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I 부 왕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 (16:21-28:20) 8. 십자가와 왕국에 대한 전조(前兆): 미래의 형태 (16:21-17:27)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많이 있지만, 그 직접적인 문맥을 통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도출되고 있다. 하나는 이 구절은 그 뒤의 열세 절에서 뒤따르고 있는 변형산 사건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구절이 16:27에 언급된 재림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설명은 28절을 실패한 예언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와 같이 문맥에 의해 도출된 두 가지 설명 중에서, 영광의 왕국에 대한 예표(豫表)로서의 변형산 사건이 가장 만족스런 해답이다. (213.4)
 그 구절이 “변형산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란 해석이 도움이 되긴 하지만, 그 예언의 충만한 의미를 다 드러내지는 않는다. 헤르만 리데르보스(Herman Ridderbos)는 예언은 “자주 미래의 여러 구분되는 단계들을 하나의 단일체로 압축한다”고 통찰력 있게 제시한다(Ridderbos, 314, 315). 이미 우리는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는 요한(3:2)과 예수(4:17)의 전파에서 그런 경향을 본 바 있다. 그 두 분 중 아무도 은혜의 왕국의 측면이 적어도 2,000년 간 영광의 왕국의 측면 앞서 있을 것이라고 설명함으로써 그 왕국의 점진적인 성격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높임 받으심의 측면들 또한 부활 사건 이전의 복음서 이야기에서 구별된 바 되지 않았다. (214.1)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서야 제자들은 그의 높임 받으심이 단계별로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실로 그의 부활과 승천 가운데서 그가 영광 가운데 강림하실 시작 단계들은 죽기 전에 보게 될 것이었지만, 재림 등과 같은 후기의 단계들은 살아 생전에는 볼 수 없을 것이었다. 그처럼, 리데르보스의 압축 통찰(compression insight)과 영광의 왕국에 대한 미리 맛봄으로서의 변형산 사건 개념을 결합시키는 것이 16:28의 의미에 대한 최선의 해답처럼 보인다. (214.2)
 우리가 17:1-13에서 변형산 사건에 관하여 읽을 때, 그 페이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첫 번째 사항은 베드로—근래에 사단이라고 견책을 받은 바 있는 바로 그 베드로—가 거기 있다는 것이다. 다윗, 그리고 결코 완전하지 않았던 매우 많은 성경의 영웅들의 경우에서와 같이, 변형산 위에 베드로가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동정어린 은혜에 대한 놀라운 표현이다. (214.3)
 예수의 변형(變形, 17:1-8)은 세 공관복음 모두에서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과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그의 통보 직후에 등장한다. 16장은 제자들을, 베드로의 고백으로 인한 희망의 고지대로부터 그리스도의 선언으로 인한 절망의 심연으로 끌어내렸다. 제자들은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따르고 있는 이 예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들은 그들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그들의 기대에 부합되지 않는 듯이 보인다. (214.4)
 변형산 사건은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 외에도 이 사건은 예수 자신에게 확신을 가져다준다. 16장 사건이 일어난 지 꼭 “엿새 후에” 그는 가장 가까운 세 제자들만을 데리고 산을 오르셨다. 공관복음에서 이와 같이 때를 정확하게 밝히는 것은 여느 때와는 다른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데일 브루너(Dale Bruner)는 이렇게 제시한다: 엿새는 의미심장한데, 이는 “엿새는 이스라엘에서는 거룩한 사건을 위하여 준비하는 데 필요한 날의 수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창조는 안식일의 제정을 위하여 엿새를 준비하였다(창 1). 모세는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 시내산에서 엿새를 기다렸다(출 24:16). 그리고 이제 또 다른 엿새의 간격이 있은 후에 어떤 특별한 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고 있다”(Bruner, 2:600). 이런 상징은 유대인 청중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마태에게는 특별히 적절한 것이었을 것이다. (마가복음 9:2 또한 “엿새”를 언급하지만 누가복음은 “8일쯤”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215.1)
 저 특별한 사건은 예수의 영광화, 모세와 엘리야의 출현, 그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이다(17:2-5). (215.2)
 변형산 사건은 마태의 복음서에서 한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첫째,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예수의 영광화는 제자들에게 출애굽기 34:29-35과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모세의 얼굴에 비쳐난 영광을 생각나게 해준다(또한 고후 3:7을 보라). 그처럼 예수의 경험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사람, 하나님께서 유대 역사 가운데서 그 왕국을 설립하는 데 사용한 그 사람 모세의 경험과 평행을 이룬다. (215.3)
