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이스라엘 - 세대주의 예언해석학 비판 - 제 12장 예언된 환란과 교회를 위한 희망
교회는 로마서 16장에 이르기까지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디모데후서, 디도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유다서와 같은 책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만일 우리가 수많은 신약의 증거들을 교회와 상관이 없는 중립적인 것으로 제쳐 놓으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구절을 현 시대의 성도들에게 적용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으로서 ‘교회’라는 용어를 언급할 수도 없고 생략할 수도 없을 것이다.5
(206.3)
 더 나아가 요한계시록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셀 수 없는 많은 무리가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큰 환난에서 나”(계 7:14)온 자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환란에서 나온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큰 고난을 겪는다(계 7:16, 17). 우리는 요한이 환란을 겪는 성도들과 그리스도인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유대인들 중에서만 나왔다고 확언할 수 있는가? 심지어 그는 이 승리한 신자들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계 7:9)에서 나왔다고 분명히 언급한다. 이 큰 환란은 완고한 사람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신원하시는 진노가 아니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성도들에게 임하는 극심한 핍박 간단히 말해 사단의 분노를 가리키는 것이다. (207.1)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그를 인해 고난과 환란을 겪게 될 것이며 심지어 신앙적 열심 때문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고 미리 경고하셨다(요 16:2, 33 참조).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는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1:9; 행 14:22; 롬 5:3 비교)고 하셨다. (207.2)
 요한계시록 6장에서 20장에 나타나는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교회로 보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해석을 피하려면 요한계시록 4:1“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는 구절도 교회가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휴거를 가르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억지스러운 주석은 심지어 군드리(R. H. Gundry)와 같은 세대주의 저자들도 부정하고 있다. 그는 문자적 주석은 이 말들이 요한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이 일 후에”(meta tauta)라는 구절은 새로운 계시를 받을 요한 자신의 경험의 순서를 언급하는 것이 된다. 지상에서 이상을 본 이후 요한은 이제 하늘에서 새로운 이상을 보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상들에는 시간이나 성취되어야 할 세대의 순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207.3)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는 극심한 환란을 겪으나 승리할 것이며 적그리스도의 최후의 큰 환란도 견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살전 3:3; 요일 2:18; 4:3; 마 16:18 참조).6 바울은 교회는 환란을 겪을 것이라고 기록하였다(살전 3:3).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살전 5:9)고 덧붙였다. 결국,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핍박으로 인한 환란과 완고한 세상을 향해 하나님이 정하신 신원하시는 진노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207.4)
 요한계시록 16장의 묵시적 일곱 재앙 동안에 지상의 교회는 마치고 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열 재앙 때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거룩한 보호의 약속을 받는다(계 3:10, 11; 14:20; 16:15; 출 11:7).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에 의해서가 아니라 적그리스도인 바벨론에 의해 마지막 환란 동안 핍박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마지막 위기의 때에 하늘로부터 악한 바벨론에 부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하나님의 백성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보호받고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계 16; 18:4; 19:11-21). (208.1)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바는 교회의 환란 전 휴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환란 후 그리스도의 재림만을 제시한다. 신약의 다른 묵시적 구절들도 이 결론을 확인해 준다. 그리스도와 바울은 교회의 큰 환란이 먼저 있고, 그 후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강림과 교회의 구원이 있는 이 순서를 부인할 수 없도록 명확히 묘사한다. 환란 전 파루시아 즉 교회의 비밀 휴거는(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신약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인과 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교리적 편견에 기초한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교리를 위하여 본문에 억지로 부과한 것이다. (208.2)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백성들에 대한 구별은 근본적으로 오직 성경이 여호와와 그리스도, 이스라엘의 구주와 교회의 구주를 구별할 때만 타당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단호하게 두 무리를 위한 한 목자를 주장하셨다. 그 목자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같은 운명을 지닌 한 우리 곧 새 예루 살렘에 모으기 위하여 오셨다(요 10:14-16; 계 21장 참조). (208.3)
