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I 부 왕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 (16:21-28:20) 8. 십자가와 왕국에 대한 전조(前兆): 미래의 형태 (16:21-17:27)
 이 시점에서, 어떤 사람은 “그런데 과연 누가 산을 움직이길 원할 것인가”라고 물을지 모른다. 그것은 예수의 봉사를 벗어나서 선정주의(煽情主義)에 빠진 쓸데없는 노력일 것이다. 그 해답은 예수께서 랍비들 가운데서 흔히 쓰이고 있는 구절과 조화되게 은유적으로 말씀하고 계셨다는 것일 듯 싶다.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에 따르면, “산을 ‘파헤치거나’ ‘옮기는’ 것은 ‘난관을 제거한다’는 것을 뜻하는 일종의 격언이었다”(Green, 166). 그와 같이, 하나님을 믿은 믿음은 제자들을 효율적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만들 뿐 아니라 그들에게 크게 확대되어 다가오는 난관들을 대처하고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열쇠였다. 그것은 20세기에 있어서도 여전히 사실이다. 믿음이 없이 하는 봉사나 증거는 무력하다. (218.5)
 마가는 기도는 또한 성공적인 그리스도인 사역에 핵심적인 요소라는 사상을 제자들의 실패 이야기에 덧붙인다. (막 9:29. 금식과 관련하여서도 같은 사상이 어떤 고대 마태복음 사본에서 발견된다. 17:21의 난외주를 보라.) 복음서 기자들이 주는 교훈은 성공적인 봉사는 믿음과 진심어린 기도 이 두 가지 모두 위에 구축(構築)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둘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진심어린 기도는 진정한 믿음에 기초된 기도요, 진정한 믿음은 기도에 의해 가르침을 받는 생활로 이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의 제자들은 기도의 필요성과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일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배울 필요가 있다. 이 교훈은 복음서들이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러 가셨다고 주장하면서 빈번히 보도하고 있는 교훈이다. (219.1)
 제자들의 준비 부족을 드러내 주는 두 번째 구절은 예수와 성전 세(24-27절)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사건은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그들이 제기한 질문에 예수께서 어느 쪽으로 답변을 하셔도 그를 말려들게 만들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함으로써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시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219.2)
 베드로에게 이러한 질문이 던져졌다.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부정적인 답변은 예수가 성전 봉사를 전복하려고 한다고 비난할 구실을 줄 것이다. 베드로는 그런 진퇴양난을 피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그 세를 내실 것이라고 신속히 답한다. (219.3)
 그러나 성급한 답변은 단순히 베드로(그리고 예수)를 또 다른 진퇴 유곡에 빠뜨릴 뿐이다. 결국, 제사장들, 그리고 하나님의 봉사에서 오로지 전념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 또한 성전세 면제를 주장할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Morris, Matthew, 452 참고). 이와 같이 예수와 아무런 의논도 없이 베드로가 예수께서 그 세를 내실 것이라고 대답할 때, 그는 사실상 이스라엘 내에서 선지자와 교사로서의 예수의 역할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하여, 조금 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야로 제시했던 바로 그 동일한 사도(16:16)가 이제는 자기 자신에게 걸려 넘어져,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제시한 예수에 대한 바로 그 개념을 승인한다. (219.4)
 예수께서는 그 상황을 벗어나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신다. 자신이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는 그의 “아버지의 집”(눅 2:49)을 위해 내는 세가 면제된다고 베드로에게 권면하신 다음에, 그는 그의 수제자에게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제일 처음 잡은 고기로부터 세 낼 돈을 빼내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그 동전으로 그 세를 내실 것이다(17:27). (220.1)
 얼른 보기에는 이 이적이 성경의 복음서에서 우리가 읽는 것과 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예수로 하여금 다수의 진기한 그리고 기이한 이적들을 행하시게 만드는, 경외서 복음서들에서 발견되는 몇몇 이야기와 더욱 조화된다. 그러나 조금만 숙고해 보면 그 입에 동전을 물고 있는 고기의 기적은 바로 그 순간에 예수께서 당면하고 계신 필요에 부합된다. 한 가지 점에서, 예수께서 그 동전의 가치뿐 아니라 어떤 물고기가 동전을 물고 있을지 아시기 때문에, 이 기적은 비틀거리는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선지자이심을 분명하게 증명해 준다. 둘째, 베드로가 어떻게 그 세 돈이 만들어 졌는지에 관해, 아마도 세리들에게조차도 함구하고 있을 수 있다고 믿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처럼 그 기적은 두 가지 딜레머를 모두 사라지게 해 주었다. 셋째, 예수께서 외적으로는 순응하셨지만, 기술적으로 말해서, 그 세를 낸 것은 그의 돈이 아니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220.2)
