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야고보서 제IV부 긴장 (4:1-5:6) 8. 도덕적 긴장 (4:1-12)
 하지만, 이 문맥에서 야고보가 13-15절에서 이미 논증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고 보는 것은 의심스럽다. 그의 관심은 개인적이기보다는 집단적인 것이다. 싸움과 다툼은 종교적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문제로 인하여 공동체 안에서 투쟁하는 욕망 때문에 일어난다. 그것은 그의 독자들 간에 내분 중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즉 한편으로는, 평화를 원하는 자들과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평화로운 수단을 사용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가능한 단 하나의 수단은 폭력이라 이해하는 자들이었다. 욕망과 정욕이 격해졌다. (182.1)
 “정욕”(4:1)으로 번역된 단어는 영어 단어 hedonist(쾌락주의)와 hedonism(쾌락주의자)으로 파생된 hēdonōn이다. 비록 우리는 이 개념을 순전히 성욕적 관능적 어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 단어 자체는 단지 “기쁨”이나 좀 더 중립적인 “바람”의 의미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 단어는 단순한 기쁨이나 관능적 욕망 이상의 비중으로 다루어진다. 디도서에서 악의 목록의 배열이 야고보서와 비슷한 것은 이 단어의 부정적인 비중을 나타내는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hēdonais]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딛 3:3, 4; 참고, 눅 8:14; 벧후 2:13). 이 같은 정서로는, 이 용어에 대한 더욱더 적절한 번역과 해석은 “욕망”—전쟁의 욕망, 소유의 욕망 등일 것이다. 야고보서 독자들의 싸움, 다툼, 갈등의 주원인은 공동체 내의 강한 부정적 욕망이었다. (182.2)
 많은 고대 저술가들도 이 세상의 많은 문제와 악의 근원이 욕망이라고 주장한 것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William Barclay도 약간 인용한다: “Lucian은 ‘인간에게 다가오는 모든 악함들-혁명, 전쟁, 술책, 살육 등은 욕망에서 싹튼다. 이 모든 것들은 그 근원으로써 더 많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한다. Plato는 ‘전쟁과 혁명과 전투의 유일한 원인은 육체와 그 욕망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기록한다. Cicero는 ‘개인뿐만 아니라 전체 가족을 전복시키고 그 상태를 지속시키는 것은 탐욕스러운 욕망이다. 욕망으로부터 증오, 분열, 부조화, 교란, 전쟁 등이 발생한다’(99). 비슷한 방식으로, 야고보는 싸움과 다툼의 근원을 확인한다. (182.3)
 이 격정과 욕망은 얼마나 강렬했는가? 야고보는 4:2에서 우리에게 말한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고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수세기 동안 많은 주석가들이 야고보가 실질적으로 살인한 그의 독자들을 고소하고 있다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Wells, 96; Kugelman, 46을 보라). 많은 이들이 르네상스 학파 에라스무스를 따라서, “살인”“질투”로 대체하여, 본문을 “너희는 질투하고 탐내는도다”라고 읽었다. 그 같은 해석자들은 야고보가 그의 독자들(오직 그리스도인으로만 생각되어지는)을 살인자로 고소하는 것은 불합리함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런 입장은 경악케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에서 (예를 들어, 세계 제2차 대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들과 싸웠기 때문이다. 또한 내전에 있어서도 똑같이 사실이다. 1994년 르완다 내전에서 수천 명의 르완다인들이 그들 자신의 지역 교회 신자들로부터 살인되었을 때 이는 확실하게 증명된다! (183.1)
 다른 해석가들은 야고보가 현재의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미래를 예언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우리는 정반대로 야고보가 실제적 살인을 포함한 그 공동체의 갈등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시기”도 포함한다. (183.2)
 이 구문에서, “시기”로 사용된 단어는 영어의 zealous(열심인), jealous(질투가 많은)의 어원인 zēloō이다. 하지만, 그 단어는 “시기하다” 혹은 탐내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만일 이것이 이 단어에 대한 올바른 번역이라면, 이 구절의 새 개역 표준 역(NRSV)의 구두법은 도움이 된다: “너희가 무언인가를 바라지만 그것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너희는 살인을 저지른다. 그리고 너희는 무엇인가를 탐내지만 그것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너희는 분쟁과 투쟁을 일삼는다.” 이것은 다수의 성서적 예증의 지지를 받는다. 아합과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는 살인을 불러일으킨 시기와 탐욕의 권세에 대한 전통적인 예증이다(왕상 21:1-29; 창 4:2-16의 가인과 아벨의 기사와 비교하라). (183.3)
