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야고보서 제IV부 긴장 (4:1-5:6) 8. 도덕적 긴장 (4:1-12)
 3장에서 많은 부정적 권면 후에, 야고보는 긍정적 진술로 그의 서신의 세 번째 부분을 끝맺는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18절). 하지만 이 긍정적 진술은 그리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상황이 어떠할 지라도 평화로웠다. 긴장들(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등)은 극에 달했고 붕괴되는 관계의 근원이었다. 이 극심한 긴장들은 이미 있어왔던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177.1)
 처음부터 야고보는 공동체 안에서의 싸움과 다툼과 투쟁의 이유들을 설명한다(4:1-3). 그렇게 함으로 그는 긴장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문제는 하나님을 친구로 선택하는 대신에, 그분은 원수요, 세상과 사단을 친구로 삼는 것이다(4-6절). 그러나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낮추기를 요청하며, 그분께서 그들을 높이시리라는 것을 알고, 회개를 촉구한다(7-10절). 하지만, 야고보는 이 부드러운 긍정적 진술로 끝맺지 아니한다. 그는 경제적 긴장을 이야기하기 앞서 부정적인 도덕적 관심을 하나 더 제기한다. 만일 격한 관계가 전환되어진다면, 비방과 판단은 멈춰질 것임에 틀림없다(11, 12절). 이 구절에서, 야고보는 이 문제를 부드럽게 다루지 않을 것이다. 심각한 상황은 강력한 언어를 요구한다. (177.2)
 ■ 말씀에 들어감
 이 구절을 읽기 전에, 본문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문맥 속에서 구절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삶과 더 넓은 사회에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주께 기도하라. 그런 후에, 구절을 두세 번 읽고, 그 다음에 아래의 질문에 답하라. (178.1)
 1. 야고보가 1, 2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다툼과 싸움은 어떤 것이라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그것은 실제적인가 아니면 은유적인가? 설명하라. (178.2)
 2. 1절에서 야고보는 싸움이 너희 “안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라고 말한다. “안에서”라는 단어는 개인의 내재적인 어떤 것과 관련된 것인가 아니면 공동체나 혹은 단체 속의 사악한 욕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인가? 설명하라. (178.3)
 3. “세상과 벗된 것”(4절)이라는 구절을 설명하라. 야고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오늘 당신의 상황에서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겠는가? (178.4)
 4. 당신이 7-10절의 일련의 명령들을 읽을 때 느낀 심오한 감정을 설명하라. 야고보가 가혹하고 엄격하게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는가? 아니면 당신은 그의 언어로 꽤 편안함을 느끼는가? 설명하라. (178.5)
 5. 율법(11, 12절)이라는 용어를 설명하라. 야고보가 여기서는 서신 다른 곳에서 사용한 것과 다르게 사용하는가? 성구사전의 도움이나 본문을 살펴봄으로, 율법이 사용된 다른 구절을 찾아 그것들과 비교하고 대조하라. (178.6)
 ■ 말씀을 탐구함
 싸움과 다툼
 첫 번째 문장에서 발견된 두 명사는 야고보 공동체 안에 존재한 격렬하고 오래된 긴장과 적대감을 입증한다. 이 싸움과 다툼은 사소한 투쟁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주로 사회적 고립과 죽음에 기인하였다. 이것을 아는 것은 매우 충격적이므로, 많은 성서적 해석자들은 저자의 관심에 대한 문자적 성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세심하다. 하지만 Bo Reicke가 우리에게 충고한 것은 분명히 옳다: “우리가 그 문제들에 대하여 비록 저자가 과장했거나 심각하게 취급할 의도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초기 교회나 다른 이유로 인해 소중히 여기지 않았던 주석가들처럼) 저자의 진술을 설명하지 않거나 치부해 버릴 권리는 없다. 역사적인 정직은 우리가 그 상황을 다른 사람들이 해 온 것처럼 재각색하기보다는, 있었던 그대로 알기를 원한다”(45). (179.1)
 우리가 본문을 철저하게 읽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질문해야 한다: 야고보가 두 명사 polemoi(“싸움”)과 machai(“다툼”)을 사용했을 때 그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이 단어들은 나라, 공동체, 개인들 간의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투쟁을 묘사할 때 대부분 사용된다. 그러나 이 단어를 은유적으로 혹은 신자들 간의 증오심이나 야고보의 청중들간의 말싸움 정도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야고보가 그 같은 말싸움을 언급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결국, 이전 장의 전반적인 요점은 혀는 폭력적이며 파괴적인 기구라는 것이다(특히 3:3-6을 보라). (179.2)
