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14. 엘 예슈아—하나님은 구원자 (구속자 하나님)
 천사 가브리엘은 요셉에게 전언하기를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임이니라”(마 1:21) 하였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로는 이 이름이 예슈아(Yešuà )인데, 성경에는 여호수아(Joshua)로 되어 있다. 그 뜻은 “구원자”이며, 구약에 76번 나온다. 영문 성경에는 이 말이 여덟 가지 다른 말로 번역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구원”(salvation)으로, 63번이나 그렇게 번역되었다. 예슈아(Yešuà )는 헬라어와 라틴어를 거쳐 영어로 옮겨지면서 Jesus로 변했다. (204.1)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 뜻을 중시했다. 이것은 하나님도 그렇게 하셨다. 처음 사람에게 아담이란 이름을 지어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아무튼 이름은 부모들이 지어 주는 경우가 많았다. 교육과 격려의 목적으로 라멕은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지었는데, 그 뜻은 “위로”(慰勞)이다. 아마도 그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창 5:29). 바벨 탑을 짓던 사람들이 언어의 혼잡으로 공사를 중단하고 분산되던 해에 노아의 손자 에벨은 아들의 이름을 벨렉이라 지었다. 이 말의 뜻은 “분열”(分裂)로서 그 해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창 10:25). 야곱이 개심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다. 그것은 “엘 의 왕자”란 뜻이다. 마리아가 낳은 아들의 이름도 바로 그런 전통과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약에 나타난 수많은 하나님의 이름들 중, 아버지께서 독생자를 위해 선택해 주신 이름은 예슈아 , 구원자, 예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이름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204.2)
 예슈아 의 최초 언급
 부조 야곱은 자신의 임종이 가까움을 알고 열두 아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불러모아 그들에게 작별과 축복의 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조용조용 말을 이어가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오 주여, 내가 주의 예슈아(구원)를 기다렸나이다!”(창 49:18; 참고 사 25:7-9). 어떤 히브리어 학자들은 이것을 “구원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일 것으로 생각한다. 유명한 고대 유대인의 성경 주석인 예루살렘 타르굼(Jerusalem Targum)은 야곱의 이 소원을 웅변적으로 해설했다: “내 영혼이 기다리는 것은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구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니까요. 마노아의 아들 삼손의 구원도 아닙니다. 그것도 임시일 테니까요. 나는 다윗의 아들 메시야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그는 장차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그들이 흩어졌던 땅에서 돌아오게 할 것이니, 내 영혼은 그 구원을 고대합니다. 주의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옵니다.” (205.1)
 구원의 드라마에서 최초로 언급된 예슈아 라는 이 말은 야곱에 의해 예언적으로 한 분이신 메시야께 적용되었다. 옛날 허먼 크레머(Herman Cremer)는 이렇게 설명했다: 예슈아 는 소수의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는(삼하 10:11), 하나님에 의한 구원, 특히 메시야적 구원을 표현하는 말로 쓰인다.”1) 그러므로 야곱의 한 말을 문자 그대로 옮긴다면 정확히 이렇게 된다: “오 주여, 내가 주의 예슈아(예수 또는 구주)를 기다렸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KJV에 단순히 “구원”으로 번역된 이 말을 정신차리고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제 그 중 몇 가지를 찾아보려고 한다. (205.2)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들은 “구원하는” 사역을 했다는 뜻에서 그들을 “구원자들”이라 칭한 경우가 있었다(느 9:27).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약속하시기를 네가 이스라엘 민족을 미디안인들의 손에서 구하리라(yašà , 야샤, 역시 동일 어원에서 나온 동사) 하셨고(삿 6:14), 사무엘에게 명하여 사울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라 하실 때, 그가 내 백성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리라(yašà, 야샤) 하셨다(삼상 9:16). 요나단은 블레셋인들의 압제 아래 신음하는 자기의 동족을 구원하는 일에 하나님의 도구로 쓰였다(삼상 14:39). (207.1)
 이 히브리어는 “구원자”로도 번역되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시리아인들을 대적할 구원자를 주셨고(왕하 13:5), 그 후에도 애굽의 도적 떼로부터 그들을 구할 또 다른 구원자를 보내 달라는 기도를 응답하셨다(사 19:2). 이런 여러 본보기를 통해 우리는 인간 대리자들은 표면적 “구원자”들이며, 그들의 성공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성령의 은혜로(참고 고후 12:9, 10) 그들이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에 기인했음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히브리 사람들은 그들이 고대하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메시야)인 구원자(예슈아)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의 하시는 일을 믿었다면 선지자들이 심어 준 모든 영감적 소원이 그들과 그들의 나라에 성취되었을 것이다. (207.2)