 환란 중 그리스도의 보호에 대한 약속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가 환란 전에 세상으로부터 휴거할 것이라고 약속하신 적이 전혀 없다. 반대로 그는 아버지께 드리는 그의 간구에서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라고 하셨다. 세상으로부터의 “휴거”와 세상에서 “악으로부터의” 보호 사이의 대조는 명확하다. (209.1)
 그러나 그리스도는 비밀 휴거든 공개 휴거든, 교회를 지상에서 취하여 가고 세상에는 오직 악인들만 거하게 되는 그런 휴거 사상을 분명하게 거절하였다. 그가 구한 바는 다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기를 [tereinek]” 간구하였다. (209.2)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능력의 필요에 대해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절)라고 기도하며 설명하였다. 하나님의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힘이 필요한 것은 교회가 악한 영역 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3:10에서 그리스도는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10)고 약속하였다. (209.3)
 군드리(R. H. Gundry)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이 구절들에 대해 예리하게 설명하였다. “분명히 암시되어 있는 바는 만약 그들이 주님과 함께 세상에 있지 않다면 보호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시험의 때를 면한다면, 보호가 필요하지 않다.”7 (209.4)
 월부어드(J. F. Walvorrd)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헬라어 테레이 네크(tereinek)의 의미는 ‘∙∙∙로부터 지키다’ 이지 ‘∙∙∙안에서 지키다’가 아니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 교회는 [환란의] 때가 오기 전에 구원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받았다”8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헬라어 의미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예수께서 요한복음 17:15에서 사용하신 같은 헬라어 동사의 용례에 의해 반박되고 만다. (209.5)
 예수께서는 이 표현(“보존하시기를”)을 교회를 세상에서 데려가는 개념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의미에 두셨다. 대신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권능을 통하여 승리의 구원으로 귀결되는 보호를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보좌 앞의 셀 수 없는 큰 무리에 관하여 요한에게 말하는 장로들 중 하나가 “이는 큰 환란에서 나온 자들”(계 7:14) 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강조된 것은 환란의 기간이 아니라 그 환란에서 나오는 승리의 출현이다. (210.1)
 월부어드가 그렇게 한 것처럼, 요한계시록 3:10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약속은 환란의 때 이전에 있을 교회의 휴거를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강조하신 바를 그 시기 동안에 겪는 교회의 경험에서 환란 그 자체의 시기로 옮긴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런 합리적인 구분은 이 구절에서 ‘시간’은 단지 때의 경과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현저한 경험 즉 환란을 언급하는 그 특별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요 2:4; 7:30; 8:20; 12:23, 27; 13:1 참조).9 (210.2)
 그리스도는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종말론적 환란의 때에서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만일 이것이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환란 전 휴거를 의미한다면, 왜 바벨론 포로에 관하여 고대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유사한 약속은 바벨론 환란으로부터의 환란 전 휴거가 아닌가? (210.3)
 “슬프다 그 날이여 비할 데 없이 크니 이는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 이로다마는 그가 이에서 구하여 냄을 얻으리로다”(렘 30:7). 이 본문은 단지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을 겪은 후 야곱의 환란의 때로부터 구원받을 것을 약속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3:10도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환란 전 휴거를 약속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환란과 핍박으로 인해 시험받는 시기에 있을 거룩한 보호를 제시한다. (210.4)
 마태복음 24장에 나타난 환란 후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세대주의의 주요 신조 중의 하나가 “언제 어느 때라도 일어날 수 있는”10 임박한 비밀 휴거와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한 교리이다. 군드리(Gundry)는 좀 더 완전히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바는 임박함 이란 우리가 아는 대로 어떤 예고된 사건도 그리스도의 오심보다 꼭 선행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 개념은 세 가지 근본적인 요소 즉 돌발성, 예기치 않음이나 예측불허, 그리고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통합하고 있다.”11 (2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