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2 부 안식일과 거룩 제 1 장  하나님은 어떻게 제칠일을 거룩하게 하시는가?
 제칠일의 거룩
 성경에 제칠일이 처음으로 언급된 곳은 창세기 2장 3절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안식일에 관한 논의를 창세기 2장 3절의 제칠일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시작했다(히 4:4). 우리의 오늘의 주제도 창세기 2장 3절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제칠일에 대한 언급뿐만 아니라, 거룩이란 표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도 창세기 2장 3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다”고 하신 것이다. (138.1)
 그런데 우리들 주변에는 위의 이 말씀을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복도 주시고 거룩하게도 하셨다”고 읽는 분들이 많다. 즉 일곱째 날의 축복 부분과 거룩 부분이 따로 있다는 식의 이해이다. 필자에게는 그런 뜻이 아닌 것 같다. “일곱째 날에 복과 거룩이 별개의 내용으로 부여되었다”는 뜻보다는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시는 의도로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뜻인 것 같다. 즉 하나님의 안식일 축복이 곧 안식일의 거룩이라는 것이다. 창세기 2장 3절의 한 병행구절인 출애굽기 20장 11절의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는 말씀도 동일한 취지인 것 같다. (138.2)
 이러한 뜻은 창세기 2장 3절출애굽기 20장 6절의 문법적 이치로만 규명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선포되고 있는 다른 평행절의 비교에서도 분명해지고 있다. 창세기 1장 22절에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축복의 내용이 생육과 번성이라는 말이다. 만약 창세기 2장 3절창세기 1장 22절 표현법으로 기록한다면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어 가라사대 거룩하라”로 표현될 것이다. (139.1)
 비슷한 평행절들은 이밖에도 많다. “남자와 여자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 “내가 그[사라]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창 17:16), “내가 그[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크게 번성하게 할지라”(창 17:20),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아브라함]에게 크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시니라”(창 24:35), “네[이삭]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창 26:24) 등이다. 예외 없이 축복 뒤에 축복의 내용이 뒤따르고 있다. 창세기 2장 3절도 같은 방식으로 읽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즉“하나님이 일곱째 날에게 복을 주어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139.2)
 제칠일의 거룩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창세기 2장 3절에서나 제칠일의 거룩이 넷째 계명으로 소개되고 있는 출애굽기 20장에서나 제칠일의 거룩은 제칠일 축복의 핵심이요, 그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렇다. 거룩은 제칠일 안식일의 핵심 사상이요, 축복 받은 세계의 주도적 정신이다. 성경과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관심 사항이 거룩이요 성화이다. 제칠일은 육일의 끝이요 목표이다. 제칠일의 거룩은 6일 창조의 끝이요 목표이다. 제칠일은 역사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역사는 거룩의 역사이며, 구속의 역사이다. 창조의 목표가 거룩이고, 역사의 목표가 성화이다. 창조된 시간과 만물이 창조주로부터 초청 받은 세계와 삶이 거룩이고 성화이다.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 .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창 2:2-3)고 했다.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였”으므로 “너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11, 8)고 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4)고 했다. (139.3)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재창조의 목적 역시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거룩한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분”(막 1:24) 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벧전 1:15).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사람들이다(엡 2:22). (140.1)
 그러나 지금은 어려운 시대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시간과 세상의 만물들이 비천해지고 사람들이 야비해진 시대이다. 인간과 사물에 대한 인간의 의도와 행위가 신성 모독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이다. 종교들이 그 신도들로 자신의 야비함을 근심케 하지도 못하고, 거룩을 탐하게 하지도 못하는 시대이다. 종교 단체들은 나날이 번성을 더해가도, 거룩한 신앙인들은 나날이 드물어지는 시대이다. 제칠일의 거룩은 예나 오늘이나 이러한 세태의 고발로, 그리고 그 처방으로 있어왔다. (140.2)
 거룩은 무엇인가
 성경에는 거룩한 대상들이 소개되고 있다. 첫째로, 하나님이 “거룩하다”(삼상 6:20; 사 40:25; 합 3:3; 욥 6:10; 잠 9:10; 고후 1:12). 전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계 1:8) 이신 주 하나님은 “거룩 거룩 거룩하시다”(사 6:3). (140.3)
 둘째로, 하나님에게 속한 것들이 거룩하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마 6:9) 하고, “망령되이 일컫지 말아야 한다”(출 20:7). 하나님이 계신 곳이 거룩하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가 거룩하고(시 11:4; 20:7; 사 63:15; 렘 25:30; 슥 2:17; 대하 30:27), 땅위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다(시 11:4; 138:1; 합 2:20).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시온이 거룩하다(시 48:1; 사 52:1). (140.4)
