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2 부 안식일과 거룩 제 1 장  하나님은 어떻게 제칠일을 거룩하게 하시는가?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안식일 안식이 사람에게만 “숨을 돌리는”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숨을 돌리는”것 같은 경험이었다고 표현한 사실이다. 그만큼 제칠일의 안식은 하나님에게도 특별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이 경험이 제칠일에 그리고 제칠일의 동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하나님의 이 안식은 제칠일의 속성이 된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144.2)
 이리하여 제칠일은 하나님의 세계 내에서, 더 가까이는 하나님이 지으신 시간들 중에서 하나님의 “나의 안식일,” 곧 하나님의 안식일로서 특별한 품계를 지니게 되었다. 하나님의 안식으로써의 특별한 지위가 내외에 선포되고 인정받았다. 임금이 선택하여 거처한 집이 왕궁으로 선포되듯이, 그리고 왕의 은총을 입은 여인이 왕의 특별한 여자로 선포되듯이 제칠일은 하나님을 모신 시간의 궁전으로, 그리고 시간의 여왕으로 거룩하게 됨을 입었다. (144.3)
 제칠일에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
 성경은 거듭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거룩케 하시는 여호와이시라”고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제칠일 안식에 동반하는 언약자로 삼으심으로써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면 열국 중에서 내[하나님] 소유가 되고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출 19:5, 6)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언약의 말씀에 “일제히 응답하여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다”(출 19:8)라고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고 웃을 빨고 예비하여 제 삼일,”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러 “강림하실 날을 기다리게”하셨다(출 19:10, 11). (144.4)
 제칠일은 하나님의 안식일이다. 동시에 이 날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언약에 들어가기 위하여 “강림하시는 날”이며, 하나님의 초청을 받은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성결케 하고 옷을 빨며 예비하여” 기다려야 하는 날이다. 이 날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는 날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하나님과 백성으로써의 특별한 관계가, 아버지와 자녀의 거룩한 의가, 신랑과 신부로서의 성스러운 언약이 수립되는 날이다. 그리고 영원히 그 언약을 지속시키는 매체요, 그 의를 증거하는 표징으로 제칠일의 역할이 확증되는 날이다. (145.1)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안식으로 사람을 초청하였던 것이다. 모세가 초청된 시내산의 정상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빽빽한 구름같이 드리워진 시간의 거룩한 장막, 그 깊은 곳으로 사람이 초청된 것이다. 빽빽한 어둠, 그 지밀(至密)한 시간의 침방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안식에 처녀 이스라엘이 파트너로 초청된 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하나님에 의하여 거룩히 되는 방식이다. (145.2)
 하나님이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차원은 하나님이 제칠일을 거룩하게 하는 차원과도 달랐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임재와 안식으로써 제칠일을 거룩하게 하였다. 제칠일은 시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궁전이 되었고, 하나님의 여왕 같은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과의 단순한 대면이나 함께 있음만을 위해 초청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안식의 유산을 물려받는 적장자로, 하나님의 안식일 잔치의 주빈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가장 은밀한 열락인 제칠일 안식의 언약을 맺은 파트너, 곧 그의 정당한 신부로 초청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제칠일 안식에 동반자가 됨으로써 하나님과 부자 관계의 의를 언약 받은 적장자로, 부부관계의 의를 언약 받은 하나님의 정당한 여인으로 거룩히 구별된 것이다. (145.3)
 사람들의 세상살이에서 안식의 파트너 관계로서 가장 대표적인 경우를 찾아본다면 무엇보다도 앞서 부부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남편과 아내의 특별한 관계라는 것은 한마디로 안식을 함께 나누는 관계를 두고 말한다.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안식이 되는 관계이다. 부부의 전형적인 안식 행위는 취침이다. 부부의 취침은 부부의 가장 깊은 비밀이다. 부부가 살아가는 삶의 공간에서 가장 깊은 내면이 침실이며, 이 깊은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깊은 삶이 취침이요 안식이다. 하나님은 제칠일 그 시간의 궁전, 그 지밀한 처소에서 누리시는 자신의 안식에 사람을 그 동반자로 삼으신 것이다. 그런데 부부에게 있어서 취침은 단지 잠을 잔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취침은 곧 잠자는 것이요 쉬는 것인 동시에, 서로가 그리고 서로만이 사랑하고 열락하고 기뻐하고 가장 깊은 깊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고 그 소유가 되는 행위이다. 제칠일에 하나님은 이 안식, 이 열락, 이 사랑의 파트너로 사람을 초청하였다. 제칠일에 하나님은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고 그 머리를 얹혀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접촉으로써 그 처녀를 자신의 혼인한 여인으로 거룩하게 구별하였다. 히브리어에서 거룩한 여자는 적법하게 혼인하여 구별된 여자이다. (146.1)
 하나님은 실로 “거룩, 거룩, 거룩한” 자신의 은밀한 품으로 사람을 초청하여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였다. 하나님은 시간의 지성소에서 호흡하는 당신의 은밀하고 지극한 숨, 곧 “내 안식일”을 처녀 이스라엘과 나눔으로써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셨다”(겔 20:12; 겔 37:28). 이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이에는 “거룩하게 하는 자”“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의 관계가 수립되었다(히 2:11). 이스라엘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아내처럼”(고전 7:14)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되어”(히 12:10) 하나님 앞에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출 19:6)이 되었다. (147.1)
