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15. 야훼 로이—나의 목자 여호와 (목자이신 여호와)
 영시(英詩) 중 가장 유명한 종교시는 아마 시편 23장일 것이다. 다윗은 야훼 로이(Yahweh roì)의 송축(頌祝)으로 그 시의 운을 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 이 말이 원문에는 “여호와 나의 목자”로 되어 있다(시 23:2; 28:9; 80:1).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이 은유는 구약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며, 예수님도 당신의 사명을 목자로 설명하셨다. (214.1)
 명사 로이(roì)는 자식을 기르고(전 12:11), 지도하고(잠 10:21), 꼴을 뜯기고(사 5:17), 먹이는(창 30:36) 것을 뜻하는 동사 라아(raàh)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말은 백성을 인애(仁愛)로 다스리는 지도자에게도 적용된다(삼하 5:2; 렘 23:2). 이 말을 확대 적용하면 먹을 것을 제공하는 타작 마당과 포도즙 틀에도 적용된다(호 9:2). 이 말에는 사랑하는 자들을 기르고 돌보는 일을 하는 과정에 나타나는 우정과 사귐이 포함된다. 영어의 pastor란 말은 이 말의 라틴어 번역 pastor (목자)를 전수한 것이다(렘 17:16; 영어 사전에서 pastoral을 찾아 보라). 그러므로 목사는 목자이다. (214.2)
 “자기에게 맡겨진 무력한 미물들을 부지런히 돌보고 사랑하는 목자의 생활이 영감 받은 필자들에 의해 가장 귀중한 복음 진리의 일면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와 백성과의 관계 때문에 그는 목자로 비유되었다”(PP 190). (215.1)
 이 히브리어가 사용된 몇 가지 경우를 살펴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요셉은 형들과 함께 자기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 즉 목양하고 있었다(창 37:2). 목자는 양 떼를 흩어지지 않도록 지키고 보호하는 파수꾼의 일을 한다(왕상 22:17). “이스라엘의 목자 예수는 당신의 백성을 풍성한 초장으로 인도하신다(시 80:1). 그는 이 일을 그의 임재와, 그의 위로와 훈계의 말씀으로 하신다(전 12:11). 목자는 양 떼를 먹이기 위해 가장 안전한 길로 앞서가며 인도하고 또 저녁에 양 우리로 다시 안전히 돌아오게 할 책임이 있다(민 27:17). 그리고 그는 길 잃은 어린양과 약하고 병든 양들을 찾아 품에 안거나 어깨에 메고 돌아올 책임이 있다(사 40:11; 눅 15:5). 그는 또 새끼 달린 어미 양들을 유순히 인도하여 쉴 만한 곳으로 안내할 책임이 있다(사 40:11; 창 33:13). (215.2)
 하나님은 목자의 은유로 자기를 나타내신다
 “인간 목자가 자기의 양들을 알듯이 하늘의 목자는 세상에 산재한 당신의 양무리를 아신다. ‘내 양,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34:31)”(GW 181). (215.3)
 어떤 말이든지 그 말이 성경에 최초로 사용되었을 때의 억양과 향기는 성경 전체를 통해 그 말이 가지는 의미를 크게 지배한다. “목자”도 예외가 아니다. 이 말은 야곱이 열두 아들을 불러모으고 그들에게 그들의 과거와 미래를 말하는 고별사에 처음으로 나왔다(창 49:1 상단). 장자로부터 시작하여 차자의 순으로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가며 축복하던 야곱은 요셉의 이름을 말할 때는 한참 숨을 돌리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새로운 영감으로 그 젊은 아들의 권세와 성공이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로 말미암았음을 강조한다. 평생을 목자로 살아 온 야곱은 목자의 일이 어떤 것인지를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215.4)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을 회고해 본 부조 야곱은 하늘 목자의 지키심과 돌보심이 있었음을 알아보았다(창 29:24). 상상으로 그는 팔려 가는 소년 요셉의 주변을 빙빙 도는 이리 떼를 보았을 것이며, 털 깎인 외로운 자기의 어린양에게 사정없이 몰아친 겨울 바람의 사나운 울부짖음을 들었으리라. 또 그는 한 작은 양이 열사의 태양 아래 목말라 허덕일 때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되듯 마침내 안전한 목자의 우리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리라. (216.1)
 다음 순간 그의 시선은 하늘을 향해 바로 그 목자에게 고착되어 그분만을 굳게 바라보는 듯했다. 종종 그는 그분의 임재를 친히 느낀 일이 있었고 그 때마다 그분의 보호와 돌보심을 깨닫곤 했었다. 그는 친히 그 목자의 사랑 받는 양으로 좋은 초장으로 인도되어 좋은 꼴을 먹고 안전한 양 우리로 안내 받은 일이 있었다. 야곱은 자기와 아들 요셉을 모든 역경에서 안전하게 지켜 주신 하나님을 알아보고 그 고마움을 이런 말로 시인했다: “나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이 따르던 하나님, 나의 온 생애 동안 오늘까지 나를 먹이신(목양하신) 하나님 ...”(창 48:15), 실로 그 하나님은 그의 찬양과 감사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셨다. 이제 그는 150의 고령에 그 동일한 하늘의 목자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돌보셨음을 힘주어 말한다. 목자의 모습은 성지의 주민들 눈에 친숙한 것이다. 이 풍부한 은유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216.2)
 예수는 선한 목자
