “아침의 아들”“하나님에게 가장 큰 특권을 받”았고, “하늘 주민들 중에서 최고의 권위와 영광을 가진 자”이었다(각 시대의 대쟁투, 493). (192.1)
 성령께서는 몇몇 히브리어 단어들이 우리말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채로 놔두게 하여, 우리로 그 의미를 연구하도록 하신다. 그룹(cherub)과 스랍(seraph)도 이런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은 우리말로 음역된 히브리어 단어들이다. (192.2)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그룹
 파아크헐스트(Parkhurst)는 “그룹이란 단어는 낙원 전승과 함께 고대로 부터 전해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Hebrew Lexicon, “Cherub”)고 바르게 논하였다. 무어(G. Bramley Moore)는 오래 전에 그룹의 히브리어 첫 글자(k)가 “같은(like)”을 뜻하고, 두번째 음절(rb)은 “권능, 지혜, 영광이 크신” 분, 또는 “어떤 것이든지 완전하다고 칭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고 제시하였다(Philalethes, The Cherubim of Glory). 그룹이란 단어는 “랍비”란 단어의 어원이고, 하나님께 대해서도 사용되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룹이란 용어는 “마치 신성한 위엄과 같은 이”를 묘사하고, 그 인물의 성품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은 그를 가능한 한 자기 자신과 거의 같게 선하고 아름답게 만드셨다”(RH, 1901. 9. 21.). 영감의 기록은 그룹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고, 하나님께 경배함으로 그들의 최고의 열망은 충족된다”(복음 교역자, 21). (192.3)
 이 뛰어난 피조물에 대한 히브리어 칭호(ben shahar)를 시적인 라틴어로 옮긴 명칭인 루스벨(Lucifer)은 “새벽의 아들,” “새벽의 고지자,” 또는 “계명성”이다(사 14:12; 비교 호 6:3). 이 단어는 “빛”으로도 번역되어(사 8:20), 그의 특권받은 역할을 가리키고 있다. (192.4)
 그의 직무는 맨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들에 내말(內密)하게 관여하며, 따뜻함과 빛을 널리 퍼뜨리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본성, 뜨겁게 달아오르는 사랑, 빛나는 목적들, 그리고 자비로운 정부에 관한 지식을 온 우주에 퍼뜨리는 것이었다. (193.1)
 존재의 기능을 나타내는 스랍
 이런 활동은 “불탐”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사랖(saraf)에도 깊이 새겨져 있다. 사랖의 파생어인 스랍(seraph)은 “번쩍이는 자”(사 6:2)또는 “비취는 스랍”을 뜻한다(살아남는 이들, 427; 비교, 복음 교역자, 21~23). 성경은 침례 요한이 “타오르는 등불이 됨으로 써” 복음의 소망에 대한 놀라움으로 청중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동시에 청중들의 마음을 영광스러운 진리로 비추면서 이 단어에 내포된 이중 개념을 예증하고 있다고 말한다. (193.2)
 그러고 나서 루스벨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여호와의 통치에 반역하기를 택하였다. 루스벨은 “창조함을 받은 모든 존재 가운데서 가장 높은”(시대의 소망, 758) 자신의 위치와, 그를 “하나님의 목적을 우주에 나타나는 데 제일 중요한” 위치에 있도록 한(시대의 소망, 758), 하나님께서 주신 자격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동등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사악한 야망에 사로잡히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이 야망이 그의 삶을 지배하게 되었다(사 14:12, 13). 루스벨은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늘에 엉터리 이야기와 불평심을 퍼뜨렸고, 하나님을 끌어내림으로써 자신을 올리려고 시도하였다. 루스벨은 결국에 가서 하나님의 정부에 대하여 중상 모략을 일삼아서 하늘 천사 중 1/3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공개 반역이 시작되어 “하늘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 루스벨과 반역한 천사들은 추방을 당하였다(계 12:3, 4). (193.3)
