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I 부 왕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 (16:21-28:20) 8. 십자가와 왕국에 대한 전조(前兆): 미래의 형태 (16:21-17:27)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바로 조금 전(16:16-19) 자신이 그 새 왕국의 수상이나 제1 부통령으로 임명되었다고 인식했던 사람이 예수의 통보에 상당히 강력하게 반응하는 것에 크게 놀라서는 안 된다.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절). 베드로가 이보다 더 강력한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209.1)
 그러나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그보다 더 강력하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절). 예수가 바로 조금 전에 축복하셨던 그 동일한 사람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기가 어렵다(17-19절). 앞에서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아버지로부터 온 영감 아래 있었다고 말씀하셨으나, 지금 그는 마귀의 지도 아래 있다. 이것들은 선과 악 사이의 투쟁에서 완전히 적대적인 입장에 있음이 틀림없다. (209.2)
 왜 예수께서 이런 강력한 반응을 보이셨는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그 해답은 예수가 그의 죽음이 죽으셔야만 한다는 생각을 베드로보다도 더 싫어하신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예수께서는 많은 여행을 하시면서 십자가 처형 장면들을 목격하셨다. 여느 다른 정상적인 사람들처럼 그도 십자가의 몹시 고통스러운 죽음으로 이 세상을 하직하실 마음이 조금도 없으셨다. 그는 유대인들(제자들을 포함하여)이 원하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야가 되는 편이 훨씬 더 쉽다는 것을 발견하셨을 것이다. 그 외에도, 예수께서는 갈바리에서의 위대한 희생에서 모든 인류를 위하여 죄가 되심으로서 세상의 심판을 담당하실 마음이 없으셨다(요 12:31-32; 고후 5:21). 십자가에서 세상의 죄를 지시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다는 생각을 그는 극도로 싫어하셨다. (209.3)
 십자가를 회피함으로써 그 자신의 뜻을 행하라는 시험은 예수의 생애의 커다란 시험이다. 그 시험은 겟세마네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그곳에서 예수께서는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26:42)라고 거듭거듭 기도하실 것이다. (209.4)
 우리가 마태복음 4장에서 보았듯이, 광야 시험의 핵심은 십자가 없이 그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 시험의 끝에 주님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10절)고 외치셨다. 우리는 다시 마태복음 16장에서 매우 유사한 표현을 발견하지만, 이번에는 베드로에게 향해진 것이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23절). 신약에 이보다 더 강력한 견책은 없다. 그러나 그 원인을 보라. 지도급 제자인 베드로는 사단이 광야에서 취했던 바로 그 똑같은 입장을 취한 것이다. 견책의 강렬함은 예수의 봉사에서 십자가의 중요성을 암시해 준다. J. C. 라일(J. C. Ryle)은, 베드로를 견책하는 데 사용된 언어의 강력함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의 교리만큼 철저히 중요한 성경의 교리는 없다”(Morris, Matthew, 430 참고)고 추론한다. 그처럼 베드로는 예수께 대하여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 혹은 올무가 되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23절). (210.1)
 불행히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일한 십자가는 아닐 것이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를 따르는 각 사람에게는 감당해야 할 각자의 십자가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210.2)
 이 진술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우리는 제자들의 입장에 서 볼 필요가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생각은 20세기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어보인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십자가에 못박힘이란 말은 우리에게는 사어(死語)나 다름없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땅에 질질 끌리는 십자가를 지고 읍을 통과해 가는 사람을 호위하는 로마 병사들의 무리를 보았을 때, 그들은 이것이 다시 오지 못할 길을 가는 여행임을 알았다. 그들은 십자가가 가장 잔인하고 가장 치욕적인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예수와 제자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오로지 죽음의 상징일 따름이었다. (210.3)
 그러나 제자들 속에서 죽을 필요가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가? 그 해답은 16:24-26에서 발견된다. 그들은 그들의 “자아”를 부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그들의 고집스런 생활을 포기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물리적인 십자가에 못박히실 것이었지만, 그는 저 십자가의 나무로 나아가시기 전에 먼저 자신의 의지를 아버지께 넘겨 드려야만 하셨다. 어떤 사람도 그가 십자가에 달리시도록(혹은 그 문제로 거기 머무시도록) 만들 수 없었다. 겟세마네에서의 투쟁은 아버지께서 자신의 뜻을 행하실 수 있도록 자신의 의지를 그에게 넘겨 드리는 투쟁이었다. (210.4)
 그것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 각자에게도 사실이다. 우리들 중 대부분은 물리적인 십자가를 견딜 필요가 결코 없을 것이지만, 우리들은 각기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고집스런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면 안 된다. (211.1)