 목자는 자기나 자기의 편이를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자기의 사명을 목자의 일에 비유하여 말씀하시곤 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아마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일 것이다. 거기서 그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안전한 곳에 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으러 나가 찾을 때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광야를 헤매다가 찾아 가지고,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돌아와 친구들을 불러 함께 축하하며 좋아하는 목자의 모습을 제시하신다. 이 이야기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그가 여기서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4절) 찾으신다는 사실과, 찾으면 어깨에 메고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하자!”(6절)라고 말하는 그의 놀라운 열정과 약속이다. (216.3)
 “그는 당신의 피조물들의 필요를 일일이 아시고, 각 심령에 숨겨진 말없는 비애를 아신다. 혹시 그가 피로 값을 지불한 어린 자녀가 상처 입은 것을 보시면, 그는 가해자를 불러 책임을 물으신다. 예수는 선한 목자이시다. 그는 연약하고, 병들고, 방황하는 자기의 양들을 돌보신다. 그는 그들을 모두 이름까지 아신다. 그의 양 떼에 속한 어느 양, 어느 어린양이라도 괴로움을 당하면 그의 동정과 사랑이 동(動)하고, 도움을 호소하는 부르짖음은 그의 귀에 들린다”(TC 5:346). (217.1)
 구세주는 목자에게 요구되는 헌신과 희생을 아셨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선한 목자”로 부르고 그 이유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셨다(요 10:11). 그런 목자의 헌신에는 한계가 없다. 더구나 우리가 양의 본성을 이해한다면 그런 목자의 태도가 더욱 깊은 인상을 준다. 양이 얼마나 어리석고, 곁길로 잘 빠지고, 배회하거나 곧장 위험으로 뛰어들기 잘하는가! (217.2)
 영국의 뉴볼드 대학(Newbold College) 근처에서 어느 날 나는 내 딸과 함께 산책을 즐기다가 가시나무 울타리에 구멍이 뚫린 것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구멍 안쪽으로 뻗어난 가시들에는 양털이 무더기로 걸려서 둥근 원을 그리고 있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우리는 울타리 안쪽을 넘겨다보았다. 거기엔 양이 단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울타리 바깥을 살펴보니, 거기엔 양들이 즐비하게 나와서 방향도 모르고 여기 저기 서성대고 있었다. 주디는 달려가서 농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랬더니 그는 몇 사람을 데리고 나와 멍멍 짖어 대는 양치기 개의 도움으로 양들을 양 우리 쪽으로 몰고 갔다. 마침 암양 한 마리가 울타리에 난 그 구멍으로 쑥 들어가자 나머지 양들은 무턱대고 그리로 하나하나 따라 들어가는 것이었다. (217.3)
 선한 목자는 양들에게 결코 분노하는 법이 없고, 자기의 양들을 포기하는 법도 없다. (218.1)
 예수는 희생적인 목자
 그런 어리석은 양들을 구출하기 위해, 편안한 아버지의 집을 떠나 끝내는 양들을 위해 생명까지 바치신 그 선한 목자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분께 대해 사랑과 감사가 마음속에 가득히 메워짐을 느낀다. 선지자 이사야는 인류의 비극적 상태를 이런 말로 읊고 탄식했다: “우리는 모두 양 같아서 잘못된 길에 빠졌도다”(사 53:6). 다윗도 똑같은 고백을 했다: “길 잃은 양처럼 나는 잘못된 길을 갔도다”(시 119:176). 주께서 찾아 주지 않으셨다면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운명인 것이다. (218.2)
 성경이 제시하는 선한 목자상(牧者像)은 담대하고 두려움이 없다. 구약의 이상적 목자상은 다윗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표상인 동시에 그의 조상이었다. 그는 자기의 양 떼를 돌보는 일에 나타난 하나님의 가호와 능력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자기가 양들을 위해 어떤 용맹을 발휘했는지를 사울 왕에게 이야기했다. “당신의 종이 내 부친의 양을 지킬(목양할) 때, 사자와 곰이 와서 양 무리에서 새끼 양을 잡아가면, 내가 그를 따라가서 그를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냈으며, 그가 나를 향하여 일어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쳐서 죽였나이다”(삼상 17:34, 35). (218.3)
 다윗보다 위대한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이렇게 설명하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살인하며 멸망시키려고 오지만, 내가 온 것은 양들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놓으나,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 양들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내버려두고 도망치느니라. 그리하여 이리가 양들을 채 가고 흩어지게 하느니라”(요 10:10-12). 아, 우리의 목자는 얼마나 위대하신가! (218.4)
 선한 목자는 사랑으로 돌보는 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