 하지만 야고보는 zēloō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경우에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그들은 살인할 뿐 아니라 그들은 열광적인 경멸자라고 말했을 것이다. Bo Reicke는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기를 제안한다: “너희는 경멸자들로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45). 그때에는 셀롯당의 폭력적인 행위들과 관련되었을 것이다. 본문은 NIV처럼 강조되어야겠지만, 이 단어에 대한 다른 해석은 “시기”로 번역된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고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4:2). 이 경우에, 야고보는 그들의 폭력성을 정죄할 뿐 아니라 그것이 아무 쓸모 없음을 말하고 있다. 사회 폭력은 그들이 정말로 바라는 것을 성취하지 못하며 못할 것이다. (184.1)
 야고보는 대안을 제시한다.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죽임, 살인, 상해, 경멸 대신에, 왜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가? 그는 사실 빌립보서의 바울의 교훈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에게 화평은 검으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화평과 그들의 바라는 다른 소망들은 오직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이를 것이다. (184.2)
 하지만 이 서신의 독자들은 야고보에게 이렇게 응답할 것이다. “우리는 먼저 기도해 보았다.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했다; 하지만 우리는 응답받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돕는 자들을 도우신다. 그래서 우리는 검으로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응답한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hēdonais]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4:3). 그들의 적대적인 방법을 포기하여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고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는 실패한다(3:18). 그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원했다. 야고보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방식대로 주신다. 그분의 방식은 화평, 연합, 겸손과 같은 것이다. (184.3)
 세상의 친구와 하나님의 적
 이 장의 두 번째 문단은 더욱더 힐난한 질책이 포함된다. 야고보는 그들의 독자들을 죽이는 자요, 살인자로 강조하는 대신에, 그들이 간음자라고 주장한다(4:4). 만일 야고보가 이전 절들에서 실제적인 살인자를 의미한 것이 사실이라면, 여기서도 그가 실제적 간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이 논리적인 것 같다. 이러므로, KJV는 간부(姦夫), 간부(姦婦)라는 말을 첨가하는데, 후자는 원문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185.1)
 하지만 야고보의 서신의 문맥에서 실제적 간음이 그의 공동체의 주요 쟁점이라고 제안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경우에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 단어를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들의 언약을 파기했을 때 사용한 것처럼 비유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우리는 추정할 수 있다. 이 관계는 종종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결혼 용어로 묘사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예루살렘을 향하여 선포하라고 말씀하셨다: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라”(렘 2:2; 사 54:1-6과 비교하라). 그러나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불의하였고, 언약을 파기했으며, 배교했다. 이는 선지자들에 의해 간음으로 낙인 찍혔다. 가장 전형적인 예는 선지자 호세아의 경험으로, 간음한 여인과의 그의 결혼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과의 관계의 상징이었다 (호 1-3; 9:1 또한 사 54:1-6; 57:3; 렘 3:6-10, 20; 13:27; 겔 16:23-34). 결혼 사상(寫像)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한 그리스도인 용법으로까지 이어졌는데, 그리스도는 신랑이요 교회는 신부이며, 둘 다 서로에게 충실해야 한다(고후 11:2; 엡 5:23-32; 계 19:7; 21:9). 그러므로 야고보는 간음에 대한 심상을 이런 은유적인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유사한 방법으로, 예수께서도 선지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동시대의 사람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부르셨다(마 12:39; 참고 16:4; 막 8:38). (185.2)
 야고보의 초점은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의 글들처럼, 단순히 간통의 개념만은 아닌 것 같다. 그의 강조점은 바로 죄인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이 경우에, 적절한 구약의 구절은 잠언 30:20일 것이다: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치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John Schmitt가 말한 바, 이 음녀의 태도는 “그녀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그녀는 악한 행동의 어떤 결과로부터 분리되었다. 이 죄인은 하나님의 친구로서 형성되었어야 할 도덕적 민감성이 상실되었거나 억누르고 있다”(336). (186.1)
