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와 로마 군대 제3장 초기 그리스도인 병사와 로마 군대 (A.D. 173-312) C. 로마 군대 종교와 초기 그리스도인 군복무
 본 절에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군복무 경험을 로마 군대종교의 배경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초기 교회와 군대의 갈등에 있어서, 그리고 군복무에 따른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고통과 선택에 있어서, 로마 군대종교가 차지한 몫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65.1)
 초기 그리스도인의 군복무와 관련하여 로마 군대종교를 연구한 기존 연구로서는 도마제위스키(A. Von Domazewski)의 논문이1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주로 묘비 자료와 문헌적 증거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 논문은 그간 문헌적 증거 쪽에 상당한 보완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지적되어 왔는데 로마 군대종교의 “사해사본”이라고 평가되는 두라 제일력(祭日曆. Feriale Duranum)이 유프라테스에서 발견됨으로써 이 보완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165.2)
 제일과 제물의 목록이 기재되어 있는 제일력(Feriale)은 두라-유로포스(Dura-Europos)의 발굴로 발견되어 그 내용이 일차로 로스토프체프(Rostovzeff) 교수에 의해 출판되었다가 1940년에 Robert. O. Fink, Allan S. Hoey, Walter F. Snyder가 해제를 붙여 텍스트 전체를 발표하였다.2 두라 제일력(Feriale Dura-Europos)의 텍스트와 해제가 발표된 이후 녹크(A. V. Nock) 등에 의해 앞의 편집자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텍스트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졌으며3 근래에 와서는 헬제란드(J. Helgeland)가 초기 군복무 문제와 연관하여 로마 군대종교를 취급한 연구를 발표하였다.4 (165.3)
 1. 로마 군대종교의 발전
 로마의 초기 역사에서는 상비군이 조직되어 있지 않은 채 군사적인 긴급 사항이 발생할 때만 시민병들을 징집하여 대처했기 때문에 특별히 병영 생활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 따라서 특별하게 군대 종교라고 이름지을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5 그리고 로마의 종교적 전통에서는 종교적 제의(Sacra)가 평화의 생활 곧 시민생활에 속한 것으로 되어있고 군대와 전사들의 생활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서도 종군 사제단(Fetiales)의 제의(祭儀)들이 평화시대에 누마(Numa)에 의해 제정된 종교 의식(Religiones)에 대비되는 전쟁 의식(Bellicae caerimon- iae)으로 이해되었다.6 (166.1)
 공화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굳이 군대의 종교의식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들을 찾는다면 몇 가지 규칙화되지 않은 의식들을 들 수 있다. 예컨데 군사령관이 군사 작전에 앞서 신의 뜻을 점치는 의식과 제계의식(齊戒儀式: Lustrationes), 도강할 때 안전을 비는 의식, 노획한 무기들을 소각하는 의식, 장병들을 모으는 소집의식(Evocatio)과 입대 서약식(Devotio) 등이 있었다. 이 밖에도 전투에 승리했을 때 신들에게 제사했다.7 (166.2)
 그러나 이러한 의식들은 규칙화된 것이 아니라 군사령관이 한 가정의 가장과 같은 위치에서 자신의 판단에 따라 이행하는 것들이었다. 병영이라는 것도 군대가 잠시 진군을 중단하고 머물러있는 곳 이상의 무엇이 아니었다.8 군인들은 징집되어 오기 이전에 고향에서 섬기던 신을 섬기고 절기를 지켰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군대의 종교생활을 계획화하려 하지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마치 로마시에 공공 소방대의 설치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과 사정이 같았다.9 (167.1)
 그러나 최소한 B.C. 2세기 이후로는 국방체제의 변화로 군대가 상설 병영화하기 시작했으며 그와 더불어 군대의 종교도 규칙화하는 경향을 띠기 시작했다. 초기 단계에는 군기가 군대종교의 핵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군기를 보관하는 장소가 병영내의 신사(神社, Sacellum)로 간주되었다.10 (167.2)
 병영구조 자체에도 종교적 특성이 발전되어 갔다. 병영 내의 모든 구조물들은 사령관 본영(Praetorium)과 대영문(大營門)을 중심으로 배치되었다. 사령관 본영은 로마시의 카피톨(Capitol) 언덕을 상징했다. 그곳에는 신궁(Aedes)이 설치되어 군기와 황제의 상이 보관되었다.11 헬제란드(Helgeland)는 로마 군대의 이같은 종교적 구조가 다음과 같은 중요한 기능들을 행사했다고 지적했다.12 (167.3)