 24절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죄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우리 생애의 중심에 하나님과 그의 뜻이 아닌, 우리의 자아와 우리의 뜻을 두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죄는 우리가 자신의 생애의 통치자가 되기로 선택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죄는 하나님께 대해서는 아니오(No)요 자아에 대해서는 예(Yes)라고 말하는 것이다. (211.2)
 죽어야만 하는 것은 인간들에게는 그처럼 자연스러운 자아 중심적인 생애의 원리이다. 그처럼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그 핵심을 갈파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와서 죽으라고 명하신다”(Bonhoeffer, 99)라고 기록했다. (211.3)
 예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6:24)이라고 주장하시면서 본질적인 인간의 문제를 가리켰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를 내 생애의 보좌에 앉힐 것인가? 나의 자아인가 하나님인가? 나의 뜻인가 하나님의 뜻인가?”이다. 나는 동시에 둘 모두를 섬길 수 없다. 내가 그리스도의 주장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될 때 나는 그를 십자가에 못박든지, 아니면 그가 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해야 한다. 중립 지대는 없다. (211.4)
 그처럼 십자가는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약간의 금욕이나 바가지 긁는 남편이나 불신실한 아내가 아니다. 십자가는 자아 중심적인 삶에 대한 죽음의 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개인의 생활에서 십자가 후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탄생이 온다(요 3:3, 5; 롬 6:1-11). 그처럼 역설이 생겨나는 것이다.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못박음을 통해서 이생에서의 진정한 생명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말이다(16:25, 26). 그리스도의 생애에서의 큰 시험이 십자가를 회피하라는 것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우리의 생애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212.1)
 불행하게도 십자가의 생활은 단 한 번으로 끝나는 경험이 아니다. 누가의 평행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눅 9:23) 그들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투쟁은 유익이 없지 않다. 예수께서는 자아를 포기하는 것이 곧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하실 뿐 아니라 그에게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겠다(16:27)고 말씀하신다. (212.2)
 예수의 죽음의 교훈은 제자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였다. 그는 첫째 복음서에서 두 번 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가르침을 되풀이 하시고(17:22, 23; 20:18, 19), 한 번 더 자신의 부활(17:9)과 십자가에 못박히심(26:2)에 대하여 따로따로 말씀하실 것이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그들이 갖고 있었던 사고 방식 때문에, 그 두 사건들을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과거의 경험의 힘과 갈망하던 결과의 인력(引力)은 이처럼 큰 것이다. 그것은 가장 직설적인 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 수 있다. (212.3)
 왕국들에 대한 전조
 베드로와 그의 동료 제자들은 예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예언하시자 너무도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제3일에” 그가 “살아나실” 것이라는 예언을 완전히 못보고 넘어갔다(16:21). 그들은 그 파국으로 말미암아 정신이 어리둥절해져서 그 약속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무덤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끝이 아닐 것이었다. 그는 다시 살아나셔서 아버지께로 승천하실 것이다. 그의 죽음은 고난당하시는 종과 통치자 메시야로서의 메시야의 역할 사이의 경계선일 것이다. (212.4)
 제자들은 그 왕국에 대한 그들의 기대에 있어서 전적으로 잘못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유대인들처럼 그 왕국이 단계별로 올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한편으로, 그들이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셨던 모든 것들을 조심스럽게 귀담아 들었더라면, 그들은 그 왕국의 향상과 진척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213.1)
 예수께서는 자신이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실 뿐 아니라 27절에서는 그의 재림에 대하여 그들에게 명백하게 말씀하신다. 재강림하실 때 그는 베들레헴의 더러운 구유에 누운 아기로 오실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다. 그렇다. 메시야는 영광스러운 정복하시는 왕이 되실 것이지만, 그가 고난당하는 종으로서 죽으신 이후에라야만 그렇게 되실 것이다. 왕으로서의 메시야의 모습은 재림 때 그리스도께서 흰말을 타신 정복자로 묘사되고 있는 요한계시록 19:11-21에서 가장 잘 묘사되어 있다. (213.2)
 자신이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에 뒤이어 독자들이 그 의미를 알아내기 위하여 씨름해 온 여러 구절들 중 하나가 뒤따른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27절)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2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