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이스라엘 - 세대주의 예언해석학 비판 - 제 12장 예언된 환란과 교회를 위한 희망
 누가복음은 데오빌로를 위하여(행 1:3) 그리스도의 예언에 대한 마가의 기록을 좀 더 정교하게 설명한다. (217.3)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 21:20-24).
(217.4)
 누가의 묘사를 예루살렘의 멸망 이외의 다른 것을 언급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AD 70년에 역사적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심지어 새 스코필드 주석 성경(NSRB)도 이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세대주의자들은 마태복음 24:15마가복음 13:14의 부인할 수 없는 병행구절들을 교회가 더 이상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다른 세대를 칭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사실, 스코필드 성경은 그리스도의 감람산 설교에 나타난 같은 단어들에서 다른 두번의 예루살렘 포위를 찾아낸다. (217.5)
감람산 설교에는 두 번의 예루살렘 포위가 나타나 있다. 하나는 AD 70년에 성취되었고, 다른 하나는 종말의 때에 성취될 것이다∙∙∙. 마태복음 24:15-28마가복음 13:14-26에 나타난 언급들은 마지막 포위이다. 그 때에 그 도성은 원수들에게 빼앗기지만 주께서 땅으로 돌아오심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26
(218.1)
 분명히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그런 해석은 주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세대주의 체계를 그리스도의 말씀에 억지로 끼워 넣으려는 선입견에 사로잡힌 미래주의에 의한 것이다. 그와 같은 해석은 마가와 마태는 AD 70년에 일어날 임박한 예루살렘의 황폐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고, 반면에 누가는 적그리스도가 “최종적으로 다시 모인” 유대인들을 위해 비축하고 있는 “마지막” 가증한 것과 환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18.2)
 그러면 광범위하게 마가의 본문을 따라간 누가가 왜 미래의 유대인들을 위한 그런 끔찍한 환란에 대해 철저하게 무시하였는가? 왜 그는 오 직 타이터스에 의한 임박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 결과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의 완전한 성취로서 유대인들이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된 그 일에만 초점을 맞추었는가(눅 21:22; 신 28:44.59; 단 9:26-27 참조)? 왜 그리스도는 그의 감람산 설교에서 교회를 위하여 있는 그의 제자들에게 멸망의 가증한 것에 관하여 같은 교훈을 주셨는가? (218.3)
 “거룩한 땅”으로 침입하는 로마 군대는 유대 땅의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다(마 24:15; 막 13:14 참조). 마태와 마가는 모두 단지 “가증한 것” 이 온다고만 하지 않고 멸망의 가증한 것을 언급하였다. 누가는 주로 이 방인인 그의 독자들에게 이 끔찍한 멸망은 이방인 군대와 함께 올 것이라고 설명하였다(눅 21:20 참조). (218.4)
 만일 세 공관복음이 예루살렘과 성소 멸망의 도래에 대하여 한 가지 같은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면, 그리스도는 다니엘 9:26, 27의 성취를 AD 70년 즉 자기 세대 내에 두신 것이다(마 24:34; 23:36; 눅 21:32, 22 비교). 누가가 AD 70년 타이터스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이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눅 21:22)이었다고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다니엘의 “일 혼 번째 이레”가 이스라엘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명과 로마인들에 의한 예루살렘의 끔찍한 파괴27에 의하여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확증하는 것이다. (218.5)
 코헨(G. G. Cohen)은 “역사는 로마 장군 타이터스가 마태복음 24:15 이나 데살로니가후서 2:3, 4의 멸망의 가증한 것과 일치될 수 있는 어떤 행동도 드러내지 않았다”28는 이유로 멸망의 가증한 것은 AD 70년에 성취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브루스(F. F. Bruce)는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219.1)
성전 지역이 로마인들에게 빼앗기고, 성전 자체는 아직 불타고 있을 때, 군인들이 그들의 군기를 성전 경내로 가지고 와서 동문 반대편에 세우고, 거기서 그것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전에 그랬던 것처럼 타이터스에게 임페라토르(승리의 지휘관)라고 외치며 환호하였다∙∙∙. 성전 구역에서 그런 희생을 드리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극도의 모욕이었다.29
(219.2)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면, 구주께서 다니엘의 70이레는 종말에 교회가 휴거한 이후 이스라엘에서 유대인들이 핍박을 받을 때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그 결과를 받게 될 때에 끝난다는 것을 확증하셨음을 알 수 있다.30 (219.3)
 임박한 휴거 기대에 대한 바울의 대답
 환란 후 휴거를 이중으로 확증하는 것을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살전 4:16)과 함께 오는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를 묘사하는 바울의 말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성경에서 그 이름이 언급된 유일한 천사장은 미가엘(유 9)이다. 그는 다니엘 12:1, 2에서 최후의 환란 후에 성도들의 부활과 관련되어 있다. 월부어드는 구약에 나타난 환란 후의 성도들의 구원과 부활에 대한 증거에 충분히 부담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구약에서 성도들의 부활은 환란 후라는 관점에”31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부활을 교회의 변화와 부활에서 분리해야만 한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구약의 성도들은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구절로 묘사되지 않기 때문이다.”32 (220.1)
