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에서 6일 동안 살아남는 일은 오그레이디 대위에게 고된 일이었다. 그가 낙하산을 타고 떨어졌을 때 쇼핑 카트 가득 음식과 물병을 싣고 온 것이 아니었다. 시장에서 음식을 사다가 비축할 수도 없었고 음식을 구하다가 적에게 잡힐 수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낙하산을 타고 간선도로 위에 내린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즉시 위장한 채 수풀 사이에 몸을 숨겨야 했다. 적군들이 그를 수색하며 1~2미터 옆을 지나가는 동안 조용히 엎드려 있어야만 했다. (100.1)
 매일 밤 오그레이디 대위는 더욱 안전하게 숨을 곳을 찾았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잡히지 않는 것이었지만 먹을 음식과 마실물도 필요했다. 만일 여러분이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는다면 자유롭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지퍼 백에 빗물을 받았다. 자신의 젖은 모직 양말을 짜서 물을 얻으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는 나뭇잎과 풀과 개미와 같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을 먹었다. 개미는 잡기 어려워서 많이 먹을 수 없었다. 이런 것들은 그의 일반적인 음식이 아니었다. 그는 굶주렸다. 또 밤낮 비를 맞으며 바깥에 있었기 때문에 추위에 떨었다(Time, 1995. 6. 19. 22~23, 25). (100.2)
 6일 동안 오그레이디 대위의 안녕은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에게 잡히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숨을 곳과 음식, 물 같은 필수적인 것들이 필요했다. (100.3)
 그는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간신히 구할 수 있었다. 살기 위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단기간 아닌 장기간 동안 말이다. 다시 말해 당신의 현재의 삶뿐만 아니라 영원한 삶을 위해서 말이다. 당신의 궁극적인 안녕을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수적인가? 이스라엘의 성소의 화목제(레 3; 7:11~36)가 그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101.1)
 “화목제”(“well-being offering,” “화평” 또는 “친교” 제사로 번역됨)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평화”와 관련이 있다. 히브리어에서 “평화”는 분쟁이 없음만을 의미하는 것과 더불어 더 큰 의미에서 “안녕”(well-being)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101.2)
 화목제는 기름만을 단 위에서 불태웠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번제와 같은 방법으로 드렸다. 화목 제물의 모든 부위가 여호와께 드려졌고(레 3:1, 6, 12), 기름도 그분을 위하여 태워졌지만(16절), 제물의 가슴과 뒷다리는 제사장에게 위탁 수수료로서 할당되었고(7:31~36),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후에 남은 것을 먹을 수가 있었다(7:15~21). 그러므로 화목 제물은 여호와와 제사장과 예물을 드린 사람 사이에 3자 분배가 있었다. (101.3)
 다른 제사와는 다르게 화목 제물의 일부는 그것을 드린 사람이 먹도록 되어 있었다. 자신의 제물 일부를 자신이 먹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신약성경을 통하여 모든 이스라엘의 희생 제물들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임을 발견하였다(요 1:29; 히 9). 그러므로 희생 제물의 일부를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먹는 것을 의미한다. (101.4)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심으로 청중들을 놀라게 만드셨다. (10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3~56).
(102.1)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설명하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생명을 받아들이는 개념을 강조하셨다(63절). 그러나 최후의 만찬 중에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실 때에도 그분은 당신 자신이 희생 제물이심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102.2)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102.3)
 화목 제물을 먹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희생이 우리의 삶에 받아들여져 지금 우리가 영적으로 변화되도록 우리의 삶에 받아들여져 생명을 주는 능력을 제공한다는 신약의 개념과 들어맞는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우리는 그분의 영을 받고. 죄인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인 사랑(롬 5:5)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옴으로 변화되어진다(요 3:5~8; 딛 3:5~7). (102.4)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에 기초된(마 22:36-40) 그분 자신의 사랑의 성품(요일 4:8)과 그분의 율법(롬 8:4)에 조화되도록 이끄신다. (103.1)
 왜 사랑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것은 진정한 이타적 사랑만이 자유의지를 가진 지적 존재들이 서로를 파괴하지 않고 조화 가운데 살아가게 할 수 있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양식이나 물이 이 땅에서 생존에 필수적인 것처럼 사랑은 인류의 영원한 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 없이는 살 수가 없다. (103.2)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을 대항하여 배반한 죄인들이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사랑을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깊은 잠재의식 속의 비밀의 방을 파내려가도 사랑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사랑을 초월적인 명상이나 의약품을 통하여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사랑을 오직 그것의 근본이 되시는 사랑이신 하나님(요일 4:8)께로 부터만 얻을 수 있다. 그분께서는 그 사랑을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값없이 주셨다. (103.3)
 화목제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하나님과 예물을 드린 사람은 둘 사이의 화평과 교제를 경축하기 위해 함께 식사를 하듯 희생 제물을 함께 나누었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맺게 되었고(롬 5: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분과의 교제로 초청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103.4)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영생의 소망은 기쁨과 감사를 가져온다. 이와 같이 고대의 희생 제사는 감사와 기쁨과 연관되어졌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희생 제사가 용서 받기 위해 드린 것으로 생각한다. (103.5)
 그러나 다른 동기들도 있었다. 화목제와 같은 제사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표현했다(레 7:12~15). 어떤 화목제들은 여호와께 대한 서원을 갚는 것이었고 어떤 것들은 자원해서 드린 것이었다(7:16). 단순히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면 자원해서 드리는 제사를 드릴 수가 있었다. (104.1)
 제사 제도는 엄숙한 것이었지만 어두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역동적인 것이었고 즐거운 것이었다. (104.2)
 화목제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유대 관계가 항상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들어온 죄를 제거해야 하는 속죄(화해)의 부정적인 면에만 초점이 맞추어질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아서 용서가 필요 없을 때에라도 하나님께 더욱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기쁨의 찬양과 감사와 그분과의 화평한 교제를 포함하는 속죄의 긍정적인 측면이라 할지라도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가능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화목제가 죄의 행위를 속하지는 않았지만 화목제의 피는 그것을 드린 사람의 생명의 값을 치르는 속전의 기능을 하였다(레 17:5~12). (1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