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와 로마 군대 제3장 초기 그리스도인 병사와 로마 군대 (A.D. 173-312) C. 로마 군대 종교와 초기 그리스도인 군복무
 미트라교의 어떤 요소가 병사들에게 호소력을 행사했는가에 대해서는 몇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첫째로 미트라교에 있는 일곱 단계의 계층 서열 중 그 제 3단계인 전사(miles) 계급을 들 수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병사의 화관론」 제 15장에서 이 전사 의식을 서술하였다. 전사 의식에서는 전사 후보자에게 칼에 꽂혀있는 면류관을 수여하는데 이때 후보자는 미트라가 신자의 면류관이기 때문에 칼에 꽂혀있는 면류관을 거부해야 한다. 둘째로는 이 종교의 이원론적 사상이 많이 지적되고 있다. 미트라는 빛과 어둠의 싸움에서 선한 빛의 편에서 싸우는 전사이기 때문이다.51 이 밖에 이 신앙에는 여자가 참여치 못하게 되어있는데 이러한 금지 규정도 남자들인 군인들에게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했을지 모른다. (178.1)
 두라 제일력(Feriale Duranum)이 간행되던 때에는 미트라교가 군대의 공식적인 종교가 아니었으나 A.D. 3세기 말엽의 증거에 의하면 태양으로 상징되고 있는 솔 인빅투스(Sol Invictus) 신과 결합되어 준 공식(準 公式) 종교의 대접을 받고있다. 솔 인빅투스는 아울레리우스 황제 치하의 주화(鑄貨)에 군사적인 상징들과 함께 나타나고 있다. 솔 인빅투스가 군대를 위해 창안된 신이라는 주장은 이러한 증거 위에 기초하는 것이다.52 (178.2)
 솔 인빅투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주피터(Juppiter), 헤르쿨레스(Hercules), 빅토리스(Victoris) 등 로마의 전통적인 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군대 종교의 정책을 펼 때도 살아남았으며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와서는 오히려 그 세력이 더 기승하였다.53 솔(Sol)은 콘스탄티누스의 주화에 뿐만 아니라 아치 위에도 나타나고 있다.54 (178.3)
 미트라교 다음으로 주목을 이끄는 비공식 종교로는 주피터 돌리체누스(Jupiter Dolichenus) 신앙이다. 이 신은 주로 철의 제련 및 무기제조와 연관되었기 때문에 군대의 신으로 섬김을 받게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비문들을 제외하고는 이 종교의 특징에 대해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이 신앙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이 신앙이 다른 신들의 숭배와 밀접히 결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피터 돌리체누스는 빅토리아, 헤르쿨레스, 미네르바와 함께 나타나고 있으며 군기들과 함께 신사에 안치되어 있는 그림도 있다.55 뿐만 아니라 황제 및 황후숭배와 연관된 경우도 있으며 주노(Juno Regina) 여신과 연관된 경우도 발견되었다.56 돌리체누스(Doliachenus)의 숭배자들은 미트라 숭배자들보다도 더 자유스럽게 돌리체누스를 로마의 신들과 결합시키고 있다. 이 같은 시도에는 다른 신들의 숭배자들까지 돌리체누스 숭배에 끌어들이려는 동기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57 숭배자들 편에서는 여러 신들을 섬김으로써 그 신들이 약속하고 있는 모든 축복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유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58 (179.1)
 이 밖에도 고고학적인 조사가 밝히는 바에 의하면 병사들의 종교적 취향이 다양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리치몬드(Richmond)는 이같은 다양성을 “장기판 같은 보편성”(checquered catholicity of belief)이라고 묘사했다.59 대부분의 병사들은 교리상의 책임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신앙들을 수용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신앙들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택일 문제가 아니라 “관심 있는 추가사항”에 불과했다.60 (179.2)
 초기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직면한 종교적 환경은 위와 같았다. 이같은 환경에서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신앙적 진로는 어떤 형태로 추구되었을까? (180.1)
 3.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신앙적 선택
 로마 군대의 종교적 환경과 그리스도인 병사의 신앙적 선택의 관계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상당수의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별탈 없이 군복무를 수행했다는 사실과 또 상당수의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군복무 중에 순교했거나 군에서 쫓겨났다는 두 사실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61 (180.2)