 하나님이 나타나시어 계시는 곳이면 어디나 “거룩한 땅”이다. 모세나 여호수아나 그 누구라도 “발에서 신을 벗어야”(출 3:5; 수 5:15; 출 19:12) 한다. 하나님이 구별하신 이스라엘 민족이 거룩하고(신 7:6; 14:2, 21; 26:19),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주신 땅이 거룩하고(출 15:13; 시 78), 하나님의 언약이 거룩하고(단 11:28), 믿음이 거룩하고(유 20), 하나님의 율법이 거룩하고(롬 7:12), 하나님께 소망을 둔 부녀자들이 거룩하고(벧전 3:5),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특별히 구별하신 날들과 절기들과 해들이 거룩하다(출 31:15; 레 25:12; 느 8:9; 레 5:10; 출 20:8). 성전과 그 기물들이 거룩하다(출 28:4; 29:34, 37; 레 6:17; 8:7). 하나님이 구별한 제사장(레 21 삼 7:1)과 레위인(민 3:12; 왕하 5:3)과 나실인(민 6)과 하나님의 예언자들(왕하 4:9; 렘 1:5)과 사도들이 거룩하다(엡 3:5). 거룩한 전쟁에 출전하는 병사들과 그 진영이 거룩하다(삼상 21:5 이하; 사 13:3; 렘 22:7; 신 23:15). (141.1)
 “거룩”을 히브리어로 “카도쉬”라 한다. “구별” 또는 “구분”이라는 뜻이다. 자기에게 속하게 하여 아무도 손댈 수 없는 무엇으로 선언한다는 뜻이다. 나에게 속하지 않게 하여 내가 감히 손대지 못하는 무엇으로 선언한다는 뜻이다. 나에게 특별한 무엇이 되게 구별한다는 뜻이다. 위의 사례들에서 그 뜻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고 또 “구분”되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욥 9:32).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인간]는 땅에 있다”(전 5:2).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이겠는가”(출 5:11). 우리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는데”(사 6:5), “만군의 여호와는 거룩, 거룩, 거룩하시다”(사 6:3). 주만 홀로 스스로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며”(수 24:19; 시 99:3), “우리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이시다(호 11:9). (141.2)
 다음으로 하나님에게 속하여 거룩한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같이 하나님이 모든 것들로부터 특별히 구별하고 구분한 것들이다. 이스라엘 민족과 그 땅과 성소와 성일과 절기들과 제사장들과 성전 기물들과 율법과 언약 등은 모두 “거룩하게 하시는 자”인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별되어 “거룩함을 입은 자”들이다(히 2:11). 이스라엘 민족에 의하여 세상 만물로부터 엄격하고도 철저하게 구별되고 구분되어, “오직 주만 거룩하다”고 고백된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왕하 19:22; 시 71:22; 89:18; 사 1:4; 12:6; 17:7; 30:12; 렘 50:29; 51:5)이신 하나님은 또한 이스라엘 민족을 만민으로부터 철저히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신 분이시다. 곧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시다(겔 20:12; 37:28; 21:15, 23; 22:9, 16, 32). (142.1)
 제칠일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
 제칠일은 하나님이 특별히 구별하여 당신의 소유로 삼으심으로써 거룩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소유는 그의 임재와 안수로 구별되어 선포되었다. 거룩한 대상을 “만지는 자마다 거룩해지고”(레 6:8), “접촉하는 자가 거룩할 것”(레 6:27) 이라고 하였다. 거룩한 자가 “만지는 자마다,” 거룩한 자가 “접촉하는 자”마다 거룩하게 된다. 제칠일, 시내산, 성막, 불타는 떨기나무 등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강림, 곧 그의 접촉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스랍 천사 하나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취한바 벌겋게 불타는 숱 덩이 하나를 이사야의 입술에 대며 말하였다. “보아라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이 사라졌고 네 죄가 용서되었다”(사 6:7, 8). (142.2)
 하나님은 제칠일로 강림하시어 제칠일 안에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시었다. 이로써 제칠일은 하나님의 접촉과 현존을 간직한, 시간의 거룩한 처소가 되었다. 임마누엘을 반영하는 시간의 성소가 되었다. 하나님이 제칠일을 복되게 하여 거룩하게 한 것이다. 하나님은 제칠일로 강림하셨을 뿐만 아니라 제칠일과 함께 하심으로써 제칠일을 거룩하게 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제칠일에 안식하셨다. 제칠일은 하나님의 안식을 간직한 소중한 처소가 되었다. 제칠일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과 그의 안식하심이 제칠일에 대한 축복이요 거룩케함이다. (143.1)
 그러나 그것만으로 제칠일의 거룩이 완성되지는 않았다. 제칠일의 거룩은 제칠일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과 그의 함께 하심과 그의 안식하심이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차원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안식에 수반되는 제칠일의 역할이나 비중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와 높이심이다. 하나님은 단지 제칠일에 안식을 취하실 뿐으로써 제칠일과의 관계를 무심하게 방치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의 안식에 관여된 제칠일의 일정한 역할을 크게 평가하고 하나님과 제칠일 사이의 특별한 관계, 곧 그 거룩한 의를 수립하였다. (143.2)
 하나님이 제칠일에 경험한 안식은 하나님의 경험 중에서도 특별한 것이었다. 하나님이 창조사업을 마치기 전에는 하나님에게 이와 같은 경험이 없었다. 그것은 창조의 대 과업을 마치고 우주적인 깊이와 넓이의 특별한 교제에 들어간 자만이 경험하는 안도와 만족과 보람의 안식이었다. 기쁨, 고요, 평온, 평화, 휴식, 생명의 깊음과 새로움 같은 것으로 표현될 수 있는 큰 호흡(누악)이었다. (143.3)
 바로 하나님의 이같은 경험을 출애굽기의 기자는 “나 여호와가 엿새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출 31:17)고 표현하였다. 여기의 “평안하였다”는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 “새롭게 됐다”(refreshed)로 번역됐으며, 그 중에도 개역표준(RSV)역에는 “새 생명을 얻었다”(took on new life)라고 번역됐다. 우리말 공동번역에는 “이렛날을 쉬며 숨을 돌렸으니”라고 번역됐다. 한글 개역 성경 출애굽기 23장 12절“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고 한 번역과 동일하다. 물론 히브리어 동사는 두 곳이 똑같이 “나파스”이다. “숨을 돌리다”라는 뜻이다. (1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