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타난 구원 시편 27편 승리하는 믿음
 놀라운 것은, 다윗의 믿음이 보여주는 목적에 대한 단호한 결심과 초지 일관 곧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하는 것이다. 그의 생애의 불타는 열정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맛보고 궁극적 확신을 갖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것이었다. 그는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기를, 그의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간직하기를, 그리고 그의 생애를 위하여 하나님의 조언을 구하기를 원하였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본질이요 제자됨의 근본 도리이다. (240.1)
 “여호와의 집에 거한다”는 것은 그의 성전에서 여호와께 예배드린다는 뜻이다. 다윗은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름답고 은혜로우신 분임을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이와 같은 매력을 발견하거나 구원의 하나님에 대해 이와 같은 열정을 갖는 신자들이 별로 많지 않은 듯하다. (240.2)
 어떤 방법으로 다윗은 하나님을 구하고 찾았으며, 자신의 탄원에 대해 어떻게 응답을 받았던가? 이방 신자들이 하나님을 찾는 그런 방법으로가 아니었다. 이방인들은 성전에서 몇몇 금신상이나 우상을 바라보았다. 오늘날도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힌두 사원이나 불교 법당을 방문하여 그 신들의 고대 조각품과 얼굴을 우러러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흉상 따위의 그림을 갖고 있지 않았다. 둘째 계명은, 하나님을 새긴 우상이나 형상이라면 어떠한 것이라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법궤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히브리 신자는 그가 희생의 양을 가지고 와서 성전 안에서 행하는 행사를 지켜볼 때 하나님의 품성과 뜻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다. 레위 제사장은 그 모든 상징적 의식의 의미를 가르쳤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알고자 질문하였던 것이다. (241.1)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웠을 때,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여쭙고 있었다.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삼하 5:19).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조언해 주시는 것이었다(삼하 5:23, 24). 그러므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중심적 통치자였다. (241.2)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같은 열심을 어떻게 개발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께서 나사로의 집에 유하셨을 때,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주님께 시중들었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듣기 위하여 주의 발 아래 앉아 있었다. 마르다가 이를 두고 불평했을 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241.3)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1,42). (242.1)
 마리아는 하나님을 찾는 데 굶주려 있었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된 소중한 특권 때문에 가사 일을 소홀히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관해 말씀하셨을 때, 마리아는 경청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녀의 인생에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명심하였다. 우리도 마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경청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있다. 신약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을 신중하게 탐독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이 힘찬 증거들은 결코 낡아 빠진 구시대의 유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의 기초요, 그리스도인 신앙의 원천으로 남아 있다. 이 복음서들의 목적은 단지 예수님의 생애와 업적에 관한 사실에 대하여만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이 아니고 보다 더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242.2)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242.3)
 그리스도만이 오직 죄의 짐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며 우리 영혼의 충족, 즉 창조주와 기쁨 넘치는 교제를 갖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수 있으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복음서에 나타난 갖가지 유형의 죄인들과 동일시 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치유하시고 또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들이 받은 구원과 기쁨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243.1)
 사울의 변화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관한 하나의 뚜렷한 본보기이다. 사울은 하나님에 대한 맹목적 질투로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는데 이는 그들이 유대인의 어떤 전통을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의 구세주이셨음을 발견했을 때, 그의 영혼은 영원히 구세주 예수께로 귀의하고 말았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로서 바울은 종종 자신의 죄를 기억하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중보의 보혈을 통한 죄의 용서를 믿었다. 믿음으로 그는 한 가지 일을 결심하였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 14). 이와 같이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개인적인 용서와 확신, 기쁨과 능력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하늘 성전에 들어오라는 초청을 받고 있다(히 10:19~22; 4:14~16 참조). 이것이 승리하는 믿음의 길이다. (243.2)
 다윗은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시 27:6)라고 부언(付言)했다. 이 표현은 “여호와 께서 내게 승리를 허락하실 것”이라는 뜻이다(시 3:3; 110:7과 비교). 하나님과 연합함으로써 다윗은 승리자가 되었다. (244.1)
 다윗의 “환난의 날”(5절)은 특별히 그의 대적들이 성전 재판관 앞에서 거짓 상소를 했던 그 날을 말한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실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5절).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영혼을 거짓 고소자들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하여 성전 안에 피난처를 제공하신다. 그러므로 다윗은 기쁨의 환호로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갈 것을 미리 서약하고 구원받은 후에 감사 찬송 드릴 것을 맹세하는 것이다.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244.2)
 탄원의 기도
 시편 27편의 둘째 부분에서 다윗의 기분은 철저하게 뒤 바뀐다. 그 넘쳐흐르던 확신의 표현이 갑자기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애통과 비굴한 애원으로 바뀐다. (244.3)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시 27:7~9)
(244.4)
 다윗은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구세주 되시는 하나님께 호소하며 지난날의 하나님의 자비하신 행위를 그분께 상기시키고 있다. 그는 지금 심각한 도움을 구하는 자신으로부터 하나님의 얼굴을 감추지 마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이미 왕에게 “내 얼굴을 찾으라”(8절)고 말씀하셨다. “내 얼굴을 찾으라!”“하나님의 전에 들어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명령은 우리 각자에게 하시는 명령이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추구는 사실로 우리의 독창적인 시도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필요를 깨닫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고 계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찾으심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다윗의 마음은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8절)라고 절실히 응답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드리워진 사랑에 응답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245.1)
 당신의 얼굴을 찾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특권인가! 다른 시편에 하나님의 선도(先導)가 보다 온전히 표현되고 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 15).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빚지지 않았고 그분께서 그에게 화내실 이유를 쉽게 찾으실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시 27:9)라고 근심에 싸여 탄원하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상왕인 사울 왕을, 그가 회개하지 않았음으로 해서 실제로 거절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께 더더욱 매달리는 것이다. “구원의 하나님이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9절). 다윗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그의 모든 부귀보다 더 소중하게, 왕권이 주는 모든 쾌락보다 더 감미롭고 자신의 부모의 사랑보다도 더 포근하게 여겼다. (246.1)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 27:10)
(246.2)
 시편 기자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은 듯하다. 사람들은 그의 불행을 인하여 그를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하나의 죄인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당신께로 나아오는 눈물의 죄인을 자녀로 삼아 주신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부모” 가 되실 때, 그는 이미 하늘 아버지 집에 거하게 된다. 그 때 하나님의 사랑은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혼은 거듭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계신다. (246.3)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사 49:15, 16)
(2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