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요한복음 제III부 예수께서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심 (5-12) 제 9 장 선한 목자가 생명의 빛을 가져옴 (9:1-10:21)
 그러므로 이 장의 이야기는 제2 세대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회당에 있을 자리를 상실하고 예수를 따르기로 한 것이 바른 일인지 의아(疑訝)해 하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세기말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또 다른 시도들은 12:42, 4316:2에서 볼 수 있다. (214.1)
 그 당시 유대인들은 보상과 형벌이 제3 또는 제4 세대까지 걸쳐 시행된다고 믿고 있었다. 질병에 걸렸을 때, 거기엔 반드시 영적인 원인이 있었다. 그래서 한 아이가 소경으로 태어났다면, 이는 부모나 조부모가 범죄했던지, 앞으로 지을 죄를 하나님이 앞당겨 벌하심을 의미했다. 하지만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은 “조상들의 공로” 덕분이었다. 아브라함과 모세 같은 조상들이 매우 철저한 순종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후의 유대인 세대들의 죄의 결과를 경감시키는 많은 공로를 쌓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8:33, 39)라는 진술 속에 내비쳐진 그들의 자부심의 이유를 설명해 준다. (214.2)
 문단의 세부 사항
 9:2에서 제자들이 이 사람의 상태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즉 그 자신에게 있는지 또는 그의 부모에게 있는지를 질문했을 때, 그것은 그 당시의 신학을 표현한 것이다. 그들은 모든 질병과 장애는 특정한 죄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느낀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는 신속히 대처하셔서 이 신학을 부정하심으로써(3절) 보상과 형벌이라는 전체 유대교의 체계를 부정한 것이 되었다. 많은 질병이 죄의 직접적인 결과이거나 나쁜 건강 습관에 기인하는 것도 사실인 반면에, 사람들이 병들거나 장애자가 되는 다른 이유들도 있다. 이 문단의 기별들 중의 하나는 질병과 불구가 때로는 하나님의 역사가 독특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배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214.3)
 그 사람의 눈에 진흙을 바르신 후 예수께서는 그가 진흙을 씻도록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적어도 1,200야드(약 1,100미터)나 떨어진 실로암 연못으로 그를 보내셨다. 그 사람의 눈은 예수 옆에서 열린 것이 아니라 연못가에서 열렸는데, 이는 예수의 말씀이 그가 만지는 것만큼이나 좋은 것이라는 요한복음의 주제를 다시 확증하는 것이다. (214.4)
 그의 이웃들이 그 사람과 흥미로운 대화를 주고받은 후에(8-12절), 그들은 그를 바리새인들에게로 데려가서 질문하였다(13절). 치유한 날이 안식일이었고(14절), 그 사람은 소경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를 서둘러 치유할 필요가 없었다. 이 사실이 바리새인들을 심각한 딜레머에 빠뜨렸다(15, 16절). 한편, 어떤 이들은 치유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의 역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솔선해서 안식일에 치유한 것은 그가 죄인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왜냐하면 위대한 일들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에 상반되는 것을 행하거나 가르치는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이기 때문이다(신 13:1-5). 이런 행위를 하면서 예수께서는 그들의 철학적 사유(思惟)의 능력을 넘어선 문제를 생각하도록 촉구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실로 큰 모험이었다! 치유받은 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적을 행하는 것이 누군가?가 선지자임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인간 역사에 전례가 없는 이적을 행하는 것은 메시야 도래를 알리는 것이 아니겠는가(요 9:32, 33)? (215.1)
 비록 그 사람의 부모는 진리를 알고 있지만, 그 결과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말하기를 거절했다(18-22절). 그러나 그들이 그 아들에게 비슷하게 침묵을 지키도록 권고했어도 별 소용이 없었던 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빈정대는 듯한 경멸로 인하여 그가 더욱 더 담대해졌기 때문이다(27, 30-33절). 종교 지도자들의 불신은 그 치유받은 자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30절). 그들의 최후의 진술에서 그들조차 그 치유가 유효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을 드러내었다(34절). 그래서 그들의 반대는 깊이 생각한 논쟁이 아니라, 맹목적인 증오에 기초한 것이었다. 예수가 그들의 수중(手中)에 있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예수가 치유한 사람에게 그들의 분노를 퍼부었다. 이것은 제2 세대에게 저들의 그리스도인 행보를 방해하는 자들은 또한 예수를 핍박했다는 사실을 예증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분의 고난에 참여한 것처럼 그분도 그들의 고난에 참여하셨다. (215.2)
 35-41절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이야기를 위한 배경을 마련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쫓겨난 자들을 돌보신다. 한 종교 제도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향한 그 지도자들의 증오로 인하여 사람들을 쫓아낼 때, 그들은 그들 자신의 소경 됨을 과시하고(39-41절), 예수께서 쫓겨난 자들을 친히 모으실 기회를 그분에게 제공한다(35-38절). (216.1)
 문단의 주요 주제
 예정과 인간의 책임
 요한복음의 주요 문제는 9장의 마지막 몇 절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39절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사건들을 주관하고 계심을 분명히 나타내셨다. 그는 심판하러 오셔서,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39절) 하셨다. 여기에는 어떤 인간적인 선택이나 책임을 암시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 응답하면서 예수께서는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눈 먼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셨다(41절). 다른 사람이 그들을 눈 멀게 한 것이 아니다. (216.2)
 그러므로 요한복음 9:39-41에서 우리는, 한편으로 하나님이 사건들을 주관하신다는 사실과,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여전히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사실 사이에 역동적 긴장(dynamic tension)이 있음을 볼 수 있다(내가 말하는 “역동적 긴장”의 의미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Paulien,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End-Time, 80을 보라). (216.3)