 앞에서 여러 번 테르툴리아누스는「변증론」에서 “우리들은 당신들과 함께 항해도하고 전쟁도 치르고 있으며 . . . 모든 병영까지도 가득 채우고 있노라”고 호언하였다.62 그리고 유세비우스와 테르툴리아누스 양인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휘하 제 12 전격군단에 다수의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복무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큰 전공을 이룩한 사실을 보고하였다.63 뿐만 아니라 유세비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근위대에도 상당수의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복무하고 있었다고 하였으며64 이 사실은 그리스도인 신병 막시밀리아누스를 신문하던 아프리카 총독 디오 카시우스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65 이 병사들은 테르툴리아누스의「병사의 화관론」(De Corona militis)의 주인공이 군장의 하나인 화관을 벗어 던지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고 군복무를 거부할 때 이 그리스도인 병사 순교자의 행위를 무모한 것으로 생각했던 병사들에 의해 대표되는 그런 그리스도인 병사들이었다.66 (180.3)
 그런가 하면 유세비우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민간인 그리스도인들을 심문하는 재판정에 경비 임무를 위해 동원되었던 1개 분견대 병력의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심문 받던 그리스도인이 재판정에서 “신앙을 부인하려는 낌새”를 보자 분히 여겨 일제히 재판장으로 달려가 자신들의 그리스도인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하는 사건도 발생했다.67 그래서 군복무에 별 말썽 없이 종사했던 그리스도인 병사들이라고 해서 한마디로 또 한가지로 배교자들이었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로마 군대 안에 그리스도인 병사 순교자들과 말썽 없는 그리스도인 군복무자들이 어떻게 동시에 병존할 수 있었는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대답을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신앙에 대한 로마 군대 자체의 종교적 태도와 그리스도인 병사들 자신의 신앙적 특성의 분석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181.1)
 앞에서 보았듯이 역사적 신빙성이 확실한 병사순교자들에 대한 분석에 의하면68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이전에는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순교가 로마 당국의 적극적인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병사의 개인적인 신앙 양심이 갑작스럽게 고양하게 되는 경험과 연관되고 있다.69 그리고 재판관들과 상관들은 병사 순교자들에게 백방으로 살길을 찾아주려고 애쓰는 인상을 주고 있다. 혹독했던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때에도 민간인들에게는 로마의 신들에게 분향했음을 증명하는 문건들(Libelli)을 요구하고 있으나 그리스도인 병사들에게는 그같은 요구가 제시되었던 것 같지 않다. 이러한 근거에서 녹크 교수(A. D. Nock)는 히틀러 시대에 독일의 군대가 유대인들의 피난처가 되었듯이 로마의 군대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적으로 관용적이었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70 그리스도인 병사들에게 추방이나 순교가 요구되는 가혹한 사례들도 보고되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는 드문 경우이었다고 한다. 대체로는 군대의 단결성과 지휘관의 재량권 및 병사에 대한 보호 의지가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신앙문제에 대한 관용적 태도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182.1)
 또 군대의 이같은 특수 분위기는 셉티무스 세비루스 황제(193-211) 이후 증가된 로마 군대의 특권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베루스 황제는 임종시에 두 아들 제타와 카라칼라를 불러 세우고 “군인들과 뜻을 같이하고 군인들을 부유케하라. 그리하면 너는 누구든지 멸시할 수 있다”고 유언한 것으로 전해진다.71 심지어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도 발렌스(Valens)와 발렌티니아누스(Valentinianus)가 우상숭배 문제로 군에서 퇴직을 원했을 때 “그들이 국가에 유익함을 알고” 계속 군대에 붙들어 두었다.72 (182.2)
 병사 신분의 특수성은 그리스도교 병사의 입장에서 볼 때 단지 제국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교회와의 관계에서도 적용되는 문제였다. 그리스도인 병사들은 교회에서 볼 때 교회의 지도력이 효과적으로 미칠 수 없는 먼 외곽 사회의 구성원이며 특수한 규율하의 신자들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 같은 교부들은 민간인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 병사에게 이중적 그리스도교 윤리가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73 그같은 주장 자체가 당시 그같은 이중적용의 논리가 교회 내에 팽배해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고 사실로 교구를 책임진 교부들에게서 그같은 주장들이 나왔던 것이다.74 (183.1)
 로마 군대의 종교적 환경에서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취한 선택은 대략 다음의 셋으로 구분된다. (183.2)
 첫째, 군대의 상관들과 동료 병사들의 묵인 하에서 군대의 이교 종교의식에 참가해야 하는 책임을 면제받았다.75 둘째, 이교 의식에는 참가하되 신앙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한 방책으로(또는 이교신의 마력을 피하기 위하여) 상관의 묵인 하에 이교 의식에 앞서서 십자가 성호를 그었다.76 셋째, 철저히 그리스도교 신앙 양심을 쫓아 이교 신에 대한 분향을 거부하고 퇴직 또는 순교의 길을 택했다.77 (183.3)