 또한 우리는 예수께서 가능할 때는 언제나 쓸데없는 대결을 피하셨다는 교훈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저 실물교훈으로부터 교훈을 배울 수 있다. 대결해야할 때가 있지만(예컨대, 마 23 참고), 대부분의 때에 대결은 불필요하고 복음 전파에 파괴적이다. (220.3)
 요약하면, 마태복음 후반부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에게서 과업을 넘겨받을 준비가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두 이야기를 발견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그들의 믿음 부족을 나타내 주는 반면에 두 번째 이야기는 그들이 실제적인 지혜가 부족함을 예증하고 있다. (221.1)
 이런 결핍들을 감안해 볼 때,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로 여행하신 후 많은 시간을 특별히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일에 쏟으시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을 재차 선언하시는 일에 그 가르침의 가장 적은 부분이 할애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사건들에 대한 두 번째 충분한 공표는 제자들의 불충분성과 부적당성과 관계된 두 이야기 사이에 끼워 넣어져 있다(17:22, 23). (221.2)
 ■ 말씀을 적용함
 1. 내 생애에서 십자가는 어떠한가? 나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는가, 아니면 그는 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도록 했는가? 나는 참으로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나는 그저 “교회를 즐기고” 있는가? 나는 나의 답변을 뒷받침해 주는 어떤 증거들을 나열할 수 있는가? (221.3)
 2. 내가 자신에 대해서 참으로 정직하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생애를 바치려고 하는가? 나는 인생에서 참으로 어떤 상급들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가? 그것들이 명예, 위신, 지위, 그리고 나의 일상적 삶의 특권들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왕국과 더 밀접하게 관련된 것들인가? 나는 내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어떤 구체적인 방법으로 나의 가치들이 더욱 건전하고 그리스도인적이 될 수 있을까? (221.4)
 3. 17장에서, 제자들은 더 많은 믿음과 더 많은 지혜, 이 두 가지 모두를 필요로 하고 있음이 발견되었다. 이 상품들이 나에게 제대로 공급되고 있는가? 그것들이 나의 일상 생활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가? 나는 믿음과 지혜 이 양면 모두에서 어떻게 자라날 수 있는가? (222.1)
 ■ 말씀을 연찬함
 1. 귀신들린 소년의 치료를 보도하고 있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의 기사들을 비교하라. 그대의 노트 한 페이지에 세로로 세 칸을 만들라. 각 복음서에 제시된 기사들에 대한 상세한 개요를 적어보라. 그러고 나서 그 페이지 밑에 그것을 요약해 보라. 그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마태가 공헌하고 있는 모든 것의 목록을 작성하는 일로부터 시작하라. 그런 다음, 마태의 기사에 마가와 누가가 덧붙인 것의 목록을 요약하라. 그대는 이런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 데 대한 어떤 논리적인 설명을 생각해 낼 수 있는가? (222.2)
 2. 성구사전(완벽 성구사전이 더 좋다)을 사용하여 십자가, 죽음, 일으킴을 받다(raised), 부활과 같은 단어에 대한 마태의 용례와, 예수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그것에 상당(相當)하는 용어들을 연구하라. (그대가 「제임스왕역」에 기초된 성구사전을 사용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 역본에 사용된 정확한 단어들을 점검해 보야야 할 것이다.) 그대가 도출해낸 종합적인 모습은 무엇인가? 이 종합적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222.3)
 ■ 말씀의 추가 연구
 1. 전반적인 통찰을 참조하려면 엘렌 G. 화잇, 시대의 소망, 410-434를 보라.

 2. 사복음서에서 자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수의 예언을 취급하고 있는 모든 말씀들에 대한 논의를 참조하려면 J. B. Green and S. McKnight, eds., Dictionary of Jesus and the Gospels, 630-633을 보라.

 3. 변형산 사건과 그것을 둘러싼 쟁점들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상동, 834-841을 보라. (2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