 이러한 문자적 주장은 지지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대부분의 그의 서신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묘사하는 전형적인 구약의 표현인(벧전 2:9과 비교) 성도들에게 보냈고, 구약의 성도들을 메시아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고전 10:14 참조; 히 11:24-26과 비교). 데살로니가인들에게 교회의 휴거 때에 천사장(이스라엘의 수호자)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한 바울의 의도적인 진술은 구약과 신약 성도들의 부활은 한 부활로서(요 5:28, 29 참조)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라는 너무나 분명한 확증이다. 월부어드는 자기의 주장을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휴거와 부활을 경험할 때 이스라엘의 수호자인 천사장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다른 무엇을 의미하였는가? 데살로니가전서 4:16에서 그 때에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들린다는 바울의 또 다른 진술도 같은 사상을 추가로 지지해 주고 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포로와 환란이 끝날 때에 “큰 나팔을 울려 불”(사 27:13) 것이며 “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아 그 날에 여호와께서 ∙∙∙ 너희를 일일이 모으시리라”(12절)고 예언하였다. 바울은 이 예언이 그리스도의 극적인 파루시아와 교회의 휴거 때에 영광스럽게 성취될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220.2)
 월부어드는 또한 데살로니가후서 2:1-12도 바울이 단지 “예언된 주의 날이 아직 미래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들이 겪는 현재의 핍박이 그 날(주의 날)을 위한 것이라고” 염려하지 않아야 했다는 이유로 “환란 후 휴거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33 그러나 이 성경 구절과 그 문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좀 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바울은 틀림없이 주의 날이 이미 시작되었거나 최소한 그것이 임박한 때에 일어날 것이라는 거짓 가르침(틀림없이 바울 자신의 이름으로 진행되었을)을 교정하기 위하여 이 서신을 썼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이 이러한 사상의 영향으로 마음이 흔들려 일상의 일을 중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었다(3:6-15 참조). 바울은 언제라도 주의 날이 임한다는 이러한 속임수를 고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교회에게 이 전에 그가 주의 날이 있기 전에 먼저 역사 속에서 발전해야 할 예언적 의미를 지닌 징조들에 대해 가르쳤던 바를 환기시키고 있다(2:3-5).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 때에 교회만이 “그 앞에 모이는 것”(1절)이 아니라 불법의 사람(적그리스도)가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8절) 멸할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것은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환란 후 강림을 분명하게 의미한다. (221.1)
 이러한 결론은 데살로니가후서 1:5-10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그리스도의 오심을 두 국면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결론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세대주의자들은 교회는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로 멸망을 당하기 칠년 전에 그리스도에게 비밀스럽게 모인다고 가르친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한 바울의 명확한 언급은 어떤 비밀 휴거론도 효과적으로 논박한다. 그가 말하는 바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모이게 되는 것과 핍박하는 적그리스도의 멸망은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221.2)
 바울의 분명한 교훈을 피하려는 세대주의 작가들의 노력은 진기하다. 어떤 이들은(그들이 휴거에 적용하는) “그리스도의 날”과(그들의 보기에 이스라엘을 위한 환란과 하나님의 심판이 이어지는) “주의 날” 사이의 인위적 구분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이 불법한 자가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배도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는데 어떻게 적그리스도에 의한 환란이 주의 날에 포함될 수 있는가?34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살후 2:3) 한다. (221.3)
 모든 사람들이 이 불법의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스스로 자신을 신성시하여(4절)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큰 환란을 가져오는 묵시적 적그리스도라는 결론을 받아들인다. 이 배도는 유대인들만을 위한 메시지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들과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적그리스도를 알아서 거짓 파루시아의 임박성 때문에 혼란을 느끼지 않을 필요가 있다. 그들은 “주의 날”이 다가옴을 살피고 준비하여야 한다. (222.1)
 결국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바울의 첫 번째 편지를 오해하여 그들이 환란 전에 휴거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군드리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이 임박한 미래에 있다고 잘못 결론을 내려, 일도 하지 않고 광적인 흥분과 무질서에 사로잡혀 있었다”35고 하였다.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에서 하고 있는 대답은 그와 같은 임박한 휴거론에 대한 반박인 것이다. 파루시아와 휴거가 있기 에 묵시적인 환란이 반드시 먼저 온다는 것이다. (222.2)
 환란 후 그리스도의 재림을 회피하려는 다른 노력은 데살로니가후서 2:3헤 아포스타시아(he postasia)에 대한 억지 주석이다. 그들은 이 단어가 적그리스도의 배도나 반역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와 환란이 일어나기 전에 교회가 지구를 떠나는 휴거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아포스타시아(apostasia)라는 단어는 신약과 칠십인 역에서 신앙적 변절 즉 믿음에서 떠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만 사용되었다.36 그것은 결코 교회가 지구를 떠나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데살로니가후서 2:3에서 그것은 개역표준역(RSV)이나 새국제역(NIV)에 모두 “배도(the rebellion)”라고 제대로 번역되었다. “배도” 앞에 놓여 있는 정관사 “헤(the)”는 바울이 전에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가르쳐 준(5절) 잘 알고 있던 그 배도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제 바로 그것을 이어지는 구절들 특히 4, 9, 10절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 묵시적 배도는 적그리스도를 따라 고의로 사도적 믿음에서 떠나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에게는 환란의 때인 것이다. 바울은 교회에게 이 증가하는 배도를 살펴보아 파루시아 즉 주의 날이 도둑같이 이르지 않도록 하라고(살전 5:1-6) 촉구한다. (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