 위의 셋 중에서 두 번째 사항에 대해 부연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의 묵인은 군대 당국으로부터의 묵인일 뿐만 아니라 군대라는 특수사정을 참작한, 교회로부터의 묵인일 가능성도 높다. 히폴리투스는 마귀의 마력에 대한 방비책으로서 “수난의 표시”(sign of passion)를 긋도록 권고하고 있다.78 이로써 십자가 성호 긋기는 로마 군대 당국의 요구와 그리스도인 병사의 신앙적 입장 및 교회의 입장이 서로 타협하는 중요한 접점이었던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는 이같은 타협이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병사들은 완전한 배교와 순교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4.1)
 일찌기 녹크(A. D. Nock)는 로마 군대 당국의 종교적 관점과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다양한 신앙자세들을 설명할 수 있는 토대의 하나로서 유착(adhesion)과 전향(conversion)이라는 두개의 신앙 개념을 발전시켰다.79 유착성 신앙은 삶의 경험과 필요의 여러 국면에 관련된 여러 신앙 대상들에 대한 한 인간의 종교적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숭배자는 특정 신앙에 규정된 종교 의식들을 행하고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그 특정 신의 축복을 누리고자 한다. 이러한 신자는 자신의 종교 행위로 그 종교가 약속하는 혜택을 거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국가의 수호신에게는 부강하고 태평한 나라를, 물의 신 님프에게는 신선한 물의 풍부한 공급을 기대하여 그 신을 숭배하는 것이다. (184.2)
 한편 전향성 신앙은 섬기는 신에게 신자의 삶 전체를 헌신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과거의 잘못된 생애를 청산하고 전혀 새로운 삶의 관점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어느 누구도 유대교나 그리스도교를 이용할 수는 없다. 단지 그 종교의 목적을 위하여 그 종교를 기뻐할 수가 있을 뿐이다. 녹크의 이 두 개념을 수정하여 발전시킨 것이 조나단 스미드(Jonathan Smith)의 “종교의 토착형과 디오스포라형”(Native and Diospora types of Religion) 개념이다.80 대개의 고대 종교들이 그러하듯 지역성에 연계되어 있는 토착성의 종교 단계에서는 신자의 영혼을 요구하지 않고 단지 종교상의 의무에 충실할 것과 종교 의식의 정규적인 준수만을 요구할 뿐이다. 그러나 일단 신자가 그 종교를 가지고 고향 땅을 떠나게 되면 타향에서 그 종교는 변하게 된다. 본토에서는 주로 국가의 안녕에 관심하던 그 종교가 이제 타향에서는 주로 개인의 구원 문제에 관심한다. 따라서 이전의 제의적인 표현들은 떨어져 나가고 대신에 윤리적, 교리적 표현이 들어선다. 지역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교를 디오스포라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84.3)
 우리는 트라야누스 황제와 플리니우스의 교신에서도 이 두가지 즉 유착성 신앙과 전향성 신앙 유형의 자세가 논의되고 있음을 본다.81 플리니우스가 그리스도교 피의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황제의 상(像)에게 분향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는 제의적인 행위였다. 해당 그리스도인의 내면적인 의식은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다. 병사 순교자 열전에서도 로마 군대종교에의 제의적 순응에 대한 군대 당국의 동일한 관심이 나타나고 있다. 장관(praeses) 막시무스에게 불려온 퇴역병 율리우스는 심지어 황제의 상에 대한 분향의 책임을 장관의 강압에 돌릴 수 있게 하여 교회로부터의 비난을 피할 수 있게 해주려는 군 당국의 회유까지 완강히 거절하고 순교를 택했다.82 율리우스는 일부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이교신에게 겉치레로 분향을 함으로써 곤경을 벗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185.1)
 이로써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 병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로마인들의 이른바 유착성의 종교관을 가지고 로마 군대의 종교에 적응했을 것으로 상상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병사들의 이러한 종교적 관점은 로마 종교의 다신론적 체제에 그리스도교를 병합시키는 형태의 것으로서 이후 그리스도교의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제설혼합적 종교 통합의 방향을 미리 암시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 병사의 두 번째 선택은 앞서 열거한 두개의 다른 선택들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다. 다른 두 개의 선택, 즉 상관과 동료의 묵인 속에 군대 종교에 대한 배타적 신앙심을 고수하거나 순교나 퇴역 등 공개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신앙 양심을 나타내는 선택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어 가고 있는 반면에 로마인들의 종교적 시각에 맞추어진 종교 적응적 선택이 그 이후의 시대를 열고 있었다는 것이다. (18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