 하지만 “싸움”“다툼” 혹은 “전쟁”“싸움”에 대해 단순한 은유적 해석은 부적절해 보인다. Ralph P. Martin은 이런 식으로 야고보의 관심을 제한하려는 사람은 “야고보서가 살인이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한 ‘경건한’ 방법으로 여겨지던 시대에 기록되어졌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146). 전형적인 예로서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개인들에 대한 사울의 살인적인 위협이다(행 9:1; 요 16:2). 마틴은 본문의 강한 어조, 특히 4:2은 야고보가 은유적인 미묘한 점 이상의 것을 마음속에 두고있음을 지적한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144). 야고보는 그의 시대와 사회의 실제적 전쟁, 싸움, 살인, 다툼을 다루고 있다. (179.3)
 이 구절들을 역사적 견지에서 살피기 위해, 우리는 야고보가 아마도 A.D. 66년 로마와의 전쟁이 있기 이전에 저술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전쟁이 유발된 그 해에는 셀롯당의 혁명이 강화됨을 보았다. 셀롯당은 필요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팔레스타인에서 로마의 통치를 종식시키고자 결심한 유대주의 가운데 매우 국수주의적 정당이었다. (180.1)
 우리는 여기서 Michael Townsend가 주장하는 바인 셀롯당은 하나의 단일 정당이 아니었고 셀롯이란 단어는 “다수의 국가적 관심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간주되어야만 한다”(212)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셀롯당 시몬이 예수의 제자였음을(눅 6:15)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비록 그들 자신을 셀롯당이라 부르는 차이점은 있을지라도, 피흘림을 통하여 팔레스타인에 대한 로마의 압박을 전복시키려는 기본적인 열심은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양하게 널리 퍼져 있던 “치고 달리는” 테러 행위의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180.2)
 셀롯당의 공격과 증오심은 단지 로마 제국의 권세에만 대항하여 퍼부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로마와 협력하는 모든 자들에게 대항했으며 그런 상황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특별히 그들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자들은 지방 권세자들이 원하는 바대로 다스릴 수 있도록 허가해주는 로마 정책과 자유 방임주의적 접근을 지지한 사두개파와 제사장들이었다. 또한 셀롯당의 공격대상은 로마의 경제적 정책으로 인해 부를 축적한 부자들이거나 아니면 가난한 자들에게 유익한 정책의 부족이었다. 이것이 야고보가 기록할 때의 배경이다. 그의 공동체는 셀롯이 창궐한 사회였다. 그래서 “의심할 여지없이, 로마 정부를 향해 존립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태도에 대한 상이한 이해로 인해 격한 논쟁과 어쩌면 물리적 투쟁으로 촉발되었다”(146)고 마틴은 말한다. (180.3)
 야고보가 이 구절들에서 말하고 있는 물리적 싸움과 다툼은 바로 이 중심 문제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만일 우리가 교회 내에서의 사소한 내분이나 다툼으로 본문의 해석을 축소한다면 우리는 저자의 주된 관심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야고보가 말하는 것은 “논쟁하기 좋아하는 그리스도인보다 더 넓은 범주와 관련된다. 우리 시대처럼 평화를 갈망하고, 전쟁이 많이 발발한 그 시대에 있어서, 전쟁의 주원인에 대한 이 단어들은 무력과 타당성을 동반한다. 우리가 전쟁을 좋아하는 정신을 개발시키다면 우리는 전쟁을 치를 것밖에 기대되는 것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넓은 의미에서 나라들 간이건 좁은 의미로 교회 신자들 간이건 말이다”(86)라고 레온 모리스(Leon Morris)가 연구한 바에 동의한다. 슬픈 사실은 우리가 이 구절의 해석을 “다른 방면”으로 적용하는 데 있어서 너무 성급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80년대에 서방세계에서의 우리는 이 단어들을 남아프리카의 흑인 자유 투쟁자들이나 라틴 아메리카의 공산주의 게릴라들에게 적용하기 쉬웠을 것이다. 우리는 야고보가 그들의 싸움, 살인, 내전 등을 책망하는 것을 격렬하게 논쟁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니콰라과의 자유 투쟁자/항변자나 유럽의 반공산주의 투쟁자를 지지하는 바에 대해서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었을 것이다! 만일 야고보가 20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에 저술했다면, 내가 믿기로 그의 기별은 울타리의 양쪽 면 모두든 현대의 셀롯당들을 지적했을 것이다. (181.1)
 비록 야고보가 물리적인 긴장과 갈등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지만, 그는 그 근원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4:1) 갈등을 말한다. 문자적으로, “너희 안에서”라는 헬라어 구문은 “너희 회원 안에서”라는 말이다. 회원이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개인과 관련하여 “지체”로 번역되었다(롬 6:13; 7:23과 비교하라). 그 여러 구절들에서, 초점은 사람 안에 욕망이 내재하고 있는 장소이다. 만일 야고보가 이렇게 지체를 언급했다면, 그의 생각은 yetser에 관한 1:13-15의 그의 논증과 가장 적절하게 병행하는 것이다. 그 구절을 취급함에 있어서 우리는 대부분의 유대 사상에서 악한 욕망의 자리는 yetser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했다. 만일 이것이 야고보가 여기서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라면, 그의 논증은 그 싸움과 다툼이 사람의 yetser 안에 있는 욕망으로부터 일어났다는 것이다. (1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