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야고보서 제IV부 긴장 (4:1-5:6) 8. 도덕적 긴장 (4:1-12)
 비록 하나님의 요구가 엄격하고, 악에 대한 대항과 그분의 시기하심이 강렬하지만, 그분의 은혜도 풍부하다고 야고보는 우리에게 확증한다. 그는 “그러나 그분은 더 큰 은혜를 주신다”, 즉 그분의 은혜는 그분의 심판보다 더 풍부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수령인은 어떤 사람도, 모든 사람도 아니다. 잠언 3:34(“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의 인용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의 제한성을 증명한다. 오직 스스로 겸손하여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자들만이 이 선물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4:6). (188.3)
 순복과 높임
 야고보가 다음 문단을 “그런즉”이라고 시작함은 잠언에서의 인용구절이 뒤따라오는 열 가지의 명령들과 밀접히 묶여있음을 가리킨다. 이 모든 명령들이 헬라어 문법상 부정과거로 쓰여진 사실은 야고보가 그의 독자들에게 기별의 긴급함을 인식하기를 원했음을 알려준다(R. P. Martin, 152). (188.4)
 야고보가 요구하는 첫 번째 태도는 순복이다(7절). 교만함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손한 사람이 만일 순복한다면 그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야고보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의 독자들은 하나님께 순복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한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189.1)
 신약 성경에는 대적해야할 영적인 세력으로 마귀를 제시하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그 같은 대립의 가장 전형적인 예는 우리 구주께서 봉사하시기 전 광야에서의 예수님과 사단과의 대립이다(마 4:1-11; 눅 4:1-13). 또한 에베소서의 구절에서도 동일한 인상적인 구절이 있는데, 교회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것과 마귀의 책략과 싸우라는 교훈을 받고 있으며(엡 6:10-18; 비교 4:27), 베드로전서 5:8, 9에는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저를 대적하라”라고 한다. (189.2)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에게 그들이 마귀를 대적할 때 마귀가 그들을 피할 것이라고 보증한다. 이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순복하는 모든 자들에 대한 보증이다. 바로 이 생각과 맥락을 같이하여 엘렌 화잇도 사단은 그리스도 안에서 피난처를 구하는 가장 연약한 자들 앞에서 떨며 도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화잇, 시대의 소망, 131). (189.3)
 마귀를 대적하라는 부정적인 강조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4:8)는 긍정적인 부르심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야고보는 그의 청자들에게 이보다 더한 일을 하기를 바란다. 그는 그들에게 죄인으로써 손을 깨끗이 하도록 촉구한다. 이 말은 고대 유대 의식가운데 사체를 만진 제사장들은 성소나 성전에 들어가서 그들의 의무를 실행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도록 하는 것에서 유래되었다(출 30:17-21). A.D. 1세기부터 랍비들은 모든 유대인들이 의식적 부정함을 면하기 위해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을 의식적 의무사항으로 받아들였다. 예수께서도 그의 제사들에게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문제를 환기시켰다. 예수님처럼, 야고보도 의식적인 씻음은 거절하고, “외부의 사회적 관심과 행동과 함께 마음의 경향”(R. P. Martin, 153)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89.4)
 야곱 공동체가 “그들의 손을 씻도록” 요구받았던 것과 같이, 그들은 이제(혹은 그 이상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켤케 하도록 권유받는다. (이것은 시편기자의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한 자에 대한 요청을 상기시킨다—시 24:3, 4). 가장 우선적으로, 야고보의 초점은 그들의 행동과 행위에 있으며, 그 다음으로 그들의 생각에 있다. 뒷부분에서, 그는 그들을 “두 마음을 가진 자”라고 말한다. 이 말은 1:6-8에서 그가 사용한 것과 같은 단어인데, 그들의 “두 마음”은 의심과 요동함으로 형성되어졌다. 이 문맥에서, 문제는 충성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Ralph Martin의 견지는 여기에서 유익하다: (190.1)