 이처럼 안식일은 사람에게 좋은 날이 되었다. 사람을 위한 날이 되었다. 사람을 존귀하게 만드는 날이 되었다. 사람을 하나님의 신부로 만드는 날이다. 언약의 날이다. 사람에게 거룩한 날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도 이 지극한 언약을 지키라고 하셨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키라”(출 20:11),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겔 20:20),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을 너희로 알게 함이라”(출 31:13)고 하셨다. (147.2)
 그런데 언약의 관계는 피차의 거룩과 피차의 깊은 비밀의 나눔과 동참으로도 이해하지만 동시에, “짐을 서로 나누어짐으로 성취하는 그리스도의 법”(갈 6:2)이다. 당신의 거룩의 안개가 자욱한 제칠일의 침방, 거룩한 생명의 숨이 샘솟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시 91:1)으로 사람을 초청하신 하나님은 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초청하신 하나님이시다. 자신의 안식과 거룩을 나누시는 하나님은 사람의 짐을 나누어지시는 하나님이시다. 안식을 함께 나누어 가진 이 커플은 이제 “짐을 서로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시키는”(갈 6:2) 언약을 이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 언약으로써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시 81:6),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우리의 구원”(시 68:19)이 되신 것이다. 처녀 이스라엘의 머리를 얹어 주시고 그를 자신의 안식의 반려, 곧 자신의 친자식 과 자신의 정당한 여인으로 삼으신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의 삶의 짐을 대신 져주시는 그들의 주, 곧 구원이 되시는 것이다. (147.3)
 이러한 사상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포와 행동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수고를 알고 내가 내려”(출 3:7) 왔다고 하셨다. “나는 여호와로다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부터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셨다(출 6:6-7). 하나님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고통을 알고 내려오시어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시고 그들의 임마누엘이 되셨다. (148.1)
 구약성서에서 “안다”는 것은 남녀 두 사람이 성적으로 한 몸을 이루어 서로가 서로에 속하여 서로의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높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고통으로 울부짖는 이스라엘의 우고를 “안다”고 하심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고난에 임마누엘로,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있는” 한 몸으로 동참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거룩한 옷으로, 자신의 거룩한 품으로, 그 비천함과 속됨을 갈아 입히고 있음을 뜻한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심”“만지심”“접촉”으로 그들에게 자신의 거룩(holy)과 건강(health)과 온전하심(wholeness)을 나누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거룩의 처소는 언제나 고통스러운 삶의 저편, 곧 세상의 밖이 아니라 고통이 “보이고,” “들리는” 삶의 치열한 현장이다. (148.2)
 하나님이 맹세하고 언약하여 상대의 비천함과 가련함과 속됨을 자신의 거룩으로 갈아 입히는 비유들은 성경의 여러 곳에 소개되고 있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예의 하나로써 에스겔 16장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가 날 때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에 싸지도 아니하였다.”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꺼린바 되어 들에 버리었다.”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매 유방이 뚜렷하고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오히려 벌거벗은 적신이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다”(겔 16:4-8). (149.1)
 사람을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의의 옷은 바로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옷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품이다. 누가복음 15장 11절 이하에서 아버지가 탕자를 용서하고 집에서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잔치를 베풀어 함께 즐기는 모습은 아들을 거룩하게 하는 아버지와 “거룩함을 입는” 아들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좋은 예이다. (149.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시다”(겔 37:28).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진리로 거룩하게 하신다”(요 17:17). “말씀과 기도로”(딤전 4:5) 거룩하게 하신다. 우리의 “옷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레 11:44),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시며”(벧전 3:15),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므로”(롬 11:16), 가지인 우리가 나무인 그리스도에 속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와 하나가 되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의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레 13:12) 하신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의 언약 관계에 속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식이라, 신부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게 되었다”(히 2:11). 이 거룩의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 안식일이요, 이 거룩한 관계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사건이 하나님의 자녀요 신부들인 영적 이스라엘에게 재연되고 재현되는 날이 안식일이다. (14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