 루스벨은 원래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었다(겔 28:14). 성경이 사용한 단어는 마르샥(marshak)인데, 이 단어에서 메시야란 단어가 파생되었다. 오늘날 뒤돌아 볼 때 이 얼마나 아이러니칼한 사실인가! 하나님께서 구원자적인 빛의 선구자로 임명한 이가 너무나 자기 자신에 자만하여 어두움의 황태자인 마귀가 되어 버렸다. 반면에 루스벨이 계속하여 파괴하려고 하였던 일을 행하신, 루스벨이 멸시하고 제거하려고 하였던 루스벨의 창조자께서는 겸허하게 자신을 비우시고 사단이 파괴하려고 하였던 이들로 이루어진 자신의 빛의 나라의 주민들의 메시야가 되었다. (193.4)
 루스벨은 하나님의 존전에서 추방된 후에 도덕적 가치가 점점 더 퇴보하였다.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타락한 “덮는 그룹” 천사 루스벨에 대하여 말한다. “한 때 덮는 그룹이었던 그는 타락했던 당시를 생각한다. 빛나는 스랍,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 어찌하여 변하게 되었고, 어찌하여 타락하였는지!”(각 시대의 대쟁투, 669). 그룹과 스랍은 동일한 존재에 붙여진 명칭이다. 첫번째 칭호인 그룹은 그의 성품을, 두번째 칭호인 스랍은 그의 기능을 말하여 준다. (193.5)
 하나님께서 루스벨의 자리를 가브리엘로 대치하심
 여호와께서는 루스벨이 추방되어 공석이 된 직무에 가브리엘 천사를 임명하셨다(시대의 소망, 693, 780; 5BC, 1123). (193.6)
 가브리엘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계획을 죄에 빠진 인류에게 전하”여야 하고(시대의 소망, 99), 잃어버린 세상에 빛을 가진자로서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 (194.1)
 영감의 기록은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고 한 천사의 말은 그가 하늘 조정에서 높은 ∙∙∙ 지위로 보아 하나님의 아들 다음가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 보여준다”(시대의 소망, 99). 천사인 이 그룹/스랍은 그 후 지금까지 사단의 거짓말에 저항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나누어 주어 왔다. 이 천사는 인간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지자마자 영감받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영원한 빛을 드러내었다. 또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예수의 특별한 동행자이기도 하였다. (194.2)
 아담과 하와의 창조자는 아담과 하와를 낙원의 주인으로서 임명하시어 우주와 세계의 다른 모든 피조물들에게 창조자의 품성과 그 정부의 원칙들을 나타내도록 하는 특권을 주셨다. 하지만 그들이 사단의 궤변에 귀를 기울이고 하늘에 대항하여 반역하는 길을 택하므로 여호와의 계획을 헛되게 하였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대하여 가지고 계신 사랑과 계획에 대하여 그들이 증거하는 일도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194.3)
 에덴동산의 문에 배치된 그룹들
 첫번째 부부가 에덴에서 추방된 후에 그들의 갖고 있던 책임의 일부가 에덴 동산의 동편에 배치된 “그룹들”에게 주어졌다(창 3:24).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정관사는 모든 그룹들이 거기에 배치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룹들의 역할은 전 세계를 인질로 잡고 있는 이 전에 그룹이었던 사단의 간계를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는, 모세가 이 이야기를 기록함에 있어서 에덴동산의 그룹들의 모습에 관하여 어떤 설명도 부연하도록 하지 않았다. 이 그룹들도 화염검과 같이 상징이다. (194.4)
 “이 성경 구절에 관한 잘못된 견해(앞에서 말했듯이 터무니없는 견해)는 전능자가 그룹들과 화염검이란 상징물들을 공포스러운 광경으로서 놔두었다는 것과, 또 전능자가 이 상징물을 ‘사랑의 시기’(time of love)에 자비의 모형으로서 제정하는 대신에 진노하면서 배치하셨다는 견해이다”(W. B. Williams, Redemption Typically Seen at the Gate of Paradise, 111번 주). (194.5)
 창조자가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행동을 묘사할 때 쓰인 “쫓아 내”다(가라쉬<garash>, 창 3:24; 비교 4:14)라는 표현은 아브라함과 하갈의 “이혼”을 묘사할 때에도 사용되었다(창 21:10에는 ‘내어 쫓으라’로 번역되있음). 모세는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하나님께서 인류의 제일 처음 부모와 가지고 있던 가장 밀접한 관계를 깨어 버리는 것으로 묘사하였는가? 하늘 신랑이 관계가 소원하여진 신부를 “쫓아 낼” 때 겪는 고뇌를 신부가 쉐키나의 날개 아래 “모이라”는 초청을 거절할 때 신랑이 흘린 눈물이 말하여 준다(마 23:37, 38; 비교 룻 3:9; 겔 16:8). (1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