 야고보의 청중들 앞에 놓인 주요 문제는 그들의 주저함과 우유부단함인데,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이 흔들렸고 그릇된 소망으로 빠져들며 셀롯 당파주의자들에 의해 “악마적인” 길로 들어가는 유혹을 받았다.... 사실상 ...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원수, 마귀(4:7; 참조 3:15: 이 “지혜”의 근원은 “마귀적”이다)이든지 벨리알(T. Asher 3:2에서 처럼)이든지 세상(4:4)이라 불리는 것 사이에 선택이다. 이 세력들은, 그분의 백성들이 모든 “시기”(4:5; 또한 3:14-16)와 “다툼”(3:14)을 반대하는 성실함을 갖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과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인 입장에 있는데, 시기와 다툼은 너무 저속한 것이어서 그 충성심과 피상적이며 매혹적인—실제로는 곡해된—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쟁”“살인”을 수반하게 된다(143). (190.2)
 야고보는 그 같은 이중적 충성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한다. 그 같은 생각과 행동은 성결케 함이 필요된다. (190.3)
 야고보는 깨끗함과 성결함의 구약의 제사장적인 용어에 만족하지 않는다(4:8). 그는 지금 선지자적 용어를 사용한다. 구약의 대선지자와 소선지자처럼, 그는 회개를 위한 울려퍼지는 호소를 한다. 그는 소리친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9절). (190.4)
 물론, 우리는 이 말씀을 그들이 마치 “즐거움을 없애”도록 강요받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고행생활을 요구받은 것이 아니다. 사실은 이 문맥에서 회개에 수반되는 한 가지 적절한 반응이 슬픔이라는 것과, 특히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적대감으로 형성된 감정이 어리석은 웃음과 의미 없는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191.1)
 슬퍼하며 애통하며 우는 것에 반영된 겸손함이 높임의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10절)고 야고보는 말한다. 야고보의 이 가르침은 겸손한 가난한 자는 높아지고 자랑하는 부자는 낮아지는 1:9-11의 그의 주장을 반영한다. 이것은 또한 예수님의 바리세인과 세리의 비유의 마지막에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4)고 말씀하신 바를 명령형으로 반복하고 있다. 또한 빌립보에 보낸 바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는 순종–높임 모티브의 표준이며 최고의 모본으로 제시된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신다”(빌 2:8, 9). (191.2)
 비방과 판단
 여기까지, 야고보는 그의 공동체 안에 있는 대부분의 갈등의 근원이 되는 다양한 도덕적 죄악에 대해 공격해 왔다. 이제 그가 경제적인 갈등으로 넘어가기에 앞서 한 문제를 더 다룬다. 이 도덕적 문제는 혀와 그것의 오용에 대한 이전의 그의 관심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진 것이다(1:26; 3:1-12을 보라). 이 부분에서 그의 특별한 관심은 비방이다. 그는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4:11)고 말한다. 헬라어 부정 접속사 가 현재 명령형의 문법 구조에 사용된 것은 그의 독자들이 서로가 비방하고 헐뜯는 일을 습관적으로 하고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그들에게 그 같은 비방을 그만두도록 훈계한다. (191.3)
 성경은 비방과 무책임하며 악의에 찬 험담과 단순히 서로에게 악한 말을 하는 것에 대한 정죄로 가득 차 있다(레 19:16; 시 50:20; 101:5; 잠 18:8; 26:22; 롬 1:30; 고후 12:20; 벧전 2:1). 하지만, William Barclay가 주석한 것처럼, “보통의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즐기는 행동은 거의 찾을 수 없다; 특히 어떤 특정한 사람에 대해 비방하는 이야기를 듣거나 말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주 재미있어하는 행동이다”(111). (192.1)
 야고보는 왜 비방이 잔인무도한 것인가에 대한 흥미로운 이유를 제시한다: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4:11). 그 같은 행위는 희생자에게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공격하는 것이다. 야고보가 여기서 언급한 율법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아마도 레위기 19:18의 최고의 법(“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과 관련이 있는 듯한데, 특히 이 구절은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라”(16절)는 명령에 곧이어 나오기 때문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에 충실한 것이며 이웃을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192.2)
 야고보는 비방과 판단에 대한 그의 정죄에 대한 또 다른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리에 대한 침해이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4:12). 야고보는 하지 않았지만, 그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는 예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첨가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웃을 비방하는 사람은 실제로 그가 판단받게 된다. 하나님의 고유권한을 침해함으로, 그런 사람은 오직 하나이신 입법자와 재판자에게 심각하게 심판받게 될 것이다! (192.3)
 ■ 말씀을 적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