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 제 4 부 예수님과 함께 지성소에서 (죄의 존재로부터의 자유) 14. 언약궤 (나의 모든 소망은 그리스도의 것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방황하던 때에 제사장들이 그들의 목전에서 궤를 지고 지나갈 때 세 겹의 천으로 감추어진 궤의 희미한 윤곽만 볼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기록하신 청옥(靑玉, 사파이어)과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석인 남보석(사파이어)을 암시하는 하늘색 덮개로 덮혀 있었을 때 조차도 궤는 보는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이 복합적인 표징은 자기 백성을 안전한 항구에로 당당하게 인도하고,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보좌로부터 그들의 관심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내었다. (183.4)
 애굽에서부터 약속된 땅까지의 이스라엘의 여행길 고비고비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일 길에 앞서 행하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 궤가 떠날 때에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민 10:33~36). 궤는 거의 40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의 인도자와 선도자를 대표하였다. (183.5)
 하나님께서 이 기간중에 직접 골라 주신 50개의 전 야영지에서 여호와께서는 백성들이 궤를 그들의 진영의 중심부에 고이 간직하기만 하면 음식과 물, 휴식과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여 주셨다. (184.1)
 요단강 도강 시의 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긴 여정 끝에 결국 요단강에 도착하였으나 흘러 넘치는 강을 보고 실망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의 비가시적 인도자는 제사장들에게 백성들이 2,000규빗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는 동안 궤를 가지고 흙탕물 속에 들어가라고 명령하였다(수 3:4). “궤로부터 이천 규빗(800미터 이상)떨어진 빈 공간을 두”었던 것(부조와 선지자, 484)은 궤의 신성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철저히 새기도록 하였다. 길을 밝혀준 궤가 백성들의 관심의 중심인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어도(수 3:4) 두려워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184.2)
 여호와께서는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고 마른 길이 드러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수 3:13). 그러고 나서 궤를 요단강 바닥에 가지고 가, 궤 주위를 열 두 지파를 대표하는 족장들이 호위병으로 둘러 서 있었다. 백성들은 강물을 멈추게 한 하나님의 권위의 십계명으로 인하여 마른 땅을 밟고 건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언제든지 모든 것을 주고자 하신다는 것과 안전한 길로 인도하여 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수 3:10~4:14). 아무리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나 무리, 민족들, 방언들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전진하여 나가는 것을 방해하지 못한다. (184.3)
 이스라엘 백성 중 마지막 사람이 안전하게 강을 건너간 다음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와(수 4:18) 반대 편에 올라섰을 때에 요단 물이 곧바로 본 곳으로 도로 흘러 여전히 언덕에 넘쳤다. 이 이야기에서 언약궤는 예수께서 자신의 택한 백성들이 약속된 땅까지 나아가는데 함께 동행하신다는 것을 예견한다. 여호와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지시한 일이 다 이루어지기까지”(수 4:10) 위협하는 급류 가운데서 서 계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인류를 휘말아 들이는 격노하는 소용돌이 물결 속에서 결국 “들어올리우고”, “다 이루었다”는 선언으로 피로 적셔진 영광에로 향하는 길을 의기 양양하게 가리키셨다. (184.4)
 언약궤와 여리고 성벽
 여호와께서는 가나안 족속을 정복함에 있어서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을 지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서의 최초 전투에서 언약궤가 여리고 공격에 앞장서야 한다고 지시하셨다(수 6:1~16). 그 이유는 그리해야 승리의 공이 하늘에게만 주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리고가 함락된 후 기세가 오른 백성들은 하나님의 지도력을 무시하고 단지 소수의 군사로 주제넘게 공격하였지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기만 하였다. 분함과 죄책감을 느낀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 저물도록 있”었다(수 7:6). 그러고 나서야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의 패배를 재촉한 이스라엘 진영의 죄를 정결케 하라고 명령하셨다. 이 일을 행한 후에 곧 바로 승리가 뒤따랐다. (184.5)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착 초기에 길갈을 치리의 중심지로 삼았다. 이 길갈에 제사장들은 성막을 세웠다. 여호수아는 이 길갈에서 하나님의 언약과 백성과의 관계를 갱신하였고, 만나가 이제는 더 이상 내리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그 땅의 소산을 먹었고, 다시 한번 유월절을 지켰다(수 4:19~24; 5:2~15). 그 후 그 땅을 정복한 후 수십년 후에 성막은 그 땅의 중심지에 더 가까운 실로로 옮기어졌다(수 18:1; 삿 19:51; 렘 7:12). 하지만 언약궤가 머무는 곳 어디든지 신성의 임재에 주목하라고 요구하는 언약궤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권위를 부여하였고, 성소 예배의 초점이 되었다. (185.1)