 야고보는 이 간음적 관계(그는 “세상과 벗된 것”이라 부른다—4:4)는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임을 알려줌으로 그의 청자들에게 각성을 촉구한다. 세상과 벗된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다. 타협은 없다. 감도의 어떠한 수치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명확하게 이쪽/저쪽뿐이다: 당신은 세상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한다(요일 2:15, 16). 유사한 기분으로, 예수께서는 축복의 산에서 그분의 청자들에게 가르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186.2)
 야고보는 우리가 세상이나 사회로부터 소외되거나 불쾌하게 분리되어져 버리는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다시 한번 강조해야만 한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는 생각, 가치, 행동의 전체적인 영역이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과 일치되지 않는 것이다. 그 같은 생각과 가치는 일반적인 사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이러므로 야고보의 신학에서, 사람이 그 같은 가치 체계와 친근한 관계를 가진다면, 그 사람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원수이다. (186.3)
 이제 그는 매우 어려운 구절을 말한다: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4:5)? 이 구절은 몇 가지 이유로 인해 난해하다. 첫 번째로, 야고보는 성경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다. 그러나 구약에서 그런 구절은, 최소한 분간할 수 있는 구절도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이 구절은 상실된 책에서 인용되었거나 구약 성경 구절의 요약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야고보가 많은 구약 성경 구절로부터의 사상을 격언적 양식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가 소통하기를 원하는 개념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성서적 근원을 추적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187.1)
 이것은 우리를 이 구절을 이해하기 어려운 두 번째의, 주요한 이유로 인도한다. 문제의 중심에는 (spirit)이라는 단어가 있다. 헬라어 문장에는, 그 단어가 문장의 주격이나 목적격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더 복잡하게는, 성령이거나 인간의 영 일수도 있다. 수용할 만한 본문뿐만 아니라 NIV의 미주나 여주에도 혼란스러움이 있다. 당신은 NIV의 첫 번째 대안인 하나님을 주격으로 보는 것을 주목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신 영을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이것은 새 개정 표준 역(NRSV)이 채택한 번역이다. 이 번역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간음한 백성들을 시기하는 주체이시다. 다른 대안은 “영”을 주격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이 번역의 문제는 야고보서에서 성령이 언급된 곳(만약 성령이 의미하는 것이라면)은 오직 이 곳뿐이라는 것이다. NIV 본문은 영을 주격으로 보는 대신에 그것을 인간의 영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야고보가 “강렬하게 사모하는 인간의 영을” 의미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명확하지 않다. Ralph Martin은 네 번째 대안을 제안한다: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시기를 물리치신다”(149). (187.2)
 가장 좋은 선택은 첫 번째나 마지막 해석인 듯 나는 생각된다. 첫 번째 것이 타당한 이유는 이 구절이 하나님을 시기하시는 하나님으로 단언하며, 오직 그분께만 전적이고 솔직하고 확고한 충성을 요구하는 이전 구절의 토의와 묶여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대안은 다음 구절과 묶여진다면 납득할 만하다. 이 경우, 야고보는 두 개의 평행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187.3)
A.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시기를 물리치신다.
B. 그가 우리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신다(4:5, 6a).

A1.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
B1. 그러나 그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6b).
(188.1)
 여러 대안 중에 하나를 선택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제목으로 다가오는 어떠한 것도 하나님께서 물리치시며, 거기에는 야고보가 이미 언급한 시기, 교만, 모든 폭력 등이 포함된다. (18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