 둘째,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다. 저 두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중요하다. 한 가지는, 유대인들은 그 두 사람을 율법(모세)과 선지자(엘리야)에 대한 최고의 대표자들로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들이 고대하였던 것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와 이야기하고 있다(5:17). 그 두 사람이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이 두 사람은 모두 마지막 때와 관계가 있었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말 4:5)이 이르기 전에 나타날 것이었고, 모든 이스라엘은 어떤 형태로 모세가 재출현 할 것을 기대하였다(신 18:15). 그러나 아마도 모세와 엘리야에 관하여 가장 의미심장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세가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킴을 받았던데 반해(유 9), 엘리야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로 승천했다는 것이다(왕하 2:11, 12). 그와 같이,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께서 그의 왕광의 왕국을 설립하기 위해 두 번째 오실 때 부활하고 승천할 사람들을 예표하는 역할을 한다(살전 4:16, 17). 그리고 변형산 사건 그 자체는 저 영광스러운 왕국의 예표이다. 그것은 다가오는 왕국의 축소판 예표이다. (215.4)
 변형산 사건의 세 번째 의미심장한 측면은 하늘로부터 들린 음성이다(17:5). 이 음성은 예수께서 유대인의 성경의 위대한 영웅들과 단순히 동등하신 분이 아니시라 바로 그들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지적한다. 그와 같이, 그 계시와 예수의 인격은 모세와 엘리야의 그것보다, 율법과 선지자의 그것보다 훨씬 크다. 여기에 단순히 또 다른 선지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계신다. 그러나 그 음성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을 넘어 그를 또한 메시야로 인정한다. 이 마지막 사상은 17:5의 마지막 세 단어에서 얻을 수 있다. “저의 말을 들으라”는 표현은 신명기 18:15를 인용한 것으로, 그 구절은 메시야를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확인하며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라는 말로 끝난다. (216.1)
 변형산 사건은 세 제자들에게 즉각적 그리고 영속적인 인상을 모두 남긴다. 즉각적인 인상은 그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한 것을 알려주는 17:5에서 엿볼 수 있다. 여러 해 후에 베드로는 그가 받은 영속적인 인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벧후 1:16-18). (216.2)
 그처럼 세 제자는 변형산 경험을 통해서 그들이 잘못된 길도 인도되고 있지 않다는 보증을 얻는다. 그들은 짧은 시간에 16:21-23의 고난당하는 종을 넘어 16:27의 오시는 왕을 볼 수 있다. (216.3)
 그러나 곧 그들은 그 산을 내려와 현실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것은 실로 참담한, 우울한 현실일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당면한 즉각적 현실이 아무리 우울하든지 상관없이, 그는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이라고 그들에게 다시 한번 말씀하시면서 17:9에서 궁극적 승리를 역설하신다. 변형산 사건은 저 부활 소망의 보증으로 우뚝 서 있다. (217.1)
 그러나 그들의 산상에서의 경험과 그리스도의 부활 때 사이에는 그들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모든 것은 부활이 있고 난 후에서야 그들에게 이해될 것이었고, 그 전에는 결코 그렇지 못할 것이다. 부활 후에 그들은 지식과 열정, 이 두 가지를 모두 갖고 죄와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에 그의 부활은 미래 왕국에 대한 보증과, 그의 이름을 믿어온 모든 사람들의 부활(모세와 같이) 혹은 영광으로의 승천(엘리야처럼)에 대한 보증으로서 변형산 사건과 함께 결합하게 될 것이다. (217.2)
 그러나 변형산 상의 사건 전체는 제자들의 마음에 한 가지 주요한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엘리야가 “모든 일을 회복”하러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께서 마지막 때 메시야갸 되실 수 있을까?(10, 11절). 예수의 답변은 두 가지 진리를 제시한다. 첫째, 침례자 요한은 말라기 4:5을 성취시킴에 있어서 엘리야 역할을 하였다. 둘째, 예수 자신은 요한과 비슷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실 것이다. 그처럼, 조심스럽게 귀 기울여 듣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9절에서 하신 그의 부활에 대한 약속에다 그의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또 다른 경고를 첨가하신다(12, 13절). (217.3)
 제자들의 준비되지 못함에 관한 좌절어린 전조
 마태복음 17장은 제자들이 그들 앞에 놓여 있는 과업을 행할 준비가 갖추어지지 못함을 예시해 주는 두 이야기로 끝난다. 첫 번째 이야기는 예수께서 변형산 상에 계신 동안, 귀신들린 한 소년을 제자들이 고쳐주지 못하는 것으로 시작한다(14-21절). (218.1)
 예수와 그의 가장 가까운 세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그는 호기심어린 무리들과 병든 소년, 실망한 아버지, 그리고 얼굴이 붉어진 것이 분명한 아홉 명의 제자들과 마주치신다. 예수께서는 무리들을 꾸짖으신 후에, 그 소년을 고치신다. 누가의 이야기에서는 이 치료 이야기가 그의 보고의 핵심을 이룬다. 누가는 무리들이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눅 9:43)고 말한다. (218.2)
 그러나 마태-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던 아홉 제자 중 하나-는 그 사건에서 다른 교훈을 얻는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교훈은 제자들의 실패는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7:20). 그것은 예수에게 있어서는 궁극적인 좌절이나 거의 다름없었음에 틀림없다. 결국, 그가 산 위에 계신 동안 아홉 제자들에게는 그 없이 그의 사업을 수행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 결과는 실패, 천길 나락으로 떨어진 실패였다! (218.3)
 그리고 그 실패는 예수께서 느끼고 계시는 바처럼 그의 개인적 임재가 그들에게서 영구적으로 취해 감을 당할 때가 얼마 남지 않은 바로 그때 발생했던 것이다. 그 이야기가 던져주는 의미는 제자들은 예수 없이 일을 수행해 나갈 준비가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의 그의 남은 시간의 많은 부분을 그들을 가르치는 데 사용하시리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공을 거두려면 더 강력한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믿음이 없으면 그들은 복음 사업을 효율적으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그들은 “산을 움직일”(20절) 수 있다. (2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