 세겜에서의 궤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이스라엘 각 족속들의 두령들을 세겜으로 불러 모아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주신 모든 율법들을 읽었다(수 8:30~35; 참조 신 11:26~29; 27:11~13). 이 곳 세겜에서 아브라함은 여호와께 드리는 자신의 첫번째 제단을 쌓았고(부조와 선지자, 499~594), 제사장들은 거기에서 궤를 메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반은 그리심산을 등지고 서 있고, 나머지 절반은 에발산을 등지고 섰다. 그 계곡 가운데 여호와의 임재의 상징인 궤가 확연한 모습을 한채 놓여 있었다. 여기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손으로 기록된 것으로 그들이 알고 있는 궤 안의 두 돌비에 그분의 율법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그들의 언약을 갱신하였다. (185.2)
 그 후 3세기 동안 궤는 실로에 있는 성막에 있었고(수 18:1, 19:51; 삼상 1:3; 렘 7:12), 제사장들이 계속하여 궤를 돌보았다. 그 제사장들의 도덕적 가치와 영적 분별력은 서서히 침체되어 결국에는 엘리와 엘리의 아들들의 시대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퇴보하는 봉사자들이 끼친 영향으로 인하여 많은 백성들이 궤의 중요성과 하나님께 드리는 예식의 신성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였다(삼상 2:17). 많은 이들이 궤를 물신(物神)으로 여기게 되었고, 어떤 이들은 궤 자체를 경배의 대상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185.3)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긴 궤
 아벡에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패배한 후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그런 결과를 야기시킨 원인을 파악하기를 거부한채 여호와께서 자신들에게 이렇게 밖에 해 주실 수 없는가 하고 투덜거리면서 다음과 같은 전략을 세웠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삼상 4:3). “여호와께서는 법궤를 군대에게로 가져가도록 명령하시지도 허락하지도 않으셨으나,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은 승리가 저희 것이 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엘리의 아들들이 법궤를 진중으로 가져올 때에 큰 환호성을 올렸다”(부조와 선지자, 583). 하지만 법궤가 진중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없는 이스라엘의 군대는 계속된 전투에서 완패를 당하였다. “일어날 수 있는 재난 중에서 가장 무서운 재난이 이스라엘에게 내렸다. 하나님의 법궤는 빼앗겨 원수의 소유가 되었다. 여호와의 임재와 능력의 상징이 저희 중에 떠났을 때에 참으로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 이 성스러운 궤는 하나님의 진리와 능력을 가장 놀랍게 계시하였다”(부조와 선지자, 584). (185.4)
 여호와께서는 이런 사건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자기 백성들이 궤를 자신들의 목적 달성 수단으로 이용한 방법에 대한 심한 불쾌감을 표현하시었고, 그래서 궤가 탈취당하도록 허락하시었다. (186.1)
 흡족한 기분으로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서,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가져갔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다곤 신전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다곤 신상 곁에 세워 놓았다”(삼상 5:1, 2). 다곤 신상 옆에 세워 놓은 목적은 자신들의 우상이 여호와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날 밤,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다(삼상 5:3, 4). 이 표현은 겸손히 예배하는 행위를 묘사하는데 사용되는 어구이다! 분으로 가득 찬 아스돗 사람들은 이 엎드린 형상—인간의 몸통을 가진 고기—을 다시 세웠으나 그 다음 날 가보니 완전히 박살나 있었을 뿐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궤를 다른 장소로 옮기었다. 그러나 그 장소 근처에 살던 사람들은 무서운 질병으로 내리침을 당하였고(삼상 5:5~12), 그들은 곧 이 일이 궤가 나타내는 이스라엘의 신의 복수라고 생각하였다. 또 다른 문제가 야기되지 않도록 그들은 궤를 가드로 옮기었다. 그러나 가드 사람들도 위험한 물품을 간수하고자 하지 않았기에 겁내 면서 에그론으로 옮기었다. 궤를 옮겨 놓는 블레셋 어디든지 그 곳 사람들은 특정한 질병에 걸렸다.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서 궤를 멀리 떨어진 들에 놔두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쥐들의 재앙이 뒤따라, 토지를 해치고 창고와 들에 있는 모든 땅의 소산을 멸하였다”(부조와 선지자, 586). 경건한 경배자들에게 이 하나님의 상징은 축복을 주었지만, 불가사의한 힘이 있는 것으로 여긴 미신적인 사람들에게는 심판만이 내렸을 뿐이다. (186.2)
 블레셋 사람들을 패퇴시킨 궤
 궤는 일곱 달 동안 블레셋에 머물렀다(삼상 6:1~18). 그 때서야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을 파멸로 이끄는 그 신비적인 능력에 그들이 당할수가 없음을 인정하고, 궤를 어미 소가 끄는 수레로, 에그론에서 11km 떨어진 도시이고, 레위 지파가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벧세메스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참을성 있는 짐승들은 계속 저희 길로 나아갔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동행하여 지정된 장소에 안전하게 도착하였다”(부조와 선지자, 588). 여호와께서는 이런 진행 과정을 통하여 자신이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고, 자신에게 귀중한 것을 보호할 수 있으신 능력을 드러내셨다. (186.3)
 벧세메스 사람들은 들에서 바쁘게 밀을 베다가 궤가 이스라엘에 다시 돌아온 것을 보고 무척이나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법궤를 받아들일 적당한 장소를 준비하는 대신에 이것을 추수 들판에 방치하여 두었다. 그들은 계속하여 거룩한 궤를 바라보고, 법궤가 회복된 놀라운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중에, 이 궤의 신비한 능력이 어디에 있는지 추측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호기심에 못이겨 덮개들을 제거하고 감히 법궤를 열어 보았다 ∙∙∙ .” (18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