 동일한 역동적 긴장은 이 복음서 전반에 걸쳐 발견되는데, 12:37-43은 훌륭한 예가 되고 있다. 이 문단은, 예수께서 많은 이적적인 기사(奇事)들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주고자 한다(37절). 이 질문에 대하여 두 가지 답이 주어졌다. 첫째로, 많은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이유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기(39, 40절)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원어는 더 확실하다: 하나님의 행위 때문에 “저희가 능히 믿을 수 없었다”(39절). 둘째로, 그를 믿는 자들 중의 다수가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려 하지 않은 것은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42, 43절). 불신은 이중적인 원인을 가진다. 즉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행위에 기인하고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행위에 기인한다. (216.4)
 믿음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조건이 된다는 사실이, 요한복음 전반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취해야 할 태도이다(3:18, 36). 인간에게는 불신에 대한 어떤 변명도 허용되지 않으며(15:22; 12:47), 불신은 궁극적으로 의지의 결핍의 결과이다(5:40; 7:17). 사람들이 예수께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그들이 나아오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217.1)
 제4 복음에서 불신은 도덕적 문제가 있음을 알려준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오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뭔가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3:19-21; 5:44; 8:37-47). 자기 자신과 더불어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죄는 두 가지 선택만을 남겨준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 그리고 죄를 고백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죄를 고백하여 자기 자신 및 우주와 더불어 화평을 누리든지, 아니면 자신의 구속받지 못한 죄됨의 현실에 맞게 자신의 신학을 바꾸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할 수 있다. (217.2)
 그러므로 대부분의 이단의 배후에는 도덕적인 문제가 있다. 사람들의 신학이 그들의 생활 양식에 맞도록 바뀌고 있다. 이것은 심리학이 발견한 사실들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고 있다. 조사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이 믿는 바가 그들의 사는 방식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적 및 육체적 문제와 알코홀 및 마약 남용의 문제가 교회에 정규적으로 잘 출석하는 교인들 사이에서도 세속의 사람들과 비슷한 비율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결과가 달라진다. 한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그가 믿는 것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알고 있는 죄를 고백하여 용서받지 않고 계속 범하면, 그것이 마침내는 자신의 믿는 바를 바꿔놓고 말 것이다. (217.3)
 그러나 위의 사실이 제4 복음에 나타나는 그와 반대되는 현실을 간과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요한복음 6:36-47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37절). 즉 하나님에 의해 이끌리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44절). 그러나 이 문단에서도, 믿음이 하나님의 개입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는 반면에,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이끌릴지 안 이끌릴지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허용되어 있다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37, 40절).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45절). (218.1)
 그러므로 제4 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 강력한 역동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그를 이끌도록 선택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다. 궁극적으로 예수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를 이끄시는가? “저희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느니라”(45절; 또한 사 54:13을 보라). 예정 교리의 위험은 그것이 무엇을 인정하는가에 있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부정하는가에 있다. 예정론이 하나님이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는 원인이 되심을 인정하는 것은 옳다. 자신이 위대한 그리스도인임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중의 아무도 그리스도와 동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정론이 우리가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자신에게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이다. (218.2)
 요한복음은 반복하여 인간은 이 사실에 대한 선택권을 가지고 있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제4 복음에서 궁극적으로 가장 큰 죄는 바로 불신이다(16:9; 9:41). 그처럼 큰 구원과 하나님의 이끄시는 능력에도 불구하고 믿기를 거절하는 것은 너무도 엄청난 죄인 것이다. 오늘날에도 성령이 깨우쳐서 믿게 하는 사역을 하지 않으시면 불신의 죄를 깨달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16:8). 그러므로 영적인 역량(力量)을 자랑하는 것은 모든 자랑 중에서 가장 가련한 것이다. (218.3)
 이러한 역동적 긴장은 다음과 같이 할 때 가장 훌륭한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때, 내 삶 속에 모든 영적인 진보는 하나님의 강한 역사에 힘입은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미래를 바라볼 때, 그와 같은 진보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내가 해야 할 선택들이 있다는 것도 또한 분명하다. (2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