 첫째, 군대의 종교적 구조는 병사들이 군대에 입대한 그날부터 죽는 날까지 그 속에서 살아야 할 하나의 신성한 세계를 창조했다. 둘째, 군대 종교는 훌륭한 병사의 모델을 제공하며 신들과 황제와 그 대리인들에 대한 존경 표시의 방식을 가르쳤다. 셋째, 군대 종교는 로마 군대의 명예(Honos), 덕(Virtus), 경건(Pietas), 기강(Disciplina)과 같은 추상적인 신 개념을 병사들에게 제공했다.13 넷째, 로마의 군대 종교는 병사들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와 병영 생활에 뒤따르는 죄의식을 극복케 했다. 이와 같이 병영은 움직이는 하나의 신성한 도성이었다. 병영 안에서는 로마 군대의 이른바 공식 종교 의식만이 거행될 수 있었으며 비공식적인 종교행위 등은 병영 밖에서만 가능했다.14 (168.1)
 로마 군대의 공식종교의 강화 조치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다. 사회 각분야가 각기 그 고유의 기능과 직분, 의무를 수행하는 사회질서의 회복에 목적을 두었던 아우구스투스의 전반적인 정책 목적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15 그에게 있어서는 “정치 투쟁과 끝없는 파쟁으로 인한 헌정의 문란, 그리고 내란에 시달린 로마시민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의 처방이 도덕과 종교의 회복 뿐”이었다.16 (168.2)
 그리고 그가 회복시키려는 로마의 옛 덕목의 하나인 경건(혹은 의무감, Pietas)은 군대에서도 핵심적인 덕목이 아닐 수 없었다. 황제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군대의 충성심은 훌륭한 군대 종교에 의해 더욱 효과적으로 배양될 수 있으며 로마의 평화를 수호하는 군대의 임무 자체가 종교적 의식으로 성별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17 또 국가의 신들은 황제의 보호신들이며 군사적 성공의 보증자들이기 때문에 “무신론”이야말로 군대에서 가장 위험스러운 사상이 아닐 수 없었다.18 (168.3)
 아우구스투스는 레피두스의 사후에 대제관(Pontofex Maximus)의 직책을 맡아 죽을 때까지 보유했다.19 황제의 종교적 권위와 직무는 군단 사령관(Legatus legionis)에게 위탁되고 사령관(Legatus)은 친히 또는 예하 장교들을 통해 군단의 종교 의식을 이행했다. 황실의 이같은 정책과 더불어 제일력(Feriale)의 발전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169.1)
 그러나 병사들의 신앙이 획일화되지는 않았다. 병사들에 의해 숭배될 신들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서방 세계에서는 카피톨 3신(Capitol Triad)으로 알려진 주피터(Jupiter), 주노(Juno), 메네르바(Minerva), 마르스(Mars), 빅토리아(Victoria)가 많이 신앙되었으며 근동 지역에서는 로마의 전통적인 신들보다는 그 지역의 신들이 많이 신앙되었다.20 (169.2)
 또 서방 종교와 동방 종교에 대한 병사들의 귀의도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다. 로마 출신 병사들에 의한 동방 종교의 수용과 비로마 출신 병사들에 의한 로마 신들 및 로마화한 희랍신들의 수용이 함께 이루어졌던 것이다.21 (169.3)
 로마 문화의 전파에 끼친 군대의 기여는 일반화된 평가이다. 그리고 로마의 공식 종교는 야만인 출신 병사들을 로마화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로마 군대의 병영이 상설화되면서 군대종교는 그 지역적 특성을 피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 이전에는 병사들이 공식적으로는 모두 독신자들이었기 때문에 종교에 있어서 보수적 경향을 결하고 있었다. 더욱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군단 주둔 지역에서 군단의 신병을 모집하도록 법제화함으로써 군단종교의 지역적 특성은 더욱 촉진되었다.22 신병들은 입대 전에 갖고 있던 신앙습관을 입대 이후에도 계속 지녔던 것이다. (170.1)
 이제는 일반적인 관례에 따라 로마 군대종교를 공식, 비공식의 두 범주로 나누어 그 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70.2)
 2. 로마 군대종교의 특성
 a. 로마 군대의 공식 종교
 로마 군대의 공식 종교는 용어 자체가 뜻하듯 황제에 의해서 각급 군대 조직에서 공적으로 준수되도록 지시된 예배와 의식을 말한다. 앞에서 밝혔듯이 두라-유로포스(Dura-Europos)에서 제일력(Feriale)이 발굴됨으로써 로마 군대의 공식적인 종교 의식에 대해 많은 지식을 얻게 되었다. 이 제일력은 기원 226년 두라(Dura)에 주둔 중이던 제 22보병 분견대(Cohors XX palmyrenorum)를 위해 제작된 것이었다. 손상을 받지 않은 부분은 절반 정도 즉 반 년 분에 그치고 있으나 나머지 반 년 분에 대해서도 추측이 가능했다. (1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