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후반과 17세기 전반에는 성경 묵시문서에 대한 개신교의 해석에 대응하기 위하여 가톨릭의 반대 해석이 개발되었다. 세 명의 학식 있는 예수회 신부가 역사적 접근에 대한 로마의 공격에 앞장섰고, 요한계시록을 주요 초점으로 삼았다. (916.1)
 대안적인 해석 중 첫 번째는 프란시스코 리베라(Francisco Ribera, 1537-1591년)가 개발했다. 리베라는 요한계시록의 처음 몇 장은 요한 당대의 로마에 관련시켰고, 나머지 장들은 미래 그리스도교 세대의 끝에 이단적인 적그리스도가 3년 반 동안 지배할 것에 적용했다. 이후의 주석가들은 리베라가 근대적 미래주의 해석 체계의 창시자였다고 제안한다. 그것은 나중에 새뮤얼 메이틀랜드(Samuel R. Maitland, 1792-1866년)나 존다비(John N. Darby, 1800-1882년)와 같은 저술가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916.2)
 뛰어난 신학자이자 논쟁가인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 Bellarmine, 1542-1621년)는 특히 예언서의 연-일 원칙을 공격함으로써 리베라의 작업을 보강하였다. 벨라르미노는 특히 그의 개신교도 적수들 사이의 해석의 차이를 이용하려고 애썼다. (916.3)
 두 번째 도전은 알카사르의 루이스((Luis de Alcazar, 1554년-1613년경)에 의해 이루어졌다 알카사르는 요한계시록이 초기 세기의 유대인과 로마 이교에 대항하는 교회의 승리에 대하여 이야기했다고 주장했다. 알카사르의 방법이 요한계시록 전체를 과거에 적용했기 때문에, 그의 해석 체계는 과거주의(preterism)로 불리게 되었다. (916.4)
 요한계시록 전체에 과거주의적 접근을 첫 번째로 적용한 사람은 알카사르였을 것이다. 하지만 3 세기 그리스도교의 적대자 포르피리오스는 다니엘서를 과거주의적 접근으로 해석하였고, 그 책을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시대로 제한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포르피리오스와 알카사르는 성경 묵시들의 의미와중요성을 과거로 제한하는 오늘날 역사· 비평적 해석의 선구자가 되었다. (916.5)
 리베라와 알카사르의 제안은 적그리스도를 교황권으로 보는 개신교적 적용에 대한 지지를 다른 데로 돌렸다. 전자는 적그리스도를 먼 미래로, 후자는 먼 과거로 보내버렸다. 두 접근이 서로 배타적이었지만, 그들은 역사상의 교황의 통치 시대로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놓았다. (916.6)
 3. 17-18세기
 이러한 반대 해석들에도 불구하고, 영국, 유럽, 그리고 신세계에 수백 권의 주석들이 등장하면서 묵시에 대한 역사적 적용은 17-18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주목해야 할 강해자들로는 조세프 미드(Joseph Mede, 1586-1638년), 아이적 뉴턴(Isaac Newton, 1642-1727년), 요한 A. 벵엘(Johann A. Bengel, 1687-1752년) 등이 있다. 비록 세세한 부분, 명확성, 이해의 차이는 있지만, 이 강해자들은 기본적으로 성경의 묵시문서를 역사 과정에서의 성취에 적용했다. (916.7)
 이 기간의 천년기에 대한 견해는 대니얼 휘트비(Daniel Whitby, 1638-1726년)가 창안한 새로운 천년 이론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 휘트비는 그리스도가 강림하기 전, 1,000년 동안 복음의 보편적인 승리와 모든 민족의 회심이 일어나는 영적인 천년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916.8)
 휘트비는 유대—그리스도교적 가치가 주도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회를 구상했다. 그는 천년기가 천국의 의와 평강이 넘치는 “황금기”가 될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 그 기간 동안 나라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것이라고 했다. 불행하게도, 천년기를 넘어 먼 미래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연기됨으로써 우리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느낌을 희석시키고 사람들을 거짓된 안도감에 빠뜨리는 경향이 있었다. (916.9)
 D. 근—현대
 1. 예언에 대한 관심의 부흥
 프랑스 혁명 동안 일어난 유럽의 사회 및 정치 기구들의 폭력 전복 사태는 성경의 묵시에 대해 전례없는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대서양 양측에서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에 관한 연구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묵시문학에 대한 주해와 해석가들의 숫자는 유례없는 규모로 증가하는 듯이 보였다. (917.1)
 일부 저자들은 이 시기를 마지막 때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 시기를 묵시문서에서 예고된 사건들의 성취로 간주했다. 특히 밀러파와 같은 집단들 사이에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에 이어지는 천년기의 시작에 대한 강력한 기대가 있었다. (917.2)
 성경을 문자 그대로 고집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구약 예언을 옹호하려는 열정으로 일부 천년기전재림론자(千年期前再臨論者, premillennialists, 전천년론자라고도 함)들은 극단적인 문자주의에 빠졌고, 유대인들이 주인공이 되는 천년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인기를 끌었고 오늘날까지 천년기전재림론중 가장 우세한 형태로서 지속되었으며, 세대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917.3)
 천년기전재림론의 입장으로 하는 성경 주해와는 대조적으로, 19세기의 나머지 기간 내내 천년기후재림론자들은 예수의 재림 이전에 보편적인 개선과 세계적인 회심이 먼저 있을 것이라는 그들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선포했다. (917.4)
 같은 시기에, 일찍이 포르피리오스와 알카사르가 소개한 합리주의적 관점은 휴 브로튼(Hugh Broughton, 1549-1612년), 휴고 그로셔스(Hugo Grotius, 1583-1645년), 헨리 해먼드(Henry Hammond, 1605-1660년), 그리고 독일의 합리주의자들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후자의 접근법은 성경의 묵시를 먼 과거의 문학으로 취급하면서 그것의 예언적 요소와 우주적인 범위를 부정하였다. (917.5)
 이러한 형태의 과거주의는 오늘날 역사—비평학파(historico—critical school)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따금씩 묵시문서의 예언들을 역사상 사건들에 대한 파노라마 같은 예측으로 계속 간주하는 저술가들을 제외하면, 이 역사—비평적 접근은 현재까지 묵시문학 해석의 지배적인 견해가 되었다. 그것은 금세 성경 묵시와 비성경 묵시의 구분을 허물고 단지 역사적 현상으로서 묵시 문서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917.6)
 2. 묵시문학에 대한 역사적— 비평적 연구
 유대인과 그리스도교 묵시에 대한 최초의 포괄적인 설명은 1832년 프리드리히 뤼케(Friedrich Lücke) 에 의해 출판되었다. 그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조사로 자신의 연구를 시작하고 나서 다른 묵시 문서들로 눈을 돌렸다. 다음과 같은 그 책의 부제목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요한계시록과 전체 묵시문학에 대한 포괄적인 소개의 시도”(An Attempt at a Comprehensive Introduction to the Revelation of John and to the Complete Apocalyptic Literature). (9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