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서를 세밀히 읽는 독자들은 요한복음이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신 내용이 기록되지 않은 유일한 복음서라는 사실을 곧 알 수 있을 것이다(마 4:1-11; 막 1:12, 13; 눅 4:1-12를 보라). 그러나 요한복음은 가끔 예수의 생애중의 사건들을 신학적으로 사용하곤 했는데 그러면서도 그 신학 이면의 원래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예를 들면, 주의 만찬과 겟세마네). 광야에서의 세 가지 시험의 본질이 요한복음 6장7장에서 반복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왕이 되라는 시험을 받으셨다(6:15; 비교 마 4:8-10; 눅 4:5-8). 그는 떡과 연관된 이적을 행하라는 시험을 받으셨다(6:30, 31; 비교 마 4:3, 4; 눅 4:3, 4). 또한 그는 성전에서 자신을 드러내라는 시험을 받으셨다(7:2, 3; 비교 마 4:5-7; 눅 4:9-12). 차이점은 요한복음에서는 이 모든 시험들이 인간 매체들을 통해 이르러왔다는 것이다(마 16:21-23에 베드로가 예수를 시험하는 인간 매체가 된 장면을 보라). (197.1)
 생명의 물
 성전 예식에 사용된 제사장의 용기(容器)들은 짧은 시간 동안만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 나아오는 자들은 언제나 흘러나오는 물을 소유하게 된다. 초막절 동안 백성들은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는데, 왜냐하면 그 때의 비는 곡물을 풍성하게 성장시키는 계절에 대한 좋은 전조였기 때문이다. 7:37-39의 예수의 진술은 백성들의 물에 대한 요구가 의외의 방법으로 응답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예수께서는 그가 7:38에 기록된 말씀을 하셨을 때, 구약의 많은 구절들—사 44:3, 4; 58:11; 겔 47:1-12; 욜 3:18; 슥 14:8—을 염두에 두신 것으로 보인다). (197.2)
 7:39에서 성령은 예수께서 제공하시는 생수이시며, 예수께서는 그에게 나아오는 자들에게 성령의 근원이시다. 이런 천명 속에서 예수께서는 성전을 대체(代替)하고 있는데, 이것은 구약의 종말론적 기대 속에는 성전이 땅을 소생시키는 생수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겔 47:1-12). 그는 이미 요한복음 4:10-15에서 자신을 생수로 선포하셨다. 예수께서 7:38에서 취하신 새로운 방향은 그에게 나아오는 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다른 사람이 그 생수를 길을 수 있는 원천이 될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믿는 자는 성령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 (198.1)
 ■ 말씀에 들어감
 요한복음 8:1-11을 적어도 두 번 읽은 후에 다음의 질문들에 대답하라: (198.2)
 1. 만약 예수께서 간음한 여인을 가게 하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면, 그대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무슨 말로써 예수를 고소했을 것으로 생각하는지 써 보라. 만약 예수께서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고 하셨다면 그들이 무엇이라고 말했겠는가? (198.3)
 2. 만약 그대가 예수의 입장에 처해 있었다면 땅 위에 무엇이라고 썼을지 한두 문단으로 묘사해 보라. (198.4)
 ■ 말씀을 탐구함
 문단의 구조와 배경
 이 문단과 요한복음의 나머지 부분과의 관계는 다소 불명확하다. 「새국제역」에는 “최초기의 것이고 가장 신뢰할 만한 필사본들에는 요한복음 7:53-8:11이 없다”라는 설명이 들어 있다. 이는 「제임스왕역」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충격적일 수 있으나, 「제임스왕역」은 신약의 상당히 근래의 사본들(12-15세기) 중의 몇 개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 100년 이내에 많은 고대 필사본들이 발견되었는데, 어떤 것들은 자그마치 제2세기의 것들도 있다. 개황(槪況)은 다음과 같다. (198.5)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사로잡힌 여인의 이야기는 모든 초기의 필사본들에는 생략되어 있다. 또한 시리아어, 라틴어, 그리고 콥트어로 번역된 대다수의 가장 오래된 역본들에도 이 부분은 생략되어 있다. 제12세기(가장 오래된 헬라어 필사본들이 기록되고 나서 1,000년이 지난 후) 이전에는 요한복음의 헬라어 주석가가 이 이야기를 언급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최초기 교부들 중의 어느 누구도 이것을 요한복음의 일부분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게다가 이 이야기가 들어 있는 초기 필사본들 중의 다수에는 그것이 이 복음서에 속하는지가 불분명함을 가리키는 표시가 포함되어 있다. (199.1)
 또한 이 이야기가 포함된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이 놓여진 위치는 놀랄 정도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가장 많이 발견되는 위치는 현대의 성경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7:52 다음이다. 그러나 필사본에 따라 요한복음 7:36 다음에 있기도 하고 요한복음의 끝(21:25 다음)에 부가되기도 하며, 누가복음 21:38 다음이나 누가복음의 끝(24:53 다음)에 각기 부가되어 있기도 하다. 이러한 위치의 다양함은, 만약 이 이야기가 요한복음의 원본의 일부였더라면,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199.2)
 그러나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의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낸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제2세기에 그것은 교회 내에 분명히 알려져 있었다. 문제는 이것이 요한복음의 일부로서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9.3)
 그렇다면 우리는 이 모든 점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분명히 이 이야기는 다양한 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 기억된, 예수의 생애 가운데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 비록 그것이 복음서 원본들 중의 하나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특별한 가르침에 대한 독특하고 근거있는 증거로서 인정받았다. 아마도 이 증거를 보존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여러 서기관들이 정경 복음서들 중의 하나에 이것을 덧붙이려고 했을 것이다. 이것을 7:52 다음에 두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것인데, 이것은 이 이야기가 7장8장의 예수께서 판단하기를 거부하시는 논쟁과 토론의 삽입구와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8:15). (199.4)
 문단의 세부 사항
 자기의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7:53)과 “집 없는”(“homeless”) 사람처럼 보이는 예수(8:1) 사이의 대조는 예수를 그의 머리 둘 곳도 없는 분으로 묘사하는 다른 복음서들에서도 생소하지 않게 나타난다(마 8:20; 눅 9:58). (200.1)
 간음(8:3, 4)이란 용어는 이 여인이 결혼하고 그의 남편을 속이다가 사로잡혔음을 의미한다. 오직 여인만 데려온 것은 예수의 원수들이 간음의 경우에 쌍방을 모두 돌로 쳐야 한다고 요구한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다(레 20:10; 신 22:22). (200.2)
 고소자들이 도착했을 때 예수께서는 앉아 계셨으므로(2절), 허리를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기가 쉬웠다(6절). 그가 허리를 구부려 두 번째 쓰신 것은 고소자들이 가능한 한 체면이 손상되지 않은 채 떠나갈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8, 9절). 비록 성경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아마도 예수께서는 땅 위에 고소자들의 은밀한 죄들을 기록하고 있었던 것 같다(화잇, 시대의 소망, 461; Barclay, 2:3). 대부분의 사람들은 땅 위에서 그런 것을 발견하면 황급히 떠나가고 말 것이다!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