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에 대한 이 신비주의적이고 영적이며 비역사적인 접근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우화적 해석에 반영되고 발전되었다. 그 히포의 주교에게 있어서 천년은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세상의 종말 사이의 기간을 아우르는,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시간 간격을 나타내는 대략의 숫자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특히 천년론자들의 극단과 육적인 기대에 반응했다. 그것은그 자신도 한때 동조했던 것이었다. (914.1)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첫째 부활은 영적이고 풍유적인 것이었으며, 죄악으로 죽은 영혼이 의의 삶으로 깨어날 때에 일어났다. 두 번째 부활은 세상의 끝에 있는 몸의 부활이었다 이 두 사건 사이에는 천국과 지상의 교회가 동일했다. 교회는 현재 그것의 주와 함께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왕국이었다. 요한계시록 20:4의 심판의 보좌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었다. (914.2)
 많은 역사적인 해석자들이 요한계시록 13장의 첫번째 짐승을 로마 국가와 동일시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을 악한 세상으로 해석했다. 이와 같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의 묵시에서 동시대의 역사적 사건에 관한 정보를 찾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허용하지 않았다. (914.3)
 아우구스티누스도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체계는 재림의 소망을 먼 미래로 밀어내 버렸고, 결국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를 약화시켰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의 삶과 예언 해석의 대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천년기를 현세 교회의 통치로 보는 그의 혁명적인 철학은 이후 교회사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성경의 묵시문헌들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적이고 풍유적인 해석은 중세 내내 공식적인 교회의 교리가 되었다. (914.4)
 B. 중세
 그 후 아우구스티누스의 상징적인 견해가 지배적이었던 1,000년 동안에, 초기교회 시대를 특징지었던 예언적-천년기전재림론적인 관념들은 휴면상태로 있었으며, 가끔씩 천년론자 그룹들에 의하여 되살아났을 뿐이다.. (914.5)
 12세기에 피오레의 요아힘(Joachim of Fiore, 1135-1202년)은 중세의 가장 중요한 묵시론 저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역사가들은 요아힘과 그의 추종자들이 묵시적 전통의 역사에서 새로운 무대를 개척했다고 주장한다. (914.6)
 피오레의 수도원장인 요아힘은 자유롭게 우화적 해석을 사용했으며, 그의 해석은 놀랍도록 상상력이 풍부하고 독창적이었다. 삼위일체를 모델로 사용하여, 그는 서로 넘나드는 세 개의 큰 시대로 역사를 나누었다. 성부 하나님의 시대는 구약 시대와 대체로 일치하며, 사람들이 육신에 따라 사는 시대였다. 성자 하나님이 지배하는 시대는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서로 얽힌 시대였다. 교회의 계급 구조를 특징으로 삼는 두 번째 시대는 그리스도교의 발흥으로 시작하여 약 30년씩 42세대의 기간에 걸쳐있다. 요아힘은 성령 하나님의 시대가 머지않아, 자신의 당대에 시작될 수도 있다고 기대했다. 그 마지막 시대는 새로운 수도회가 이끄는 새로운 시대가 될 것이며, 추기경과 성직자들이 없는새로운 공동체가될 것이었다. (914.7)
 요아힘은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에 대하여 주해하면서 환상적인 설명들을 내놓았다. 그는 천년 동안 지상에 왕국이 이루어진다는 천년론에 맞서 싸웠으며,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기를 성령의 시대와 동일시했다. (914.8)
 그 수도원장은 그리스도교에서는 최초로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1,260일의 기간을 1,260년이라고 해석하였다. 하지만 그보다 3백년 전에 이미 유대인 해석자들은 다니엘 12장의 1,290일을 햇수로 간주한바 있다. 요아힘은 구약과 신약의 글자를 하나하나 비교해가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사건들이 성경에 분명히 나타난 것을 찾았다. (915.1)
 다음 세기 동안 요아힘의 생각은 개인과 집단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 중의 일부 사람들은 그의 개념을 혁명적인 결론으로 가져갔다(참조 영적 프란치스코회). (915.2)
 요아힘에 이어 성경의 묵시문학에 대한 관심은 유럽 전역에 걸쳐 나타났지만 특히 영국(참조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년]와 그의 친구 존 퍼비[John Purvey, 1353-1428년경])과 보헤미아에서(참조 얀 밀리치[John Milic, 1374년 사망]; 그의 제자인 야노프의 마티아스[Matthias of Janow, 1394년 사망], 나중에는 얀후스[John Huss, 1372년경-1415년]) 분명히 드러났다. (915.3)
 C. 종교개혁
 1. 개혁자들의 역사주의
 종교개혁의 성경에 대한 강조는 묵시문학 해석에 대한 관심의 부활을 동반했다 16세기에 출판된 간행물 중에는 대량의 논쟁적인 문헌들이 있었는데, 그 표현이 직설적이고 20세기의 귀로 듣기에는 투박하고 저속한 점이 많다. 많은 구절과 논평들은 강력한 만화와 풍자로 묘사되었다. 정치적, 사회적 좌절감이 불안정한 종교적 분위기에 침투하여, 종교개혁자들의 통제를 벗어난 폭력의 분출을 야기했다. 어떤 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주의가 취한 방향은 종종 다른곳에서 취한 경로와매우 달랐다. (915.4)
 일부 저술가(참조 장 칼뱅)들의 해석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수정된 형태로라도)가 지속되는 한편, 종교개혁 기간 동안에는 성경의 묵시문헌에 대한 역사적인 해석과 문자적 접근이 지배적이 되었다. 다니엘 2장7장의 시간 예언을 바벨론, 메데-페르시아, 헬라, 로마의 4개 나라와, 이어지는 로마의 해체에 적용하는 해석이 예언의 역사적인 성취에 대한 견해에 오랫동안 계속해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마찬가지로, 묵시에서 예언적 하루를 문자적인 1년으로 보는 원칙도 이 기간 동안에 널리 적용되었는데, 특히 예언상의 1,260일, 세 때와 반 때, 그리고 마흔 두 달에 대하여 그러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그리스도교 시대의 전체를 보여 주는 것으로 여겼다. (915.5)
 해석이 다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개혁파들 사이에서는 예고된 적그리스도를 교황권으로 생각하는데 대한 광범위한 합의가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투르크를, 또 다른 사람들은 둘 모두를 적그리스도로 해석했다. 적그리스도는 다니엘서의 작은 뿔, 마태복음 24장“멸망의 가중한 것”, 바울이 말한 “불법의 사람”, 요한계시록의 짐승, 바벨론, 음녀와 동일시되었다. 이것들을 교황권이라고 해석함으로써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로마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915.6)
 마르틴 루터와 울리히 츠빙글리는 묵시록의 가치를 폄하했고 장 칼뱅도 많은 묵시적 상징들의 의미에 대해 불확실하게 생각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에서 언급하는 배도하고 억압적인 시스템이 교황권이나 투르크 족이라고 생각하는 데는 주저하지 않았다. (915.7)
 사람들은 마지막이 가까워졌다고 믿었다. 루터와 츠빙글리 같은 개혁자들은 천년기에 관한 억측들에 대하여 회의적이었지만, 뮌스터의 급진적 개혁파들과 청교도 혁명 기간의 제5 왕국파와 같은 폭력적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예방할 수는 없었다. (915.8)
 2. 반대 해석들