 예슈아가 신인(神人)을 말하는 경우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벗어나 약속의 땅으로 가는 하나님의 선민의 역사를 회고해 보고 모세는 그들이 그렇게도 쉽게 여호와를 버리고 그들의 “구원(예슈아)의 반석”을 경시하게 된 것을 개탄했다(신 32:15). 여기서 그는 “반석”예슈아 를 동일시했다. 그 연설의 전반부에서 그는 야훼 자신이 반석임을 지적했다(신 32:2-4). 지팡이에 맞은 반석은 약속된 구원자의 가시적 표상이었다(참고 고전 10:4). 이 문맥에서 야훼예슈아 는 동일한 인격적 존재를 가리키는 이름임이 분명하나 두 별개의 특수한 사역의 국면이 있음을 말해 준다. 여기서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가 발견된다. (207.3)
 이보다 40년 전 모세는 홍해 바닷가에 서서 애굽 군대를 기적적으로 파멸시키고 이스라엘의 도피로(逃避路)를 열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승리를 목도했다. 당시 그는 그 때를 위해 자기가 지은 감격적인 성가로 백성의 찬송을 인도했다. 모세는 그 노래에서 여호와를 그들의 “힘”“노래”라고 찬양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예슈아 였으며, 그의 백성의 엘(전능하신 하나님)이셨다(출 15:2). 예슈아 가 동일한 성구에 함께 나오는 것은 이 때가 처음이며, 이로써 우리는 그 두 이름이 구원자인 하나님 한 분을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야훼, , 예슈아 는 한 분의 이름임을 알 수 있다. (208.1)
 다윗은 그의 생애 말년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자기의 확신을 나타내는 시 한 수를 읊었다. 그 첫 줄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나님은 ... 나의 구원자(예슈아)이시라!”(삼하 22:3). 여기서 그는 예슈아 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썼다.2 다윗은 그 시를 이렇게 마쳤다: 여호와는 “그의 왕을 위한 구원(예슈아)의 망대시며,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야)와 다윗과 그의 씨에게 영원토록 자비를 베푸시는도다”(삼하 22:51). 시 전편을 통해 다윗은 평생토록 자기를 돌보시고 지켜 주신 자기의 구원자와 메시야에게 마음을 온통 쏟고 있음을 보여준다. (208.2)
 시편에 나타난 예슈아
 시편에는 예수를 구원자로 말한 곳이 많이 있다. 어떤 시는 제목이 뭇랍벤(muṯlabben, “아들의 죽음”)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다윗이 지은 심판에 대한 엄숙한 시이다. 성경학자들은 이 제목의 의미심장한 뜻을 몰라 오랫동안 궁금해했다. 이 시는 다윗이 아들 암논이나 압살롬이 죽은 후에 지은 시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읊은 예언적 시일까? 나는 갈바리를 염두에 두고 그 시를 읽을 때 더 깊은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시는 다윗 당시의 어떤 사건이나 가족적 경험을 다룬 시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시의 중심부에서 그는 외친다: “내가 [당신의] 예슈아 를 기뻐하리라!”(시 9:14). 단순히 “구원을 기뻐하리라” 하는 것보다 예슈아 를 기뻐하리라”고 하는 것이 더 본문의 뜻에 잘 어울린다. (208.3)
 이 심판의 시에서 예슈아 의 임재를 느낀 순간 왕의 마음에 기쁨이 일어났다. 그는 마지막 때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는 자는 옹호와 보상을 받으리라 하신 약속을 굳게 붙잡고 이렇게 읊었다: “내가(하나님이) 장수(長壽)로 그를 만족케 하여 내 예슈아 를 그에게 보이리라”(시 91:16). 세상 역사의 마지막 사건에 초점을 둔 이 예언적 승리의 노래에서 시인은 보호와 위로를 보장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자기의 믿음을 밀착시키고 있다. 그 때 주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충성된 자들에게 영생을 보장하시며, 언젠가 그들이 예슈아, 즉 구원자 예수를 보게 될 것을 약속하신다. 이 약속은 승리한 어린양의 종들이 “그의 얼굴을 볼”(계 22:3, 4) 때 성취될 것이다. (209.1)
 이미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성경에는 예슈아“구원자”가 아닌 “구원”으로 번역된 곳이 여러 군데 있다. 이것은 마치 코데쉬(qoḏeš)가 “거룩한” 또는 “성소”로 번역된 경우와 흡사하다. 신중한 성경 학도는 이런 경우를 일일이 따져 올바로 구분해야 한다. 때로는 그 말에 동의어를 대체해 봄으로써 분명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오직 한 단어만이 거기에 부합되는 때가 있다. 다른 경우에는 어느 말이든지 다 맞을 때도 있다. 예슈아“구원하는 자,”“구원자”(시 118:14, 21, 22; 참고 “돌”도 예수를 말함)를 의미할 수 있고, 동시에 “구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만일 한 가지 이상의 단어가 똑같이 잘 맞을 때는 그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는 대신 그 모든 단어의 뜻을 다 포함하는 종합적 의미를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09.2)
 다음에 소개하는 성구들에서는 예슈아 가 계속 “구원”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그 말 대신 구원자/예수를 넣어도 의미가 훌륭하게 통한다:

 “내가 [당신의] 예슈아 를 기뻐하리라!”—구원자/예수(시 9:14; 35:9).

 “주의 영광은 예슈아 안에서 위대하며”—구원자/예수(시 21:5).

 예슈아 는 엘 나의 반석이시라”—구원자/예수(시 89:26).

 “오직 주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요 나의 예슈아 시며 ...”(시 62:2).

 “주께서 그의 예슈아 를 알리셨고, ... 땅의 모든 끝이 우리 하나님의 예슈아 를 보았도다”(시 98:2, 3). (210.1)
 다음의 성구들에서는 예슈아“구원”으로 번역되었으나 그 말에 인칭 대명사가 어미에 달렸으므로 더구나 인격으로 번역하여, 구원자/예수로 해석해야 한다. “진실로 내 영혼이 하나님(엘로힘)을 바라니(앞에서 조용히 기다리니), 나의 예수(Yešuàṯi)가 그에게서 오는도다”(시 62:1). “여호와 내 예수의 하나님이여”(Yahweh Élohey yešuàṯi, 시 88:1). 그분은 “우리 예수의 하나님”(Élohey yešuàṯi, 시 68:20)이시다. 다시 말하지만 이 구절들에서 “구원”을 제거하고 그 대신 “구원자”“예수”를 그 자리에 넣는 것이 더 실감나는 번역이 된다. 구원은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10.2)
 선지서들에 나오는 예슈아
 복음 선지자 이사야가 독자의 주의를 구원자에게 자주 돌리게 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보라, 네 예슈아(구원 또는 구원자)가 오나니, 네 상급이 그에게 있고, 그의 역사가 그의 앞에 있느니라”(사 61:11). 이 구절에서 예슈아 는 분명히 인격적 존재이다. 그는 인류를 위해 상급을 가지고 오시는 재판장이시다. (210.3)
 이 메시야의 예언에서 예수는 여호와의 종으로 불리고 있다. 그의 사명은 참 이스라엘을 땅 끝에서 불러모으고, 이방인의 생활에 빛을 비춰 주는 온 세상의 구원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의 사명임을 예수는 나사렛 회당에서 한 설교에서 밟히셨다(눅 4:17-19). “그가 또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의 종이 되어 ... 이스라엘의 보존된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라. 내가 또한 너를 이방인들에게 빛으로 주리니 네가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되리라(또는 나의 구원자 예슈아 가 되리라)”(사 49:6). 다음 구절들에서는 “구원”“구원자”로 교체하면 인격적 구원자를 힘있게 강조할 수 있다: 예슈아 우리 엘로힘(사 52:10). 예슈아 는 우리에게서 멀리 있나이다”(사 59:11). 그는 예슈아“성벽들과 보루들”로 세우신다(사 26:1). 예슈아 는 나의 의”(예슈아=의[義], 사 51:6, 8; 참고 56:1; 62:1). 이 모든 구절은 오직 예수께만 해당된다. (2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